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21화 (21/140)

EP.21 입학

누님과 데이지를 번갈아 상대해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래저래 걱정거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당장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머리 싸매고 있어봐야 스트레스만 될 뿐이니까,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지는 잠시 내려놓고 즐기기로 했다.

이젠 누님도 데이지도 눈치 보지 않고 내게 찾아온다.

내가 일하는 동안 대충 합의가 끝난 모양이었다.

‘조만간 셋이서 하자고 할 것 같은 눈치던데.’

나야 좋지만.

안 그래도 오늘 아침 모닝 펠라로 날 깨운 데이지와, 밤새 침대에서 뒹굴었던 누님이 동시에 달려들어 더블 펠라를 받았다.

내 아래에서 열심히 경쟁하듯 낼름 거리는 게 꼴렸다. 오늘 일정만 없었다면 아마 셋이서 뒹군 기념일이 되지 않았을까.

‘좋았지.’

입학식이 멀지 않았다.

영지 업무야 애초에 평소에도 영주 대리가 잘 하고 있으니 신경 쓸 건 없지만, 체페슈 가를 정리해야 했다.

가문의 구성원이 나와 누님 둘 뿐이고, 고용한 사람이래봤자 데이지 뿐. 데이지를 우리의 수행인으로 데려간다면 체페슈 가는 텅텅 비게 된다.

그러니 우리가 떠난 동안 아무도 저택에 들어올 수 없게 봉인 처리를 해 둘 준비를 미리 해둘 필요가 있었다.

나도 누님도, 흡혈귀 치곤 젊다 못해 어리다 뿐이지 아카데미를 다닐 나이는 아닌데.

이상해서 사정을 들어보니 우리 부모님이 망나니 같이 군 덕에, 노스페라투와 드라쿨레아 쪽에서 견제를 하기 전에 먼저 인간들과의 화합에 문제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쇼랬나.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가주 자리를 찬탈하기 전에 약속했던 일이기도 하고, 나 역시 어느 정도 손상된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동의했다고 한다.

영원 불멸의 체페슈 공작이라며 제국의 동맹이 된 지도 어언 수백년이거늘, 그 긴 세월간 가주의 자리는 스칼렛을 포함해서 단 두 번의 교체 뿐이었다.

흡혈귀 가문 체페슈가 아니라,

제국의 공작 체페슈로는 초대였던, 스칼렛의 조부. 블랙우드와 돈독하던, 제국 전체에 영향력을 뻗쳤던 남자.

그리고 그런 아버지에게 수백년간 억눌려, 후계자로만 수백년을 살아온 스칼렛의 아버지.

실제로 이 몸의ㅡ, 나의 아버지가 가주직을 맡은 건 채 백년이 안 된다고 한다. 스칼렛 태어나고 얼마 안 가서 물려받았다나.

그러곤 제 아버지가, 체페슈 공작이 일군 제국과 흡혈귀들 사이에서의 영향력을 급격하게 깎아먹었고ㅡ,

보다 못한 내게 토벌 당했다고. 결국 아버지가 가주였던 세월은 삼십년 가량밖에 안 된다고 한다.

우스운 일이다.

아무튼 새롭게 체페슈 공작이 된 내가, 흡혈귀 사이에서는 갓난 아기나 다름 없는 나이인지라 다른 삼대 가문의 원로들에게 참으로 많은 무시를 받았으나,

천 년 가까이 묵은 노괴들 못지 않은 힘과 수완으로 기울어 가던 가문의 위상을 바로 세우고,

조부 때 못지 않은, 제국에서는 오히려 그보다도 큰 영향력을 떨치게 됐다ㅡ.

라는 얘기를 누님한테 처음으로 들었을 땐 “와 스칼렛 먼치킨이네.”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스칼렛이 바로 나라는 걸 알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기억 잃기 전의 나는 도대체?

아무튼 주절주절 얘기가 길어지긴 했으나, 중요한 건 아카데미에 안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미 누님은 재학생이고. 게다가 아카데미에 가야만 원작 네임드들을 만날 수 있다.

마탑주 아론, 북부의 후계자 미하일, 황자 루크.

거기에 변두리 가난한 귀족집 따님이지만, 대정령사의 자질을 가진 루나 테일러.

아무래도 혼자보단 같이 싸워줄 파티원이 있는 편이 좋겠지. 마왕의 스펙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되는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조만간 황자 루크와 미하일은 아카데미에서 만나겠지만, 마탑주 아론은 내년에 루나와 같이 내 1년 후배로 들어올테니 만나려면 시간이 꽤 남았다.

우선은 루크와 미하일과 어느 정도 친분을 쌓는 것부터 하자.

누님의 공략도 끝났으니까.

아카데미라,

일단 한시름 놓은 뒤라 그런가. 은근히 기대가 된다.

*

제국 변두리, 테일러 영지.

영주의 저택만 보아도 영지의 상태가 많이 궁핍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체페슈 공작의 도움으로 식량 걱정은 덜었으나ㅡ.

“끙. 이 새낀 왜 연락이 없어?”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침대에 누워 골골 거리던, 절색의 미녀가 그 미모에 어울리지 않는 욕설을 뱉었다.

폭언의 대상은 바로 영지를 먹여살린 은인 체페슈 공작.

마치 원수를 부르듯 살기 어린 목소리다.

“…무슨 일 생긴 거 아니겠지?”

몸상태가 이러니까 찾아갈 수도 없고ㅡ.

여인의 투덜거림이 한참동안이나 이어졌다.

*

아카데미 입학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3일 전부터 미리 저택을 봉인해둘 준비도 모두 끝내놓았다.

그리고 하루 전날, 저택을 봉인해두고 곧바로 누님과 데이지를 데리고 아카데미로 통하는 게이트를 탔다.

제국의 모든 기술력을 동원 해 만든 부유섬.

그 전체가 바로 제국의 모든 인재를 길러내는 아르카디아 아카데미의 부지다.

출입을 위해선 부유섬의 게이트로 통하는 마법 코드가 적힌 초대장을 사용해야 하고, 그 외 출입은 철저하게 통제 된다.

부유섬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결계는 아르카디아 황실의 수호룡이 펼친 것으로, 결계를 뚫고 침입하려면 적어도 그 이상으로 마력에 대한 강력한 통제력을 지니고 있거나, 나나 마왕처럼 결계고 뭐고 씹고 뚫어버리는 카드가 있어야 했다.

‘마왕이 강림한다면 종잇장처럼 뚫리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만큼 안전한 곳도 없다는 거지.’

누님은 작년동안 다녔던 곳이니 태연스러워 보였지만 데이지는 신기한 듯 이곳저곳을 두리번 댔다.

게이트 자체는 몇 번 써본 듯 자연스러웠는데. 오히려 기억 상실 중인 내가 게이트에 낯섦을 느꼈다.

귀엽다는 듯 쳐다보는 누님 때문에 좀 부끄럽더라.

그대로 아카데미에서 준비해둔 숙소로 향했다. 누님이야 작년에 쓰던 숙소가 있고, 나는 예비 생도 신분이지만 자연스럽게 S랭크 숙소를 받았다.

데이지는 누님을 따라갔다. 생도 신분으로 들어온 게 아니라 사용인 입장이라 학교에서 따로 숙소를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에서 배정해준 숙소로 들어가 내부를 둘러보았다. 체페슈 본가에 비하면 좁지만, 실속은 비슷했다.

이 정도면 훌륭하지. 만족하며 짐을 풀었다.

‘S랭크라.’

잘 몰랐는데, 랭크 제도라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남녀 각각 상위 석차 10명까지는 S랭크. 50등까지는 A랭크. 100등까지는 B랭크. 그리고 그 밑으론 C랭크.

석차는 기본적으로 아카데미에서의 시험을 통해 매기지만, 그 석차가 쭉 유지되는 건 필기 시험 뿐.

학생들끼리 교수가 보는 앞에서의 정당한 대련을 통해 실전 시험의 석차 뒤집기도 허용하는 모양이었다.

으음. 내가 기억하기론 랭크 제도 같은 건 없었던 것 같은데.

잘 모르니까 이런 게 있었나? 있었겠지, 하고 넘어가게 된다. 이럴 땐 답답하긴 한데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참.

우선 누님과 만나러 가기로 했다. 숙소로 향하기 전 어디서 만날 지 다 정해두고 헤어졌으니까.

누님한테 아카데미 소개 시켜달라고 하고 데이트나 해야지.

ㅡ.

잔뜩 데이트를 즐기고 나서는, 그림자를 타고 은밀하게 숙소로 가 밤새 뒹굴었다.

뭐? 아침에 일어나야 하는 아카데미 생활에 적응하려면 일찍 자야해?

잘 생각해보니 어차피 해 뜨면 아무리 잠을 많이 잤어도 자동으로 피곤해지는데, 굳이?

잔뜩 혼내줬다.

그리고 입학식.

밤새 뒹군데다 해가 떠오르니 무척 귀찮아졌다. 진조가 된 이후에도 태양빛을 받으면 기분이 별로다.

컨디션이 좀 나빠지는 정도라 아무래도 상관 없는 수준이긴 했지만.

누님의 상태는 나보다 나쁘다. 밤새 시달려서 허덕대는 중. 작년에 썼던 침대며 이불, 베개까지. 손톱으로 잡아뜯은 덕에 전부 갈아야 되게 생겼다.

“누님. 일어나. 입학식 가야지.”

“나느은…, 안 가두…, 대잔아앙….”

그런가. 2학년은 안 가도 되는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클린으로 몸을 대충 씻어내고 일어섰다.

손자국으로 새빨개진 누님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것도 잊지 않고.

“히앙!”

“다녀올게.”

“뽀뽀….”

“귀엽긴.”

칭얼대면서도 고개는 내밀어서 뽀뽀해달라 투덜대는 게 귀여워 가볍게 볼뽀뽀 두 번에 입술에도 뽀뽀해줬다.

“다녀오렴.”

발가벗고 온 몸에 손자국이며 내가 더럽힌 흔적들로 가득한 상태로 그렇게 상냥하게 웃어주면 꼴리는데.

꾹 참고 다녀오기로 했다. 여기서 유혹에 넘어가면 진짜 늦을테니까.

*

‘그냥 입학식 쨀 걸 그랬나.’

지루하다.

흔히 그렇듯 학장이 몇십분째 계속 해서 끝나지 않는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다.

대신,

“우리 아카데미는ㅡ, 오랜 세월동안 제국의 주춧돌이 된ㅡ, 우수한 인재들의 양성ㅡ.”

학장은 5분만에 끝냈는데, 입학식을 진행하는 교수가 말이 너무 길었다.

있잖은가. 학교에 한 명씩 있는 학생부장 같은 타입. 애교심이 넘치는 나이 많은 중년.

벌써 삼십 분째 아카데미가 얼마나 훌륭한 인재 양성 교육 기관인지에 대해 설파하고 있다.

빨리 좀 끝냈으면 좋겠는데.

그나마 S랭크라고 가장 앞자리에 좌석을 나눠준 덕에 앉아서 지켜보고 있긴 하지만, 뒤의 A랭크부턴 모두 서 있는 상태다.

뒤에서 찔려오는 시선도 따끔따끔 하고.

“흠흠…. 조금 길어졌군요.”

드디어 끝인가?

“마무리는 신입생 대표ㅡ”

루크인가. 아직 성검을 뽑아 용사가 됐다고 발표하진 않았어도, 황자이니만큼 대표를 맡기기엔 손색이 없지.

나? 당연히 안 한다고 했다.

어디, 그럼 우리 주인공 얼굴이나 볼까.

“ㅡ아이리스 황녀께서 진행하시겠습니다.”

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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