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23화 (23/140)

EP.23 입학 (3)

입학식 때부터 자꾸 내 쪽을 쳐다보길래 설마 했는데, 정말로 이렇게 찾아올 줄이야.

‘사람이 드문 곳이라 다행인가.’

보는 사람이 많았다면 어떤 가십거리가 됐을 지 모른다.

올해 입학생 중 가장 눈에 띄는 황녀와 내가 말을 섞는 것만으로도 어떤 소문이 떠돌게 될 지.

악의가 없는 부류라 더욱 귀찮다. 우선 누군가 보는 일이 없도록, 「인식저해」를 부여한「면」을 펼쳐 황녀와 나를 감쌌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황녀가 경계하듯 자세가 살짝 바뀌긴 했으나, 적의가 없음을 깨닫고 잠자코 나를 지켜봤다.

「마왕의 저주」를 해주하고 마력수치가 300이 넘어가니 「면」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아직 실전에서 활용해보진 않았지만.

아무튼 혹여라도 지나가는 사람에게 보일 걱정을 놓으니 긴장을 풀었다.

“…그래서. 어쩐 일이신지요, 아이리스 황녀 전하?”

“앞을 막아선 게 무례한 일이란 건 알고 있습니다. 다만…, 아.”

존댓말인가.

루크 황자는 부모인 황제와 황후를 제외하고 누구에게도 존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이리스는 착실하게 예의를 지켰다.

말을 잠시 멈춘 아이리스는 누군가와 대화라도 하듯 입가가 우물거렸다.

그런가. 성검에 깃든 여신과 대화 중이로군.

성검이 그 어떤 성유물보다도 독보적으로 가치와 위상이 드높은 이유는 바로, 용사가 쥐었을 때 여신이 직접 용사에게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성국의 성왕조차 여신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듣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떠올렸을 때 성검의 가치가 어느 정돈지는 두 말할 것도 없겠지.

나는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물론 황녀가 용사라는 사실을 몰라야 정상이기에, 짐짓 미묘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전하?”

“…아, 아. 죄송합니다. 실례를 저질렀군요.”

“괜찮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혹, 체페슈 공작 전하께서는….”

“체페슈공.”

“…네?”

“부디 편하게 불러주십시오. 이곳은 아카데미가 아닙니까?”

나는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어찌 됐든 그녀와는 관계를 형성해야했고, 내가 아는 황자 루크가 아니라 황녀 아이리스가 나타난 시점에서 루크를 염두해두고 짰던 계획은 모두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단 정보를 모으고 새로운 계획이 얼추 윤곽이 잡힐 때까지는 아이리스와의 접촉을 미뤄두려 했지만, 이렇듯 그녀 쪽에서 먼저 접근했는데 피할 순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을 기회로 삼아 어떻게든 관계를 이어나갈 발판을 만들어야 할테지.

“그…, 네. 체페슈공.”

“좋습니다.”

내 생각이 얼추 들어맞은 듯, 아이리스는 잠시 머뭇거리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잠시 머뭇거리긴 했으나 그것도 별로 부끄러워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내가 만족스러워 하자, 아이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체페슈공도 저를 편히 불러주셔야지요. 체페슈공의 말대로, 이곳은 아카데미잖습니까?”

“아이리스.”

“….”

“ㅡ라고 불렀다간, 주변이 시끄러울 겁니다. 전하.”

“그…렇겠군요.”

방금 살짝 움찔했다. 설마 곧바로 이름을 불러버릴 줄은 몰랐겠지. 내가 절충해서 전하를 붙여주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뭐라고 해야 좋을까. 데이지가 날카롭고 도도한 인상이지만 성격이 성격이다보니, 강아지 느낌이 강했다. 누님은 차갑기보단 요염한 인상이고.

반면 아이리스는 차갑고 도도한 냉미녀 그 자체다. 북부 대공의 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런 여자가 어안이 벙벙해 보인다. 이미지 차이라고 할까. 그래서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황실의 금지옥엽으로 평생 자랐을 그녀가 자기 눈 앞에서 이렇게 태연히 구는 남자를 언제 보았겠는가.

“크흠. 아무튼 체페슈공.”

“네, 전하.”

어쨌든, 방금의 추태는 잊으라는 듯 헛기침을 해 분위기를 전환한 아이리스가 다시금 진지한 눈빛이 되었다. 귀찮은 일이 될 거 같아 은근슬쩍 넘어가려 했더니, 기어코 나를 불러낸 본론을 얘기하려는 듯 싶었다.

“혹 체페슈공은…, 악마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

뭘 봐? 악마?

“악마라. 마족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틀렸습니다. 아니, 본질적으로 비슷합니다만….”

성검한테 뭔가 귀띔이라도 들었나.

이 시점에서 악마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나 뿐이어야 할텐데.

마족은 현재 대륙 변두리에 숨어 살고 있는, 악마의 잔재다. 오크나 오거 같은 몬스터들이 마기에 침식당하면 마족이 되기도 한다. 성국이 주력으로 사냥하는 대상이다.

악마는 아예 다른 차원에 기거한다. 마왕과, 그 아래 4명의 군단장, 그 아래 72명의 악마들. 작중 시간이 진행됨에 따라 하나하나 이쪽 차원으로 넘어와, 대륙 곳곳에 남아있는 마족들을 이끌고 대륙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리고 나도 혼란에 빠졌다.

…가장 처음 등장하는 악마, 33위의 가프가 등장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그런데 악마를 본 적 있냐니? 나는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아는 체를 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모르겠군요. 마족이라면 종종 토벌합니다만…. 그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으음….”

잠시 끙 앓던 아이리스의 시선이 다시 제 손목으로 향했다.

너무 티 나게 구는 거 아닌가, 싶다가도 애초에 그녀가 용사라는 걸 아는 나니까 눈치 채는 거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냥 황녀가 손목을 보는 버릇이 있구나ㅡ 하고 마리라는 것을 알기에 속으로 삼켰다.

그나저나 여신과 무슨 얘기를 하는거지. 괜히 불안해졌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려 할 때, 아이리스가 입을 열었다.

“…. 제가 괜한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체페슈공.”

“아닙니다. 오해가 풀렸다면 다행입니다.”

“네. …언제나 제국을 위해 힘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차라도 한 번 대접할테니, 꼭 찾아와주시길. 그럼 이만.”

“…예?”

감사? 무슨 감사. 오해 풀렸다면서. 안 풀린 거 같은데?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아이리스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차를 대접해준다고 말한 걸 보면 나쁜 인상을 심은 건 아닌 것 같은데, 여신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모르니 찝찝했다.

흠.

기억을 잃기 전에 악마랑 만난 적이….

아.

씨발.

마왕….

나는 한때 내 상태창에 있던 「마왕의 저주」와, 그 후유증으로 아직도 남아있는 「기억상실」을 떠올렸다.

*

영 찝찝함을 지울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할 일을 미룰 수도 없었다.

크리스티나를 찾아가자, 그녀는 입학식이 끝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 친구를 사귀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크리스티나에게 말을 걸기 전에 그녀가 새로 사귄 두 친구를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이대로 다가가서 크리스티나를 데려갔다간, 이상한 소문이 퍼질지도 모르니까.

“체페슈 공작 전하가 크리스티나를 데려갔다”라는 사실이,“크리스티나가 체페슈 공작 전하의 애첩이다”가 될 지도….

생각해보니 단순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아무튼 그런 소문이 입학 첫날부터 퍼졌다가 크리스티나가 귀찮은 일에 휘말릴 지도 모른다.

그래도 무작정 그녀가 친구들과 헤어지기를 기다리는 것도 지루하고 해서, 나는 은밀히 그림자로 변해 그녀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으응, 그래서 말이지ㅡ.”

“어머. 정말요?”

스륵ㅡ.

도란도란 떠드는 여학생들의 그림자로 들어간다는 건, 정작 실행하고 나니 굉장히 변태스러운 짓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야 위를 올려다보면 바로 가랑이가 보이고.

흠.

크리스티나를 앞에 두고 다른 여자한테 관심을 주는 건 그것대로 실례되는 짓이겠지ㅡ.

반대로 말하자면 크리스티나는 내 여자니까 엉덩이를 좀 훔쳐봐도 상관 없는 거 아닐까?

나는 친구들과 떠드는 크리스티나의 아래로 들어갔다.

“으응?”

“크리스티나? 무슨 일 있나요?”

“아, 아뇨. 아무것도….”

정숙한 귀족집 아가씨들 사이에서, 귀족 아가씨를 희롱하는 건 의외로 즐거운 일이었다.

여자 교복이 치마가 긴 게 내게는 호재라면 호재였다. 덕분에 그림자가 발목을 타고 올라가도 눈치채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나는 크리스티나의 종아리를 넘어서, 허벅지와 가랑이를 살살 간지럽혔다.

그림자로 하반신을 스타킹처럼 감싸고, 손가락만 슬쩍 꺼내고 문질문질 꾹꾹 한다던가.

“흑.”

“어디 아픈 건 아니죠, 크리스티나?”

“괘, 괜찮아요…. 갑자기 컨디션이 조금….”

그럴 때마다 크리스티나는 몸을 흠칫흠칫 떨어댔다. 허벅지에 식은땀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이 이상 했다간 순진한 아가씨가 울겠다 싶어 나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피의 맹약을 나눈 상대이니만큼 저항 없이 전음을 보낼 수 있었다.

『크리스티나.』

『…. 스칼렛 님?』

『그래. 나야.』

『혹시 지금 이것도 설마….』

『나 맞아.』

우뚝. 크리스티나가 멈춰 섰다. 그녀는 걱정하는 친구들에게 상냥히 웃으며, 몸이 조금 안 좋아져서 먼저 들어가 쉬겠다고 말했다. 물론 착한 그녀를 의심하는 친구는 하나도 없었으므로, 다들 그녀를 걱정하며 푹 쉬라고 할 뿐이었다.

『…크리스티나?』

삐졌나?

몇 번이고 전음을 보내도 그녀는 묵묵부담이었다. 그녀는 잰 걸음으로 기숙사로 돌아왔다.

나도 빠르게 그림자에서 나왔다.

화났나, 싶어 슬쩍 살핀 크리스티나는ㅡ.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잔뜩 심통이 난 얼굴을 했다.

“재밌으셨어요?”

“조금.”

“나빠.”

그러곤, 내게 팔을 벌렸다. 어서 안아달라는 듯.

“그래도 좋아해요.”

나는 그녀를 안아주었다.

“나도.”

*

가볍게 뒹굴었다. 몸을 섞지는 않았다. 가볍게 서로 손장난만 쳐준 정도.

나는 흐트러진 교복 차림의 크리스티나의 커다란 젖가슴을 주물렀다. 그녀도 내 자지를 주물러댔다. 그 이상 나아가지 않고, 그냥 그 정도의 스킨십을 오랫동안 즐겼다.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좋았다.

나는 내 가슴팍에 고개를 기댄 크리스티나의 뺨을 쓰다듬었다. 슬슬 본론을 꺼내야했다.

“테일러 남작가 알지.”

“……. 네에.”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 같길래 젖가슴을 주무르며 진정시켰다.

“너무 미워하진 마. 그 집안 사람들이 다 네 새어미처럼 나쁜 이들은 아니니까. 좋은 사람이면 좋은 사람이지.”

“…스칼렛 님이 어찌 아셔요?”

“내 말 못 믿어?”

“믿지만….”

그래도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이미지는 어쩔 수 없나보다. 이거 참. 그렇게 테일러를 싫어하면서, 나중에 루나 테일러가 입학했을 땐 그렇게 잘해준다고?

우리 크리스티나 완전 천사다, 천사.

“기특하긴.”

“네? 앗. 으앙. 거기 만지면 젖어요.”

주물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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