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 영애의 남동생이 되었다-8화 (8/140)

EP.8 단련, 대련 (3)

대련은 흐지부지 끝났다.

한 번의 격돌에서 꽤 많은 마력을 써서 그런지, 아님 누님이 내게 삐쳐서 그런 건지.

어느 쪽이든, 이후 대련의 양상이 근거리전으로 이어지는 바람에.

나는 최대한 흑점을 이용하며─예를 들어 흑점에 「반사」나 「미끄러움」,「유연함」 따위를 부여해 누님의 공격을 막고, 공격할 땐 「마비」나 이따금 절대 맞을 리 없는 각도에서 공격하며 「적중」을 부여해 기습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전투를 어떻게든 질질 끌었으나.

결국 근접전으로 이어지면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어서, 내 항복으로 끝났다.

그, 굉장히 집요하게 공격하길래, 조금 쫄았다.

기습한 것 때문에 그러냐고 물었더니.

“뭐…? …! 됐어!”

라며 내 정강이를 발로 차는 게 아닌가.

그야 물론 왜 화났는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자긴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는데 그 틈을 노려서 기습한 게 화났어? 라고, 솔직하게 묻는 것도 좀 그렇잖아.

이럴 때에는, 조금 눈 감고 모르는 척 하는 게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다.

아무튼.

아무리 내가 졌다곤 해도, 유효타가 전혀 없진 않았는데. 누님의 상태를 보니 너무 멀쩡했다.

아니. 당연히 몸이야 멀쩡할테지. 피만 모자라지 않다면 불사나 다름 없는 게 고위 흡혈귀고. 내 말은, 그, 누님의 타이즈가.

그래, 타이즈. 일부러 흑점을 이은 선─그러니까, 말하자면 '흑선'에 「뾰족함」이라던가, 「날카로움」을 부여해 만든 가시로 몇 번이나 찔러댔는데.

어째서 멀쩡한 걸까….

이유야 안다. 분명히 판타지스러운, 무언가 처리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겠지. 자동복구 기능이라거나….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내 눈이 또 자기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여전히 심술이 난 듯 정강이를 발 끝으로 콕콕 찌르고 있는 누님이 고개를 들었다.

“왜?”

“아니….”

여기서 왜 타이즈가 안 찢어지고 멀쩡하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까.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 할까? 아님 태연하게 자기 옷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자랑할까?

아마 전자겠지.

그리고 나는 누님이 부끄러워 하는 게 보고 싶었으므로, 최대한 무뚝뚝한 얼굴로ㅡ 아무것도 아닌 것을 묻는 것처럼 물었다.

“일부러 찢으려고 잔뜩 찔렀는데 옷이 안 찢어지길래.”

“응? 그건 자동복구기능이 달려 있…, 어?”

내가 아무것도 아닌 듯 물으니,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대답하던 누님이 말을 끊고는, 눈을 크게 뜨곤 나를 휙 쳐다봤다.

뺨이며 귀, 목까지 빨개져서는.

“무, 무무, 무슨 소리?”

부끄러우면 못 들은 척 하는 게 우리 누님 버릇인가보다.

그래서 허리를 숙이고, 흠칫 떨며 뒷걸음질 하는 누님을 확 잡아세우고, 귓가에 소근소근.

“옷 찢으려 했는데 안 찢어져서 아쉽다고.”

“…힉!”

퍽!

밀쳐졌다. 아프진 않은데, 나보다 월등한 근력으로 밀어내니 버티지도 못하고 확 밀려버렸다.

“누, 누나한테, 그런 소리나 하고. 못 써!”

가슴을 가리듯, 두 팔로 가슴 앞을 감싸고 팔짱을 낀 채 몸을 움츠린 누님.

…전신 타이즈 차림으로 그러는 거, 하나도 의미 없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닐텐데.

그리고.

+++++

레티시아 체페슈

….

상태: 흥분. 기쁨. 불안.

+++++

이게 너무 치트키라서.

누님은 열심히 자기 기분을 숨기려 하는 거 같은데, 숨길 수가 없다.

근데 진짜 호감도 70까진 어떻게 올리지, 저거?

볼 때마다 한숨만 나온다.

남은 기간은 겨우 한달하고도 며칠. 그 시간 안에, 누님을 어떻게든 해야했다.

*

이후로도 매일, 혹은 격일로 누님과 대련을 했다. 나 자신의 실전 경험을 살리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누님과 교류를 늘리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 가지.

누님에게서 가주직을 돌려 받고, 체페슈의 가주로 돌아온 나는 행정 업무도 보기 시작했다.

제대로 못 할 줄 알았는데, 몸이 기억하는 것도 있고 워낙 이 몸이 머리가 좋아서인지 금방 적응할 수 있었다.

적응했다는 게 좋아졌다는 건 아니고, 그냥 해야하니까 하는 거지 뭐.

게다가 데이지가 도와줘서 좀 편한 것도 있다. 아무리 무가武家의 딸이라고 해도, 백작씩이나 되는 집안의 사람이다.

체페슈에게 이름만 충성하는 게 아닌, 수백년간 쭉 공식적으로 체페슈를 모시던 블랙우드라고 하니, 수준 낮은 자녀를 체페슈에게 보낼 리도 없었다.

즉, 데이지는 유능한 인재였다.

거기다 단순 반복 노동은 모두 구울 메이드, 구울 집사에게 시키다보니 평소 내 옆에서 나를 보필하는 것 말곤 하는 일도 없던 데이지도 내 업무를 도와주는 걸 즐거워 했다.

내 도움이 되는 걸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더라.

으음.

그리고 지금까지는 신경을 안 썼는데, 영지의 일도 영주인 나 대신 대리인이 알아서 잘 하고 있었다.

체페슈는 대대로 실력 있는 행정가들을 영주 대리로 삼았다길래, 그게 되나? 했더니 영주 대리가 블랙우드 사람이었다.

블랙우드. 어디까지 체페슈에게 진심인 걸까….

체페슈가 영지 일을 도맡아 하지 않은 이유는 뻔 했다. 인간의 생리를 이해하고, 인간을 생각할 줄 알아야 정상적인 영지 경영이 될 텐데, 체페슈는 어디까지나 흡혈귀 아닌가?

그것도 가장 고귀한 삼대 가문의.

다른 영지와의 영지전 같이 큰 일이라면 몰라도, 영지민 개개인에 대해서는 염 젬병인 듯 했다.

세금을 얼마나 걷는 게 좋은지도 모른다. 정 배고프면 피만 쪽 빨면 영양만점 배부른 흡혈귀와 달리 인간은 이것저것 잘 먹어줘야 하니까.

영지법도 어떤 기준으로 세워야 할지 모른다. 법을 어긴 영지민을 재판하고 벌을 주는 것은 결국 영주인 체페슈가 결재할 일이지만, 과연 이 인간이 인간의 기준으로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지를 판단할 지 체페슈는 몰랐다.

그래서 이것저것 뭘 하려 해도 난관에 부딪치다 보니, 믿을 수 있는 가문인 블랙우드의 사람을 부른 게 벌써 수백년 전이라고.

지금에야 체페슈도 어느 정도 인간에 대해 이해하고, 영주 대리가 없어도 영주 노릇은 할 수 있게 됐지만….

수백 년간 이어진 관습이다보니, 굳이 바꾸진 않고 대신 예전과 달리 매일 영주 대리에게서 보고를 받는 식으로 바꿨다고 한다.

혹시 영주 대리가 거짓말을 할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피의 맹약을 나눈 블랙우드의 사람은 체페슈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매일매일, 가주로써 업무─솔직히 별 거 없다. 돈 관리가 잘 되고 있는지 정도만 체크하는 수준─를 보고, 누님과 대련 후 담소, 영주 대리에게서 보고를 듣고, 데이지를 방에 부른다.

그런 일상이 며칠이고 반복 됐다.

어서 빨리 누님을 공략해야 한다고 초조해 하면서도, 달라지는 것 없는 결과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것을 누님 앞에서는 티 낼 수 없어서 입만 꾹 다물고. 하루하루 그런 것들이 쌓여갈 쯤.

영주대리가 찾아왔다.

“밤의 주인, 위대한 체페슈의 가주를 뵙습니다.”

솔직히 저 인사는 좀 부담스럽다. 오글거린다.

“앉지.”

“예.”

「가주」특성은 「귀족」특성의 상위 특성이다.

상태창을 열었을 때, '체페슈의 가주'라는 사실이 내 신분을 나타내는 가장 높은 수식어이기 때문에 「가주」만 나오는 것이지, 실제론 제국의 공작, 체페슈 영지의 영주, 그 외 자잘한 특성들이 붙어있을 거다.

여기서 말하는 '체페슈의 가주'에서의 '체페슈'는 흡혈귀로서의 지칭이고, '체페슈 영지의 영주'에서 나오는 '체페슈'는 제국에게 하사받은 성을 뜻한다.

제국의 작위를 받았으니 그 의미로 체페슈라는 성씨를 귀족의 성으로 만들어줬다고 제국이 으스댔기에, 흡혈귀로써의 체페슈와 귀족 체페슈는 구분되고 있다.

상태창에서 제국 공작 체페슈가 아니라 흡혈귀 체페슈의 가주라는 특성을 가장 높은 수식어로 인정하고 이것만을 상태창에 써두었다는 것은, 체페슈가 흡혈귀를 포함한 인외의 사회에서 다른 삼대 가문─노스페라투와 드라쿨레아보다도 높은 위상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잡설이 길었지만, 어쨌든….

「가주」의 하위 특성인 「귀족」에는 또 「품위」와 「고결함」따위가 있어서, 누님에게서 가주직을 돌려받은 이후 누님이나 데이지를 제외한, 공적인 만남 중에서는 나도 모르게 귀족적인 태도가 나오고 만다.

지금처럼.

날 찾아온 블랙우드의 사람을 대할 때, 거울을 보면 싸늘하고 차가운 남자가 거울을 노려보고 있다.

이게 나라고? 싶을 정도로 평소의 나와 다르다. 누님은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얼굴을 붉히던데.

아무튼. 대충 생각을 마무리 할 때쯤 건너편에 앉은 영주 대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최근 옆 영지…, 그러니까 헤일리 영지와의 경계지에서 자꾸만 분쟁이 생기고 있습니다.”

“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말해보란 의미였다.

그나저나, 헤일리?

“예. …처음으로 분쟁이 생긴 지는 두 달 가량 지났습니다만, 영주님께서 편찮으실 때라 감히 보고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내가 복귀한 이후로는?”

“한동안 잠잠했기 때문에, 저희 측에서 전달한 경고를 알아듣고 물러나 사태가 해결 된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그럴 수 있지. …헤일리라.”

“예. ”

어디서 들어봤더라….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어디서 들어본 게 분명한데.

헤일리…. 헤일리….

아.

“크리스티나 헤일리.”

여주인공 루나 테일러의 사촌 언니이자 조력자.

작중 누님의 주도로 루나가 아카데미 내 귀족 영애들한테 왕따를 당할 때 유일하게 옆을 지켜준 여자라고 들었다.

저쪽 세상 누나가 방구석 씹덕이라 백합까지 좋아해서 그런지 크리스티나랑 루나랑 GL물로 그려달라고 한 적이 있어서 누군지 알았다.

그나저나, 분쟁이라니?

“우리 영지가 힘이 없나.”

“그럴리가요! 체페슈는 제국에서 일곱 밖에 없는 공작갑니다. 다른 공작가는 그 주인이 몇 번 바뀌었지만, 체페슈만큼은 그런 적도 없었죠. 영지도 제국 어느 곳보다 풍요롭습니다. 체페슈야말로….”

누가 블랙우드 사람 아니랄까봐, 체페슈 찬양이다 또. 이대로 냅두면 30분이 넘도록 떠들어댈테니 끊기로 했다.

“그럼 헤일리가 우리를 우습게 볼 만큼 위세가 높은가?”

“아닙니다. 헤일리 가문도 저희 블랙우드와 같은 백작갑니다. 저희는 변경백이었으니, 실제 영향력만 따지면 블랙우드보다 못할 겁니다. 특출나게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요.”

“그럼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그, 최근 헤일리 백작가 내부에서 계승권 문제로 혼란이 크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혼란을 틈 타서 굶주린 것들이 도적 노릇을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군.”

대충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영주 대리에게 수고했다 전한 뒤, 헤일리 영지에는 경고장을 일단 한 번 더 보내두라고 지시하곤 일단 돌아가라고 일렀다.

나름 명망 있는 백작가인 블랙우드 출신이 굽신대며 돌아가는 모습이 좀 안쓰러웠다.

근데 본인이 좋아서 저러는 건데 뭐….

예전에 불만이 있지 않느냐 물었더니, 자기가 지원해서 온 거랜다.

그것도 어릴 때부터 꼭 체페슈에 오고 싶어서 행정업무부터 온갖 자잘한 것까지 가문 내에서 두각을 드러내 보내진 거라고.

그럼 블랙우드는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낸 사람을 다른 영지에 일하라고 보낸 건가.

….

나중에 거기 들를 일 있으면 어떻게 될 지 궁금해졌다.

내가 가는 건 귀찮을 거 같고 누님을 보내보자.

*

헤일리 백작가는 최근 반년,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매일을 보내는 중이었다.

헤일리 백작이 갑작스럽게 쓰러진 이후 두 아들이 탐욕스럽게 제 세력을 불리고 있으며, 막내딸은 두 오라비 사이를 오가며 간을 보는 식으로 제 배를 불렸다.

심지어 백작 부인까지, 헤일리 백작가와 헤일리 영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크리스티나 헤일리를 박대하며─아마 크리스티나만이 자신의 딸이 아니라서 그렇다는 소문이 고용인들 사이에 쫙 퍼진 채다─제 아들딸들을 뒤에서 밀어주고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자신 편이라곤 몇몇 가신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백작위를 노리고 있으면서 정무를 보긴 커녕 하루하루 정쟁에만 힘 쓰는 배 다른 오라버니들 때문에 두통이 가시질 않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배 다른 여동생은 크리스티나를 비호해주던 아버지가 쓰러지자마자 어머니를 등에 업고서 크리스티나를 괴롭혀댔고.

하루하루 피폐해져 가는 듯 했다.

차라리 크리스티나 본인이 사생아였더라면, 정통성에서 밀렸더라면 서러웠을지언정 억울하진 않았을텐데.

오히려 굴러들어온 돌은 오라버니와 여동생이 아니던가.

본래 헤일리 백작은 크리스티나의 어머니와 결혼했으나, 그 전에 하룻밤 불장난으로 낳아버린 쌍둥이 사생아가 있었다.

그것을 비밀로 한 채 명망 높은 후작가의 딸인 크리스티나의 어머니와 결혼하고서 딸인 크리스티나를 낳은 후, 사생아의 어미를 몰래 정부로 들인 것이다.

크리스티나의 어머니가 길길이 반대했기에 첩으로 들이지 못 하고 정부로 남기기는 했으나, 헤일리 백작은 내심 그것이 아쉬웠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하룻밤 불장난 상대와, 진심으로 사랑하는 데에다 후작가의 딸인 처가 어찌 비교가 될까.

헤일리 백작은 크리스티나와 그 어머니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

불행하게도 어머니는 일찍이 요절하고, 헤일리 백작이 그, 사생아의 어미인, 변두리 남작가의 여인과 재혼하긴 했어도.

적어도 크리스티나만큼은 백작이 더욱 아꼈으니, 크리스티나는 아버지를 미워한 적이라곤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버지가 미웠다.

미웠으나,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눈물을 꾹꾹 삼키며 가신들과 함께 백작가와 영지를 지키기 위해 집무실에서 밤을 새웠다.

곧 그녀가 아카데미로 떠나야 하는데. 그 때엔 어떻게 해야하나. 그런 걱정이 눈 앞을 가렸지만, 당장 눈 앞의 일에 치여 그마저 고민할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크리스티나가 하루하루 매말라 갈 때, 영지에 문서가 한 건 전달됐다.

『 체페슈 영주 알림.

헤일리의 영주는 체페슈 영지의 경계에서 일어난 수차례의 분쟁 사태에 대해 충분히, 성실하게 조사할 의무가 있었음에도 체페슈 영주 대리의 협력 요청서를 두 번이나 무시하였으며, 그 다음 보내진 체페슈 영주의 경고장을 무시하였다.

이는 마지막으로 헤일리 영주를 배려한 체페슈 영주의 선의를 짓밟은 것임으로, 앞으로 일주일 후, 체페슈 영주가 직접 헤일리에 방문에 이에 대해 항의하도록 하겠다.

일주일 뒤의 방문에서, 납득할만한, 그리고 만족할만한 대답을 구하지 못 할 시, 체페슈는 붉은 까마귀의 깃발에 걸고 헤일리에게 보복하겠다. 』

귀족 특유의 미사여구 없이, 직설적인 폭언이 가득 적힌 그 종이를 보고.

크리스티나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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