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10화 (10/140)

EP.10 크리스티나 (2)

피의 맹약.

흡혈귀의 존재가 제국 내에 보편적으로 스며든 지금, 피의 맹약은 제국민들에게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고위 혈귀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에 따른 보답, 혹은 포상 따위를 받는 관계.

말이 피의 맹약이지 사실 마법사들이 사역마와 맺는 주종계약과 크게 다를 거 없었다.

“가까이 오도록.”

“네….”

크리스티나 헤일리가 내 제안을 받고 고민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기껏해야 오 분 정도일까.

그만큼 자신의 영지를 아끼기 때문이겠지.

영리한 여자다. 체페슈의 종복이 되는 게 결코 손해가 아니라고 확신하는 태도였으니.

실제로 체페슈와 피의 맹약을 맺은 종복 중 가장 유명한 블랙우드는, 오히려 그 이전보다 더욱 이름값이 오르면 올랐지 떨어진 적은 없었으니까.

그녀가 나의 종복이 되는 것으로, 체페슈 공작의 비호를 받는다면 이득이라는 판단이 선 게 분명했다.

“….”

수치스럽다는 듯 얼굴이며 귀까지 잔뜩 빨개진 채이면서도, 뻔뻔하게 무릎을 땅에 대고 기어오는 자태를 봐라.

“암캐같군.”

“…네.”

모욕적인 말을 하더라도, 모욕을 들었다며 화내는 기색조차 없다. 고개를 조아릴 뿐이다.

비록 자신을 희생하더라도, 그녀 하나의 희생으로 헤일리를 살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리 해줄 셈이었지만….

이대로는 재미가 없다.

“일어서라.”

내 무릎 앞까지 당도하고서 내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던 그녀가 일어났다.

허벅지 위를 손바닥으로 탁탁 두드리자, 새빨개진 얼굴로 태연한 척 두 다리를 벌리고 그녀가 내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뚜둑.

손을 올려 그녀가 피할 새도 없이 옷감을 뜯어냈다. 훤히 드러난 새하얀 어깨.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눈밭 같은 그것에 고개를 슬쩍 묻었다.

가볍게, 숨을 들이쉬곤.

“향이 좋군. 향기로운 숲과 호수의 향이다.”

“…네, 네….”

겁을 먹었나.

아무리 그래도, 흡혈귀의 앞에서 목을 드러내는 상황에서까지 평정을 유지하긴 어려웠나보다.

새빨개진 얼굴로, 파르르 몸을 떠는 그녀를 좀 더 희롱하기로 했다.

“부끄럽나?”

“…조, 금….”

자비없이 뜯어낸 옷자락 너머로, 묵직한 가슴을 받치고 있는 브래지어.

“걸리적거리니 치우겠다.”

“앗….”

그녀가 당황한 듯 했지만, 이미 한 팔로 얇은 허리를 꾹 당겨 끌어안은 채 도망가지도 못할 뿐이다.

우악하게 옷을 찢었던 것과 달리, 새하얀 어깨를 가로지른 브래지어 끈을 부드럽게 손바닥으로 감싸 스륵 스륵 내렸다.

팔뚝에 끈을 걸치게 되자, 꼼꼼하게 젖가슴을 받쳐주던 브래지어의 힘이 빠져 꼭 감춰져있던 유방 덩어리가 묵직하게 출렁였다.

“읏….”

정숙한 귀족가의 여식이 외간 남자에게 보여주기엔 참으로 부끄러운 광경이었는지, 크리스티나는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 고개를 슬며시 돌리고 말았다.

그 모습이 그제야 그 나잇대 여자의 모습으로 보여 나는 작게 웃었다.

“이제야 눈물을 보이는군.”

“…그게 무슨 소리신지요….”

뭔 헛소리냐는 말도, 갑을이 확실한 입장이 되니 참으로 공손해지는군.

나는 고개를 숙여, 걸리적 거리는 것 하나 없이 드러난 어깨에 입술을 댔다.

쪽.

“너무 속에만 눌러두는 것도 좋지 않다. 수틀리면 자신보다 나이가 두 배는 많은 탐욕스런 돼지에게 시집가는 게 귀족가의 혼인이라는 거지만.”

“…….”

“너도 그게 싫어서 아카데미에 가기로 한 것 아니었나? 크리스티나 헤일리.”

“…어떻게 아셨나요?”

아카데미를 졸업한 이들은 하나같이 영지의 귀한 인재다. 즉, 크리스티나는 아카데미를 졸업함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던 것이다.

물론 헤일리 백작가가 다른 영지에 딸을 팔아버릴 정도로 가난하거나 힘 없는 귀족은 아니다.

다만 현 헤일리 백작이 사망할 경우 다음 백작위를 물려받을 장남이 배다른 여동생인 그녀를 혐오한다는 것이 문제지.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 그녀를 팔아버리라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장남의 마수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가치증명을 해야했다.

아카데미를 다니며 쌓은 인맥으로 오라버니가 허튼 짓 하지 못하게 막는다─, 라는 게 자신이 평생을 살아온 헤일리 영지를 아끼는 그녀에게 있어 가장 베스트일테지만, 그것도 실패한다면 자신만이라도 독립한다.

아카데미 졸업생은 모두 준귀족 작위를 받는다. 게다가 아카데미 졸업생이라는 것 자체만으로 제국 어딜 가더라도 대우를 받으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그런 추측을 그녀에게 조곤조곤 설명해주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얼굴에 핏기가 가신다.

생판 모르는 남에게 이렇게까지 속내를 들켰다는 사실 자체가 두려우리라.

허나 나는 그녀를 몰아세우거나 학대하려던 게 아니다.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었다. 천천히, 천천히, 손길이 이어질수록 혈색이 돌아온다.

옳지.

“평생토록 헤일리를 위해 헌신해 온 너다. 그런 너를 나는 존중해.”

“…그럼.”

“네 영지를 지켜주마. 약속했던대로.”

“…제 모든 걸 가져가시기로 했잖아요. 저는 어떻게 되나요?”

“어차피 아카데미에서 만나게 될 테니, 그 전까진 이곳에서 머물러도 상관 없다. 다만 졸업 후엔 체페슈의 영지에서 머물러야겠지.”

“….”

천천히 끄덕여지는 고개.

처음의 체념에 가깝던 눈빛은 없다. 눈동자에 불씨가 살아났다.

누가 네임드 조연 아니랄까봐. 괜히 실소가 나온다.

“앞으론, 스칼렛 님이라 부르도록.”

“네…. 스칼렛, 님….”

주인님은 데이지가 부르니까.

나는 송곳니를 드러내, 크리스티나의 목덜미를 물었다.

푸욱!

“흐윽!”

울컥, 울컥.

새어나오는 핏물은,

참으로 달콤했다.

“잘, 부탁…, 드려요….”

*

크리스티나 헤일리는 그렇게 내 것이 됐다.

약속했던대로, 그녀의 아버지의 병은 깔끔하게 치료해주었다.

몸 안에 퍼질대로 퍼진 악성 종양은 흑점으로 깔끔하게 지우고, 내 피를 한 방울 먹였다.

악성 종양이 퍼진 부분들을 싹 제거했으니, 몸 곳곳에 생겨난 빈 구멍들을 내 피가 찾아가 재생시키고, 흡혈귀화가 진행 되기 전에 내 피를 빼낸 다음 「조율」을 사용해 최대한 인간의 몸으로 조정했다.

흡혈귀가 되진 않았어도 병에 걸리기 전보단 건강해지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헤일리 백작에게 사실 관계를 통보했다.

자신이 몸져 누워있는 동안 부인과 두 아들, 막내딸이 벌인 만행과 그를 해결하기 위해 희생한 장녀 크리스티나의 얘기에 백작은 격노했다.

부인과 막내딸은 친정으로 쫓겨났고, 두 아들은 계승권을 완전히 박탈당했다.

그리고 모든 걸 희생한 장녀에게는, 볼 면목이 없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 부분이야 알아서 하겠지. 착한 딸이고, 서투르고 못난 아비여도 딸을 아끼는 마음은 진심으로 보였으니.

어찌어찌 상황의 정리가 끝나고 백작이 찾아왔다. 병상에서 일어난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참으로 정정하더라.

“체페슈 공작께 입은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무릎을 꿇고 사죄하기에 나는,

“그대의 딸이 보여준 헌신에 마음이 움직였을 뿐이니 사죄는 됐다.”

라고 답해주었다.

헤일리 백작가에 남은 정통한 후계자는 크리스티나 뿐이기에, 백작은 내 눈치를 살피며 크리스티나의 처우에 대해 묻긴 했으나….

“나는 그녀를 내 종복으로 삼기로 했으니,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다.”

내가 못 박으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언제까지고 후계자 자리를 공석으로 둘 생각은 없었기에 대신,

“만일 크리스티나에게 아이가 생긴다면 헤일리로 보내지.”

이렇듯, 크리스티나를 내 여자로 들일 생각이며 그 자녀가 후계를 이을 수 있게 해줄테니 걱정 말라며 넌지시 일러주자, 그제야 걱정이 풀린 듯 헤일리 백작은 허허 웃게 되었다.

“그럼 손주가 클 때까지는 이 늙은이가 버텨야겠군요. 오래오래 살아야겠습니다.”

흠.

내 피 덕에 건강해졌으니 앞으로 30년은 충분하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내일이면 체페슈 영지로 돌아가야 했다. 헤일리 영지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버렸다. 그래도 크리스티나를 얻었으니, 쓴 시간만큼의 이득은 있다고 봐야겠지.

돌아가면 슬슬 정말로 누님의 호감도 락을 해제할 방법을 찾아야했다.

남은 시간이 한달도 남지 않게 되었으니.

사실 누님이 내게 마음이 없진 않다는 것은 알고 있어서, 이대로 학원에 입학하더라도 황자에게 반하지 않을 가능성도 꽤 높아졌다고 생각하곤 있었다.

다만, 내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어떡해야 하나.

그래서 정말 누님이 내가 아니라 황자를 좋아하게 된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누님이 악역 영애가 되어서, 우리 가문을 몰락으로 이끄는 것을 막기 위해 움직일까.

그럼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누님을 어떻게 막아야 할까….

…아니. 나는 정말, 가문의 몰락 때문에 누님을 막으려는 게 맞나?

정말로?

…기분이 이상해진 나는, 시종을 불러 와인을 가져오라 지시했다. 술이라도 조금 마시고 푹 잠들면 좋을까 싶었기에.

내일 누님을 마주 보면, 무슨 말을 하지.

이상하게 누님의 앞에만 서면 무엇을 하더라도 어설퍼지고 만다. 매료에 당했을 때도, 대련 때도, 언제든. 늘.

그것은 왜일까….

상념에 한참을 잠겨 있는 그 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크리스티나의 목소리였다. 나는 대답 대신 그림자를 뻗어 문을 열어주었다. 크리스타는 문 앞에서 일렁이는 그림자에 실눈을 슬쩍 뜨더니, 작게 웃으며 내게 와인을 가져왔다.

“시종을 시켰을텐데.”

“제가 가져간다고 했어요. 저는 스칼렛 님의 것이니까…. 싫으신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난 며칠간 한 지붕 아래서 지냈다고 퍽 능글맞아졌다. 이렇게 대담하게 굴 줄은 몰랐는데.

“무슨 일이지?”

“내일이면 돌아가시니까…, 이렇게나마 시중을 들기 위해서죠.”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떠보기에는, 이상하게도 괜히 지치는 것 같아서,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크리스티나는 능숙하게 코르크를 땄다. 내게 잔을 건네고, 밑바닥을 살짝 채울 정도로만 와인을 따라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품에 병을 받치고 드는 게 꼭 시중 드는 게 능숙한 모습이라,

“능숙하군. 연습했나?”

“그럼요. 덕분에 싸구려 와인병이 제 방 구석에 쌓여있답니다.”

실눈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그녀가 윙크한 듯한 느낌이었다. 실눈인데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잔을 대고 기울여,…향도 음미하지 않고, 예의가 아님을 알아도 썩 그럴 기분이 아니었기에. 곧바로입술을 열었다. 그리곤 얕게 들이킨다.

꼴깍.

그것이 내 목에서 나는 소린지, 아니면 긴장한 채 날 지켜보던 크리스티나가 침을 넘기는 소리인지.

“…맛있네.”

술에 취하는 게 아니라, 괜히 울적한 기분에 잠기는 듯 했다.

게임 속 세상에 들어와서, 살아남기 위해 누님을 꼬시기로 했다.

내가 누님에게 품은 감정이 살아남기 위해 가장한 가짜인지, 아니면 추잡한 욕망인지, 진실된 애정인지 시간이 지나며 점점 흐려져 갔다.

누구보다 내게 상냥하던 누님. 기억을 잃었다는 거짓을 지껄인 내게 따뜻한 품을 내어주던 누님.

스칼렛 체페슈 속에 들어온 내가 누님의 진실된 동생이 아니더라도, 나는 누님을 나의 누이로 여겼다.

의지하고 기댈 수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방에서 나가기로 한 날, 살아남기 위해 누님을 공략하기로 한 날….

그 때 누님에게 향했던 내 욕정은, 누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내 마음이 꾸며낸 가짜였을까. 아니면 나는 정말 누이라고 여긴 사람에게 욕정한 걸까.

진실로 내가 욕정했다면, 사랑하는 누이에게 발정한 내가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럼 또, 되려 누님이야말로 내게 욕정하지 않느냐 하고, 합리화 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욕정하는데, 그것이 어찌 죄가 되는가….

….

“너는 어떠냐.”

“네?”

「품위」가 제 힘을 못 쓰는지, 말투가 누님과 데이지 앞에 있을 때처럼 바뀌었음을 느꼈다. 더 말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취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내가 밉겠지.”

“무슨….”

당황한 듯 말끝을 흐리는 크리스티나와 눈을 응시했다. 놀란 듯 살짝 뜨여진 금빛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아름다웠다. 고결한 여인. 그러나 내 마수에 사로잡혀 더러워질….

“알텐데, 너도. 나한테 모든 걸 바쳤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정도는.”

“아….”

그녀는 말이 없었다. 굳이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화풀이였으니까. 오갈 데 없이 쌓인, 추잡하고 더러운 감정을 풀어내고자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무언가 따스한 것이, 나를 꼭 안아주었을 때.

“…뭐 하냐?”

밀어내지도, 심지어 조그마한 반항조차 하지 않고, 꼴사납게 힘 없이 그리 되물었다.

“뭐 때문인진 모르겠지만, 많이 힘든 일이 있었나요.”

“….”

“저는 당신의 소유물이에요. 소유물의 눈치를 보는 주인은 없어요, 스칼렛 님.”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ㅡ, 고 묻기 전에, 크리스티나의 손이 내 머리 위를 부드럽게 쓸어넘겼다.

“미워하지 않아요. 당신의 것이 되기로 한 건 제 선택이었잖아요. 나이 많고 살 찐 남자에게 팔려가거나, 평생 발 붙였던 영지에서 쫓겨나듯 독립하는 것보단 훨씬 좋은 미래가 보장됐잖아요?”

대답하지 않았다. 상관 없다는 듯 그녀는 종알종알 떠들어댔다.

“선택지가 없었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당신이 무슨 마음으로 제게 제안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강요였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사람 좋은 여자였다.

“비록 방식은 거칠었어도, 당신이 제게 선심 쓰듯 던져준 그 미래 말곤,어딜 어떻게 봐도 희망이라곤 없었어요.”

그 좋은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따스한 온기를 주곤 한다. 누구든 가리지 않고.

“제가 가장 바라던 거니까요. 저는 지금 꽤 행복해요.”

“그런데 저를 행복하게 만들어준 남자가 불행한 얼굴을 하는데, 어떻게 가만 있겠어요.”

“다시 말하지만, 소유물의 눈치를 보는 사람은 없답니다. 스칼렛님.”

….

수많은 사람들에게 온기를 나눠주던 횃불이,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난로가 되어주겠다고 말했다.

“…말은 잘 해.”

그래서 나는 그 온기를 독차지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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