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 레티시아 (1)
헤일리 영지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아쉬워 하는 크리스티나와 작별 인사를 했다.
조만간 아카데미에서 만날테니 너무 아쉬워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마지막까지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는 헤일리 백작의 배웅을 받으면서 체페슈로 귀환했다.
“오셨어요, 주인님.”
나는 웃으며 반기는 데이지를 한 번 꼬옥 안아주었다. 데이지가 없었다면 구울 메이드들이 무표정하게 허리만 숙였을 거라 생각하니, 데이지를 고용하길 참 잘 했다 싶었다. 고용은 내가 아니라 누님이 한 거지만.
“앗. 주인님?”
얼떨결에 품에 안긴 데이지는 조금 당황한 눈치지만, 싫지는 않은지 슬쩍 품에 뺨을 부벼댔다. 새삼 귀여워서 엉덩이를 토닥토닥 만져줬다.
“힉. 으응, 지금은 안 돼요.”
“그런 거 아닌데.”
“읏.”
혼자 엉뚱한 상상을 하는 거 같길래 발칙한 엉덩이를 팡팡 때렸다. 으앙! 우는 소리를 내는 데이지가 제 엉덩이를 손으로 감싸며 사삭 뒤로 물러선다.
“아파요!”
“응큼한 상상을 하는 거 같아서.”
마치“당신이 그런 소릴 한단 말야?”하듯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뻐끔대는 게 괘씸했다. 쫓아가서 엉덩이를 두어대 더 때렸다.
“으흑! 청소하러 갈 거예요…!”
우는 척 도망가는 데이지의 뒤꽁무니를 훔쳐보다, 이상하게 유쾌한 기분에 프흐흐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 밤의 일로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걸까. 조급하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은 것 같았다.
‘누님이나 보러 가야지.’
오랜만에 본 데이지도 괴롭혔겠다, 누님이 보고 싶어져서, 누님의 향기가 풍기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피냄새가 짙은 곳. 훈련이라도 하는 중인가보지.
“후으. 후우우….”
지하의 단련실로 내려가자, 예의 전신 타이즈를 입은 채 숨을 고르던 누님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고된 단련에 찡그려졌던 누님의 미간이 활짝 펴지고는,
“스칼렛! 왔구나? 언제 왔니?”
하고, 평소보다 한층 높은 어조로 내게 조르르 달려와 폴짝 대는 거 아닌가. 나는 괜히 속이 간질거려 누님도 데이지처럼 꼬옥 안아주었다.
“으앗. 나 지금 피범벅인데.”
“괜찮아.”
“으응.”
흡혈귀에게 피 묻은 것쯤, 물에 젖은 것보다도 별 거 아닌데 누님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눈동자가 데굴데굴 구른다.
그리곤 할 말을 찾았다는 듯 고개를 들곤,
“잘 해결 됐어?”
“응. 원만하게 해결 봤어.”
“그렇구나. 잘 됐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떻게 해결했느냐, 따위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길래 의아해져서 물었다.
“왜 더 묻지 않고.”
“응? 그야, 스칼렛이 잘 해결 했다고 하면, 정말 잘 해결 됐을테니까.”
“….”
정말 철썩같이 믿는다는 듯 의심 한 점 없는 얼굴에 괜히 내 기분이 오묘해졌다.
“누님은 뭐 하고 지냈어?”
“…그냥…. 훈련…. 했지.”
왜 아까와는 다르게 우물쭈물 하는 진 모르겠지만,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랜만에 대련이나 해볼까?”
“난 괜찮은데. 괜찮니? 피곤하지 않구?”
난 대답 대신 뺨을 죽 꼬집었다. 고작 며칠 외지에 머무르다 왔다고 피곤하지 않겠느냐니, 좀 단련된 인간에게도 통하지 않을 말이다.
“바보 같은 소리 할래?”
“아프아…. 아, 아라써. 하자.”
으휴. 손을 놔주자 누님이 슬쩍 물러나더니 새빨개진 뺨을 살살 쓰다듬으며 울상 짓는다.
“봐주기 없기.”
“아무렴.”
거리를 벌린다. 몸상태는 만전에 가깝다.
동전을 하나 꺼내서, 손가락으로 퉁 튕기고ㅡ,
“시작.”
*
팅.
동전이 바닥에 닿음과 동시에, 레티시아의 전신을 검붉은 혈갑이 감싼다.
그리고 단숨에 손아귀에 쥐어진 붉은 창.
스칼렛 역시 전개했던 흑선을 한 움큼 손아귀에 쥔다.
파지직! 전기 튀는 소리와 함께 뭉쳐진 그것,
「선」
「부여」ㅡ「번개」
꽈르릉! 소리와 함께 광범위하게 터뜨려지는 열 가닥의 검은 번개가, 겁 없이 달려들던 레티시아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다만 그녀는 속도를 늦췄을 뿐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쥐고 달려오던 붉은 창이 곧장 꾸물거리며 형태를 바꾼다.
적창赤槍ㅡ형태변형.
근접전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창이, 빠른 돌격을 위한 마상창으로 변했다.
그리곤 등 뒤로 펼친 그림자 날개를 펄럭여, 벼락이 그녀에게 모이기 전에, 단숨에ㅡ,
파앙!
파공성을 내며, 벼락의 충격을 전신으로 받아 흘리며 빠르게 일점을 찔러 통과한 그녀의 상태는, 전신을 둘러싼 혈갑이 찢어지고 채 흘려넘기지 못 한 벼락가닥이 파직파직 튀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멀쩡한 상태는 아님에도, 무식하기 짝이 없는 돌격에가속도가 붙은 창이 스칼렛의 눈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창이 닿기 직전ㅡ, 스칼렛의 주변으로 형태 없는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소리도, 전조조차 없었다. 다만 레티시아는 자신이 강렬한 반발에 튕겨져 나왔음을 느꼈다.
“윽…!”
「점」
「부여」ㅡ「충격」
「점」
「부여」ㅡ「환술」
노림수가 잘 먹혀들어갔다. 그가 아는 레티시아의 성격이라면 저돌적으로 공격을 뚫고 들어올 것이라 짐작하고, 벼락 속에 미리 환술을 부여한 것이다.
아직 미숙해 한 점에 두 개의 속성도 부여하지 못해, 아예 점을 두 개 만들어 각각 하나의 속성씩을 부여하는 편법을 사용한 스칼렛에게, 환술을 걸고 마음껏 부릴 정도의 능숙함은 없었지만,
‘환술에 걸고 나서 조종하는 건 못 해도, 환술을 걸기 전 미리 조건을 설정해놓고 거는 건 할만 해.’
단 하나. 스칼렛이 펼친 점과 선을 인식하지 못 한다. 그 외에는 어떤 간섭도 통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고 사용한 「부여」ㅡ「환술」은 나름 성공적인 결과를 끌어냈다.
이미 벼락을 온 몸으로 뚫어내, 단단한 그녀의 혈갑을 손상시켰고, 그럼에도 강행돌파를 고집한 그녀에게 재차 데미지를 입혔으니까.
아마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혈갑이 그새 복구 되어 별 데미지도 주지 못 했을 거다.
“한 방 먹었네….”
그녀도 그것이 스칼렛의 노림수라는 걸 파악했는지, 충격파로 찢어졌다 다시 생성한 그림자 날개를 펄럭이며 쓰게 웃었다.
한 대 맞고 나니, 환술이 풀려 스칼렛 주변에 잔뜩 펼쳐 진 선들이 보인 것이다.
“숫자가 많이 늘었네. 예전엔 몇 개 못 부리더니.”
“꾸준히 대련한 덕이지.”
“그래도ㅡ 아직까진 멀었어. 예전엔 누나가 엄두도 못 낼 정도였는데 말야.”
지금은, 할만 해.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레티시아가 그리 말하니, 스칼렛도 덩달아 조용해졌다.
레티시아는 한 달만에 이만큼 성장한 동생에게, 언제 추월 당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위기감을, 스칼렛은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는 누님에게 괜히 섭섭해져서 그런 것이었지만.
어쨌든 잠시 숨을 고른 둘이, 다시 한 번 격돌했다.
근접전은 어디까지나 레티시아의 영역이다. 그녀는 어떻게든 파고들기 위해, 폭발적인 순간 가속력과 안정적으로 빠른 속도, 반사신경, 그리고 우월한 무기술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스칼렛에게 접근했다.
대신 반대로 원거리는 스칼렛의 무대다. 전투에 피와 그림자를 다루는 것도 능숙해진 그는, 더 이상 견제하는 식으로 뻗어오는 그림자 칼날이나 피까마귀 등에게 당황하지 않았다. 착실하게 공격용 선과 방어용 선을 구분해 능숙히 그녀의 접근을 차단하며 차분히 상처를 누적시켰다.
「선」
「부여」ㅡ「자율방어」
「선」
「부여」ㅡ「반사」
「선」
「부여」ㅡ「관통」
「선」
「부여」ㅡ「마비」
「선」
「부여」ㅡ「감각상실」
이는 하나의 점과 선에 하나의 속성만을 부여할 수 있는 그가 선택한 현재 가장 효율적인 전투 방식이었다.
원거리에서 「관통」과 「마비」가 부여 된 선으로 공격한다. 「선」의 장점은, 그것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점에 있으니 화살처럼 쏘기도, 채찍처럼 휘두르기도, 마법탄처럼 다각도에서 날리기도 했다. 어쨌든 하나라도, 스치기만 한다면 유효타로 이어졌으니까.
거기에 방어는 자율방어에 맡기고, 가끔 들어오는 유효타는 추가로 「반사」를 이용해서 막는다.
아마 하나의 선에 두 개 이상의 속성을 부여할 수 있다면 선택 가능한 전략의 폭은 훨씬 더 늘어나겠지. 지금도 언제든 새 구성으로 바꿀 수 있다.
거기에 대응하는 레티시아는 일관적이다. 「웨폰마스터」로서 다양한 무기를 다루기는 하나, 그것의 변칙성은 동생에 미치지 못한다.
대신 그것 하나하나의 깊이가 궤를 달리 한다.
검은 휘두른다. 벤다. 종종 찢어발긴다.
창은 찌른다. 돌린다. 쳐낸다. 뚫어버린다.
도끼는 찍어누른다. 메이스는 분쇄한다.
손에 쥔ㅡ, 그녀만의 전용무기, 그녀의 혼과 피를 통해 만들어낸 혈루血淚가 주인의 뜻에 따라 언제든 적합한 형태를 취한다.
그것을 뒷받침 하는 건 그녀의 갑옷이다. 전용무기 혈루血淚와 한 쌍인 갑옷, 혈린血鱗. 원래도 불사에 가까운 흡혈귀의 몸을, 진정 불사신이나 다름 없게 만들어준다.
부딪친다. 붉은 검과 검은 가시가.
붉은 창이 검은 방패에 막힌다.
검은 채찍이 붉은 도끼에 찢긴다.
불사에 가까운 흡혈귀만이 할 수 있는 지독히 실전에 가까운 대련.
그 과정 속에서, 레티시아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점점….’
유연해지고 있다. 싸우는 와중에도 그녀의 동생은 점점 그 경험치를 잡아먹고 성장하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어두운 마력을 다루는 데에 경직됨이 없다. 한 몸처럼, 열 가닥 가까이 되는 선들을 다루고 있다.
“…으!”
아직은 져줄 수 없다. 욕심이고, 이기적인 바람인 것을 알지만, 그녀는 동생이 좀 더 자신에게 의지해주길 바랐다.
물론 자신이 여기서 진다고 해서 동생의 태도가 달라지진 않겠지. 그 정돈 레티시아도 알았다.
하지만….
이것마저 져버린다면, 스칼렛보다 자신이 나은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예전과 뭐가 달라졌단 말인가….
그녀는 다시 예전처럼, 자신의 동생을 그저 동경하여 바라만 보던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ㅡ.
레티시아 전용기.
“오.”
스칼렛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혈린血鱗이 벗겨진다. 혈루血淚 역시 그 형태를 잃고, 벗겨진 혈린과 함께 레티시아의 주위를 빙글빙글 멤돈다.
꾸물거리던 그림자가 솟구친다. 마치 용의 두개골과 같은 형상이 레티시아를 감쌌다.
본 드래곤.
꼭 죽은 드래곤을 되살린 언데드처럼, 용의 두개골이 아가리를 쩍 벌렸다.
레티시아를 감싸던 혈린과 혈루가, 두개골에 스며들었다.
검디 검은 용의 머리가, 핏물 섞인 검붉은 형상으로 바뀐다.
거대한 힘의 덩어리가 진동했다.
스칼렛은 지하의 넓은 공간이 답답해질 정도로 꽉 채운 그것을 올려다보았다.
‘존나 커.’
괜히 공룡이 남자의 로망이겠는가. 거대한 용의 머리는 남자의 심장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나 져줄 수는 없었다. 대련하자고 한 순간부터, 이기자고 마음 먹었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대련하자고 했던 게 아니다. 적어도 여기서 이겨야, 누님에게 의존하는 내 마음이 변할 테니까.
그래야 꼴 사납게 구는 건 그만두고, 용기라도 낼 거 아닌가.
그는 계기가 필요한 건 레티시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호감도 락을 풀 계기 따위가 아니라, 스칼렛이 진심으로 레티시아를 사랑한다고 인정할 계기.
자기 자신을 스칼렛 체페슈라고 인정할, 그런 용기.
스칼렛은 모든 마력을 쥐어짜냈다. 급격하게 탈력감이 찾아왔으나, 입술을 꾹 물고 참았다.
하나의 흑점이, 점점 커진다. 꾸득, 꾸득, 블랙홀마냥 주변 모든 걸 빨아먹을 듯 커지는 그것은, 스칼렛이 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도 강력한 한 방이었다.
선을 사용해봤자 안 된다. 다룰 수 없다. 그 이상으론 만들지도 못한다.
부여? 어차피 두 개 이상 못 한다.
그럼, 가장 원초적인 형태.
오히려 그럼으로써 가장 강력한 것.
특성「공空」은, 「부여」를 무한히 받아낼 수 있는 그릇으로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되려 너무 위험했기에, 다른 속성을 「부여」하던 것.
「점」은 점점 커진다. 컬러로 된 세상에, 잉크라도 하나 떨어진 듯한, 소름 끼치도록 주변과 어울리지 않은 검은 점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 주변을 일그러뜨리고 왜곡시킨다.
마왕이 애용하던 것처럼, 커다란 점은 구체와 다름 없다. 1차원의 점이, 그 강력한 힘에 공간을 왜곡시켜 구체의 형태로 보이게 된 상태.
용은 아가리를 벌렸다.
검은 구체는, 조용히, 풍선이 떠오르듯 느릿하게 움직였다.
이윽고,
두 힘이 맞닿았다.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