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 입학 (2)
단상 위에 선 황녀의 자태에 학생들이 술렁거렸다.
저 사람이 바로, 레티시아 체페슈와 함께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 난 두 여인 중 한 명ㅡ.
새하얀 머리칼, 하얀 피부에 녹색 눈동자. 꼭 성국의 성녀와도 견줄 법 한 경건함을 품게 만드는 아름다움.
레티시아 체페슈가 사람을 홀리는 미인이라면, 아이리스 아르카디아의 미美는 사람을 따르게 만드는 아름다움이었다.
ㅡ.
라고 해도, 나로서는 영문을 모를 일이다. 주변에서 들으란 듯 술렁대는 소리를 나름 취합해본 거다. 아이리스 아르카디아? 완전 처음 들어본다. 누군데 그게.
눈 앞에 있다. 내 자리가 맨 앞이어서인지, 단상 위에서 선서를 읊는 황녀와 몇 번 눈이 마주친 것 같다. 이상하게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황녀님이 웃으셨어!”
“날 보고 웃어주신 거야!”
“거울은 보냐?”
괜히 내 뒷자리가 소란스럽다. 꼭 아이돌을 마주한 혈기왕성한 십대 청소년들 같은 모습이다.
아니지. 십대 청소년이 맞나? 나나 누님이 기묘하게 나이가 많을 뿐 다들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인 걸로 알고 있으니.
괜히 기분이 묘해졌다.
…. 뭐가 달라진 거지? 왜 황자 루크 아르카디아가 아니라,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황녀가 여기 있지?
그럼 용사는?
루크는 존재하는 인물인가? 성검을 뽑고 마왕과의 싸움에서 가장 활약해야 할 용사는 어떻게 됐지?
성검은?
눈 앞에 있는 황녀가 용사인가? 성검은 이미 뽑았나?
손목을 확인할 수 있다면 성검의 주인을 뜻하는 낙인이 있는지 확인해볼 수 있을텐데.
아니, 그것도 모종의 수단으로 가렸다면 확인하기 힘들다. 직접 손으로 만져보면 모를까….
중대 문제다. 내가 아는 많은 것들의 전제가 무의미 해진다.
안 그래도 기연이나 히든 피스 따윈 하나도 모르는데, 그나마 알고 있던 캐릭터 설정까지 쓸모 없어진다면 환생자 메리트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고….
‘처음부터 다시 검토해야겠어.’
누님과 데이지를 불러 하나씩 검증해야 했다. 황자만 바뀐 게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황녀의 선서를 듣는 둥 마는 둥, 앞으로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수정했다.
‘왜 계속 쳐다봐?’
괜히 이쪽을 계속 쳐다보는 황녀에게 짜증이 났다.
티를 내진 못했지만.
*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첫날이라 수업은 없다고 했다. 이대로 기숙사로 돌아가 잠들어도 상관 없었다.
내가 일어나니 접근하는 무리가 없진 않았으나 모두 무시했다.
감히 누구도 나를 붙잡진 못 했다. 아카데미 내부에선 평등하다 평등하다 아무리 말하더라도 나는 체페슈였으니까.
내가 직접 문을 열 필요도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대기하던 아카데미의 직원이 열어주었으니까.
강당에서 나오자 안으로는 채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주인을 기다리던 이들이 나를 보고 기겁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무심하게 지나쳤다.
나는 곧바로 누님이 잠들어 있을 기숙사로 향했다. 문 밖에서 노크하고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림자를 타고 바로 들어가면 되니까.
아침이라며 흐드러지게 두 다리 뻗고 잠든 누님의 얼굴을 보니 조금 괘씸해졌다.
나한테 미리 황녀에 대해 말해주지도 않고, 편하게 자고 있는 걸 보니까 혼내주고 싶었다.
누님 잘못이 아님에도 괘씸하니까, 라는 핑계로 혼내주고 싶을 뿐이지만.
찰싹!
“히익!”
누님의 허벅지를 때리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린 누님이 눈을 떴다.
내 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반사적으로 그림자 창이 튀어나왔을텐데.
구울 메이드를 시켜서 실험해본 거니까 확실하다. 손이 닿자마자 그림자가 튀어나와서 씹어삼켰다.
아까운 일손 하나를 잃게 만들었다고 누님한테 혼났었다….
아무튼 아무리 잠들어 있다한들 누님은 내 손만큼은 착실히 구분했다.
지금도 얼떨떨한 얼굴이면서도 내가 찰싹 때린 걸로는 아무 말 안 한다.
“으으으응. 왔니? 입학식은 끝났고?”
“끝나자마자 왔지. 레티 보고 싶어서.”
“또 또. 이름만 부르고.”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나도 급하게 달려오긴 했지만, 잠 자던 누님을 깨워놓고 곧바로 본론을 꺼내진 않았다.
침대에 오르자 누님이 자연스럽게 내 품에 들어왔다. 가슴팍에 뺨을 대고서, 몽롱한 얼굴로 부비적 댄다.
아직 잠이 덜 깬 것 같은데. 흐트러진 백금발을 쓰다듬었다.
“후후…. 누나가 그렇게 보고 싶어서 달려온 거야, 그럼?”
끝나자마자 왔다는 말이 기분이 좋은지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직 잠결에 빠진 채라 목소리가 끈적하다. 나는 누님의 하얀 볼을 주물렀다.
“그럼. 중간에 나올까 하다 말았다니까. 맨 앞자리만 아니었으면 누님 보러 나왔을텐데.”
“우응.”
누님은 입을 열다 말고 대답 대신 내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아프지 않게 입술로 감싸서 쪽쪽 빨기 시작한다.
기분은 좋은데, 막상 동생이 비행소년마냥 행사를 거르고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하니 옹호하기도 애매한 눈치인 것 같았다.
“움, 츄. 그래두 가급적 그런 건 빠지면 안돼. 우린 체페슈니까.”
“나도 알아.”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소곤소곤 내게 조언하는 누님이 사랑스러웠다. 내게 올바른 말을 해주면서도 내가 기분이 상할까 눈치를 본다. 눈치를 보면서도 내게 도움이 된다면 주저 없이 말한다. 나는 누님의 그런 헌신적인 올곧음이 좋았다.
누님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던 손이 등으로 옮겨갔다. 누님의 머리는 꽤 길어서, 엉덩이 바로 위까지 내려왔다.
그런 누님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면, 누님의 아름다운 머리칼이 내 손등을 간질였다. 나는 그 감촉이 꽤 좋았다.
“응….”
쓰다듬 받는 게 기분 좋은 강아지처럼 눈을 감고 내 손을 받아들이는 누님의 뺨에 입술을 댔다. 쪽ㅡ, 소리와 함께 누님의 손이 내 허리를 감쌌다. 입술이 포개졌다. 뜨거운 숨결이 맞닿고, 천천히 얽혔다.
“츕….”
“옳지. 착하다…. 레티, 혀 내밀어봐.”
이럴 때의 누님은 무척 순종적이다. 무엇을 시키더라도 고분고분 따른다. 선분홍빛 혀를 베 내밀고서는, 기대감 품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럼 나는 참을 수가 없어져서, 누님의 혀를 물고 빤다. 쭙, 쭙, 쪼옥. 음탕한 소리만 계속 흐른다.
풍만한 젖가슴이 내 가슴팍에 눌린다. 피를 몽땅 써버려서 슬렌더하게 변했던 지난날의 누님과는 다르다. 며칠간 푹 쉰 누님이 제 컨디션으로 돌아오며, 숨 막힐 듯 아름답고 육감적인 몸이 나를 유혹했다.
나는 그대로 누님과 몸을 겹쳤다.
*
“헤윽.”
이제 한계라는 듯, 누님이 등을 긁어댔다. 핏물이 흐르는 게 느껴진다.
이렇듯 내 등과 어깨에 남은 상처는 날이 가도 줄어들지 않고 그 수를 늘리고 있었다. 일부러 치료하지 않고 놔두는 사이에 새로운 상처가 생기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일단은 이쯤 하기로 했다. 내가 세 번 정도 하는 동안 누님은 열 번이 넘는 절정에 헤롱헤롱한 상태다.
이대로면 묻고 싶은 것도 묻기 힘들다.
그나저나,
“데이지는?”
“잠까한…, 심부르음…. 곧 올 거야….”
심부름 보내놓고 자고 있었다 이건가. 내가 누님의 방에 들어오고 두 시간 가량 지난 시간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어제 막 아카데미에 들어온 애를 혼자 어디 보낸 거지ㅡ, 라는 걱정이 무색하게도 데이지는 위풍당당하게 돌아왔다.
두 손이 비어있긴 하지만 그거야 누님이 아공간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라도 빌려주었을테니까.
예상대로 데이지는 손목에 있던 팔찌에서 우수수 짐들을 쏟아냈다.
이건.
“콘돔?”
콘돔 말고도 눈에 띄는 것들은 하나 같이 성인용품이다.
“엄청 부끄러웠어요…….”
막상 자기가 사온 걸 내 앞에 늘어놓으니 데이지의 얼굴도 터지기 직전이다.
나는 누님을 돌아봤다.
“자기가 사는 건 부끄러우니까 데이지를 시켰어?”
“나ㅡ, 나는 체페슈의 아가씨구. 그런 걸 어떻게 내 손으로 사니.”
데이지도 나름 유서 깊은 귀족집 따님인데. 내가 지적하자 데이지가 작게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ㅡ. 아무튼!”
말 돌리네. 어쨌든 당장 시킬만한 종자가 데이지 뿐이니 어쩔 수 없는 셈 치고 넘어가기로 했다.
소심하게 항의하는 데이지에게,
“너한테도 써줄게.”
라고 설득하니 쉽게 넘어왔다.
백작가 아가씨가 야한 짓 해준다는 말로 설득 되는 거 괜찮은 일인가.
아무튼 데이지도 왔으니 슬슬 본론을 꺼내들었다.
“이번에 황녀가 입학했던데.”
“아ㅡ, 네. 몇 년 전부터 예정 돼 있었죠.”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어서.”
황녀에 대한 정보 뿐 아니라, 마탑이나 북부 쪽의 얘기도 캐낸다. 최대한 정보를 모아야 했다.
크리스티나도 조만간 만나러 갈 생각이었으니, 데려오는 김에 루나 테일러에 대한 정보도 좀 얻어야겠다.
*
누님과 데이지에게서 최대한 정보를 얻어냈다.
현재 가장 유력한 마탑주의 후보가 여자라는 것도, 북부 대공의 후계자가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는 것도 알았다.
내가 황녀한테 관심이 생긴 줄 알고 누님이 질투하길래 달래주느라 힘들긴 했지만.
황녀한테 관심은 없다. 하지만 내 목표대로라면 어느 정도 친분을 쌓긴 해야하기도 했다. 더불어 북부 대공의 딸까지도.
동성이라면 라이벌 관계 구축 정도로 될 테지만 이성간의 관계가 어디 그리 원하는대로 되던가. 나나 황녀가 서로에게 그럴 마음이 없다 해도 주변에서 어떻게 볼 지 모를 일이고.
‘일단 크리스티나를 찾아야겠어.’
크리스티나를 만나서 테일러 가의 정보도 들어야 했다. 변두리 남작가의 정보를 듣고 싶어하면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몰라 굳이 물어보진 않았는데, 지금은 그걸 가릴 때가 아니니까.
크리스티나가 어디에 있는지는 피의 맹약 덕에 알 수 있었다. 그다지 먼 곳에 있지는 않았다.
그 때ㅡ,
“체페슈 공작 전하.”
아이리스 황녀가 나를 불렀다. 손목에 미미한 빛무리를 띤 채.
다른 사람들은 모를테지만 나는 모를 수가 없었다. 누나의 요청으로 그렸던 용사 루크만 몇 장인가.
수백번이나 그렸던 빛의 문양이, 흐릿하지만 그녀의 손목에서 보였다.
이쯤 되니 인정할수밖에 없었다.
눈 앞의 아이리스 아르카디아가, 내가 알던 루크 아르카디아라고.
“ㅡ예. 아이리스 황녀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