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15화 (15/140)

EP.15 레티시아 (3)

밤이 되었다.

평소라면 누님이 다녀갔을 시간을 지나, 슬슬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이다.

나는 기다렸다. 오히려 조금 설레기까지 했다. 준비해둔 것들을 슬쩍 내려다봤다. 데이지는 이것들을 옮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나중의 즐거움을 위해 그것들을 서랍에 집어넣었다.

똑똑.

그때였다. 때맞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곤,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드, 들어가도 되니?”

들어가도 되냐고 물어놓곤, 내가 대답하기 전에 문이 열렸다.

아까 식당에서 봤었을 때와 같은 복장이다. 부끄럽다며 걸쳤던 가운은 안 보이고, 어깨며 쇄골이며, 배꼽까지 드러낸 얇은 캐미솔과 허벅지부터 하얀 다리를 과시하듯 노출시킨 돌핀 팬츠까지.

“…왜 불렀어?”

피를 잔뜩 써버려서, 슬렌더하게 쭉 빠진 몸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일부러 보란 듯 허벅지를 꿈질대며 누님이 천천히 걸어왔다.

은근하게 거리를 두고 있다. 긴장해서인지, 평소처럼 가까이 오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게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누님.”

“…응.”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내가 이런 목소리도 낼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늘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 초조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누님에게조차, 장난을 치면서도 목소리의 기저에는 스트레스가 터질 것만 같아 날카로워진 심상이 있었다.

아무도 느끼지 못 했을지언정, 나 자신만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의 내 목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들어도 듣기 좋은 미성이었다. 부드럽고, 달콤했다.

흡혈귀라서 그런 건가, 이것도.

“할 말이 있어.”

“으응.”

“으응, 이 아니라. 가까이 와야지.”

“….”

누님은 대답 대신 조르르 다가와 침대 위에 풀썩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달빛에 비친 하얀 살결이 더욱 눈 앞에 아른거렸다.

달빛이 반사 돼 반짝이는, 별빛을 머금은 듯 새하얗게 빛나는 백금발.

파르르 떨리는 붉은 눈동자. 홍조 띤 뺨.

“예쁘다.”

“…흑. 그, 그 말 하려구 불렀니?”

“무슨 말을 못하게 하네. 들어.”

단호하게 타박하자 또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풍만하고 매끈하던 몸 대신 자리한 보기 좋게 마른 몸매는 보호 욕구를 자극했다.

나는 누님에게 가만히 들으라고 해놓곤, 말을 잇는 대신 찬찬히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훔쳐봤다.

아니. 대놓고 봤다.

“…. ….”

이렇게 노골적으로 보고 있는데도, 누님은 기특하게 입을 꼭 다물 뿐이다.

되려 눈을 슬쩍 감고는 가슴팍을 가리던 팔을 슥 뒷짐 지듯 뒤로 물리기까지 했다.

변태 같은 누님.

“있잖아.”

“…응, 응. 말해봐.”

한참을 그렇게 눈으로 희롱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기다렸단 듯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누님.

“생각했어, 많이.”

“뭐를 생각했는데?”

“내가 누님을 좋아해도 될까.”

“…….”

순간, 말문이 턱 막힌 듯 누님이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흡, 하고.

내가 이렇게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을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어찌 말해야 할 지 갈피를 못 잡고, 새하얀 몸이 빨갛게 물든다.

캐미솔에 돌핀 팬츠라, 노출된 피부가 많아서 훤히 보였다.

“누님에게 자세하게 말해줄 수는 없지만, 사정이 있거든.”

“으응. 응….”

누님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 듯 했지만, 나는 말을 이었다.

“누님을 내 여자로 삼기로 했어.”

“히끅.”

“근데 그게 온전히 내 감정이 맞는지 모르겠어서.”

나는 고개를 숙였다. 말을 골랐다. 입 밖으로 내뱉기 전에 말해도 괜찮은가? 하고 고민했다.

솔직하게 모두 말한다고 해서 좋게 끝나고 만만세를 하게 되리란 보장이 어딨단 말인가.

나는 솔직하기로 했다. 그러나 누님에게 모든 걸 말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원래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다른 세상에서 게임 속에 들어온 거야. 이 세상은 원래 게임이고 누님은 게임 캐릭터야. 그딴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리고ㅡ.

내게 있어 누님은 누님이었다. 게임 속 악역 영애가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누이.

나는 나를 스칼렛 체페슈로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누님이, 공략 대상 따위가 아닌,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나는 말했다.

“추잡한 마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내 사정에 맞춰 누님을 멋대로, 누님의 마음을 짓밟는 짓일지도 모른다고.”

누님은 내 말에, 부끄러워 하던 것도 잊고 진지하게 내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둘 수 없었다.

“누님을 사랑하는 나와, 이용하고자 하는 나 중 누가 진짜 나인지 알 수가 없었어.”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적어도 그녀에게, 내가 해왔던 고민을 숨겨서는 안 됐다. 모두 말하고서, 진실 되고자 했다.

그것이 내 은인이었던 누님에게의 예의였다.

“누가 그랬지. 설령 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나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었다고.”

“…이번에 헤일리 영지에서 있었던 일?”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은 누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때 알았어.”

게임 캐릭터가 아니구나. 현실감이 없어서, 이곳이 게임인지 현실인지조차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헤매던 나의 세계는 그때 변했다.

정해진 선택지 따위로 흘러가는 게임 속이 아니라, 내 말과 행동으로 인해 바뀔 수 있는 현실이었구나.

게임 시스템 따위에 휘둘려서 멍청한 짓이나 하고 있었구나, 나는.

“그제서야 누님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어. 그동안은 현실도피 하듯 눈을 돌리던, 내 실수들이 보였어.”

호감도를 올리겠다며 누님의 질투를 유발하겠답시고 누님이 보는 앞에서 데이지를 탐한 짓.

호감도 락을 풀 방법을 찾아야 된다고, 정작 중요한 누님에게는 제대로 신경쓰지 않았던 일.

종종 대련하자는 말에 누님은 그토록 기뻐했는데, 호감도 락이 풀리지 않는다면서, 정작 누님이 얼마나 기뻐하는지는 돌아보지도 않았던.

그런 나의 잘못.

“누님은 언제나 날 위해 헌신해줬는데, 나는 나만 생각했지.”

나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시간이 멈춘 듯 했다. 누님도 나도 아무 말 없이, 시간이 흘러갈 뿐이었다.

그리고.

“후후. 무슨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누님이 손을 뻗었다. 고개 숙인 내 뺨을 감쌌다.

나는 누님의 손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올망이는 눈동자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동생이란다. 사과를 왜 하니…?”

또륵. 흐르는 눈물이 빛나는 보석 같았다.

아니, 그냥, 그 순간의 누님이 너무 아름다워서.

순간 바람에 팔랑이는 커튼과, 환하게 달빛을 반사하는 머리칼도, 흐르는 눈물도, 눈동자도, 자비로운 미소도ㅡ.

모두, 시간이 멈췄으면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기에.

“난 네가 나를 위해 그렇게 고민해줬다는 게 기뻐….”

멍하게, 넋을 놓고서.

“후후. 후후…. 나만, 고민하는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변태 같은 여자라고…. 약해진 동생을 상대로 흥분하기나 하는, 최악이나 다름 없다고….”

“무슨.”

“가만히 들으렴. 나도 다 들어줬잖니.”

쉿. 유난히 관능적이게 뻗은 검지 손가락이 내 입술을 꾹 눌렀다.

“으응…. 솔직히 잘 모르겠단다. 네 사정이란 것…. 말할 수 없는 부류의 것이지?”

“….”

끄덕였다.

“너는 예전부터 그랬지. 내겐 말도 없이 어딘가 훌쩍 다녀오곤 했어. 그 덕에 내가 네 대리로 일을 처리하는 데에 익숙해진 걸지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러나 잠자코 있었다.

어딘가, 속이 간질거리는 듯 했다. 무언가 떠오를 듯한.

“네가 다녀올 때면, 넌 그때마다 항상 훌쩍훌쩍 성장해져서 돌아오곤 했어. 분명 몇달도 안 되는 시간이었는데, 뭘 하고 돌아다닌 걸까….”

누님이 나긋나긋 하게 말을 읊었다.

“그때 생각했어. 너는, 감히 내가 불손한 마음을 품을 상대조차 안 되겠구나…. 무, 물론 그때부터,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던 건 아니었어. 그땐 너나 나나 그래도 어렸으니까.”

누님은 괜히 말하다 당황한 듯 변명을 덧붙였다. 그렇게 말해도 난 그때 우리가 몇살이었는지 모른다.

“음, 음. …아무튼. 그때부터 난 널 동경했던 것 같아. 아주 훌륭하고, 대단한…. 내가 평생토록 섬겨야 할 가주님으로 말야.”

심지어, 라고 누님이 덧붙였다.

“솔직히 우리 부모님이 썩 훌륭한 부모님은 아니었잖니?”

그랬나.

“그래서 네가 가주를 찬탈하고 두 분의 그림자, 피, 권능을 모조리 빼앗아 구울로 만들어 버렸을 땐 좀 통쾌하기도 했어.”

“그, 그랬어?”

“응. 기억은 안 나겠지만.”

패륜 아닌가?

“네가 하지 않았다면 노스페라투나 드라쿨레아에서 손을 댔을 거야. 그러고는 우리 가문의 힘과 영향력을 깎아먹었겠지. 아무튼 심한 사람들이었어. 죽여버려도 싸다 싶을만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 무언가 떠오를 것 같았기에.

“아무튼…. 그러다 평소처럼 네가 몇 달간 자리를 비우고 다녀와선, 다음날 픽 쓰러지지 뭐야. 얼마나 당황했는 줄 알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겨우 하루만에 깨어나긴 했는데, 기억이 없대서 얼마나 놀랐는데.”

거기까지 말한 누님은, 부끄럽다는 듯 에헴 에헴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또 깜짝 놀란 건, 그런 네 모습에 내가 기뻐했단 거야.”

자신의 치부를 들추듯이, 부끄러워 하는것 같기도 했고, 죄스러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후유증인지 뭔지, 기억을 잃고 몸도 한없이 약해진 네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어.”

그것은 고백이었다.

“평생토록 동경하던 동생의, 그토록 안쓰러운 모습은 처음 봤거든. 모성애라고 생각했어, 처음엔.”

근데 아니더라, 라고 누님은 말했다.

“변태 같은 게, 아래가 젖어 있는 거 있지?”

봐봐. 하고, 제 손가락에 뭐가 묻어 있는 마냥 손가락을 쫙 펼쳐 보여주던 누님은 눈을 감았다.

“그때 알았지. 내가 동생한테 말도 안 되는 감정을 품고 있구나.”

그것이 사랑인지 욕정인지는 몰랐지만. 둘 중 어느 쪽이든 매한가지였다.

“그걸 자각한 이후론, 참아야겠다고 생각했어. 낮에는 참을만 하더라.”

근데 밤에는 영 힘들었다고, 누나는 한숨을 쉬었다.

“미치겠더라. 그래서 밤에 널 재워놓고 네 방에 찾아갔어. 그리고, …대충 상상이 가니?”

“응.”

고개를 끄덕이자 쓰게 웃는다.

“미안해.”

“레티 누님.”

“어, 어?”

“그게 아니잖아.”

영문을 모르겠단 듯 고개를 기울인다. 참 내.

“내가 먼저 말한다, 그럼.”

“무, 뭘. 아니, 잠깐만. 너야말로 나한테 미안하다구 했으면서….”

떠드는 말은 무시했다. 숨을 가다듬었다. 꼴사납게 구는 모습은 보여주기 싫었으니까.

“좋아해.”

“………윽.”

“나랑 사귀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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