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데이지 (1)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누님의 호감도가 떨어지고서, 일주일이 지난 날. 아침에 일어나 비몽사몽한 상태다. 눈을 뜨기도 귀찮아서, 눈을 감은 채로 침대에서 느릿느릿 일어나 늘 하던대로 옷자락을 풀었다.
툭, 옷이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언제나처럼 대기하고 있을 구울 메이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말캉.
말캉?
주물. 말랑말랑.
뭐지.
“히윽.”
히윽?
그제야 졸린 눈을 겨우 뜨고 보니, 구울 메이드 대신 새빨개진 얼굴의 메이드가 바들바들 몸을 떨고 있었다. 내 손은…, 그렇군. 못 해도 D….
이게 아니라.아직 잠이 덜 깼나 내가.
있어선 안 될 게 왜 여기에 있지?
핏기 가득한 얼굴, 인간미 있게 파르르 떨리는 동공과 수치심에 맺힌 눈물방울…. 아무리 봐도 인간이다, 인간.
그런데 복장은 늘 보던 구울 메이드와 같다.
여기까지 오니 논리적인 결론이 도출되었다.
인간 메이드가 우리 집에 고용 됐구나.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때, 바들바들 몸을 떨던 인간 메이드가 입을 열었다.
“자, 잘… 주무셨나요… 주인님….”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듯 물기 가득한, 떨리는 목소리이면서도, 직업 정신은 투철한 건지 결코 몸을 물리진 않은 채였다. 나한테 젖가슴을 만져지고 있는데도.
음. 이제보니 내가 가슴을 만지고 있었구만.
태연한 얼굴로 손을 떼었다. 그제야 메이드의 얼굴에도 안심한 기색이 조금 돌았다.
“뭔지 대충 알긴 알겠는데, 들은 얘기가 따로 없네. 누님이 부른 거 맞지?”
“네, 네.”
현재 체페슈의 가주 대리는 레티시아다. 난 현재 가주직을 수행할 상태가 아니어서인지 특성에서도 「가주」가 빠져 있고. 아무튼 고용인을 고용하는 거야 굳이 나한테 허락 받을 필요도 없는 일이고, 전에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한 건지 이렇게 진짜 인간 메이드를 고용해준 누님의 마음 씀씀이가 오히려 고마웠다.
근데 인간 메이드 고용하자고 말했을 땐 서로 매료에 헤롱헤롱 할 때 아니었나.
어떻게 기억하고 있지?
모르겠다.
일단 눈 앞에 서 있는 메이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당당하게 훑어봤다. 그야 내가 갑이니까. 성희롱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보았다. 심지어 커다란 젖가슴은 좀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러면서도 여자는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좀 부끄러워 하는 거 같긴 한데.
우선 꽤 건강해보였다. 어디서 데려왔는지는 모르겠어도, 일반 서민이라고 보기엔 머릿결이라거나 관리된 피부 상태가 좋은 편이었다. 못 해도 돈 좀 있는 상인집 딸이거나, 아님 어디 귀족집 셋째 따님 정도? 대충 보기엔 그 정도로 추측할 따름이었다.
시녀도 아니고, 메이드로 오기에 어울리는 신분으로는 안 보인다는 뜻이었다. 무언가 사정이 있겠지.
아무튼.
키도 꽤 컸고, 발목 위까지 오는 메이드복에 가려져 다리가 어떤지는 보이지 않았으나 치마 밑단 아래로 은근하게 보이는 발목이 음심을 자극했다.
때로는 다 벗긴 것보다 다 가린 정숙함이 더 야하게 보일 때도 있는 법.
게다가 꽉 동여매진 허리끈 덕에 강조된 젖가슴이나 허리 라인도 눈을 호강하게 했다.
미모만 따지자면 핏기만 좀 없다 뿐이지 사람과 다를 바 없는 구울 메이드들도 만만치는 않으나, 정작 중요한 생동감이 빠져있던 걸 눈 앞의 메이드가 채워주고 있었다.
이거지. 이게 메이드지.
흡족한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데, 데이지입니다….”
긴장했는지 급히 답하다 혀를 깨물고는 혼자 부끄러운지 눈치를 보는 게 귀엽긴 했으나, 언제까지고 인간을, 그러니까 데이지를 여기 세워둔 채 있을 순 없으므로 그녀를 대동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허둥지둥 뒤따라온 데이지가, 조심스럽게 내 뒤에 달라붙었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하는 모습이며 걸음걸이에 담겨있는 숨길 수 없는 우아함을 예의주시하며 식당으로 들어섰다.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던 누님이, 내 뒤로 따라붙은 데이지를 보곤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어때. 네가 바라던대로 인간 메이드야. 마음에 드니?”
“나름은.”
나야 내심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으나 본인이 있는 앞에서 묻기엔 좀 그랬으므로, 나는 누님에게 질문하는 대신 자리에 앉아 우선 식사를 즐기기로 했다.
데이지는 아예 내 전담으로 고용된 것인지, 다른 구울 메이드들이 자리를 비우는 와중에도 내 옆에 서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원래 이 자리엔 필요할 때 심부름을 시키던 구울 메이드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 역할을 데이지가 맡기로 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식사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말마따나 기호식품에 불과한 음식을 굳이 배불리 먹을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대신 데이지가 건네준 혈액을 와인잔에 담아 홀짝댔다. 스테이크를 썰 때만 해도 느껴지지 않던 활력이 피를 섭취하니까 살아나는 듯 했다.
“필요할 땐 그 아이의 혈액을 섭취해도 괜찮아.”
피를 홀짝홀짝 마시던 중 대뜸 누님이 그렇게 말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데이지를 돌아봤더니,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아무 말도 않는 게 아닌가.
그제서야 대충 알 수 있었다.
“체페슈를 섬기는 가문의 아이야. 대대로 체페슈를 섬기고, 대신 우리의 비호를 받지. 저 아이의 분홍빛 머리칼이 그 증거야.”
고위 혈귀가, 흡혈귀가 아닌 종족을, 자신의 권속─하위 혈귀, 혹은 구울─로 삼지 않고서 수하로 부릴 수 있게끔 하는 계약.
하위 혈귀나 구울을 만들기 위해선 고위 혈귀가 직접 그 혈액을 취하고, 자신의 혈액을 주입해야 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들 중 극소수의, 위로 올라갈 재능이 있는 흡혈귀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지를 상실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흡혈을 향한 갈증으로 끊임 없이 괴로워 하는 괴물이 되고 만다.
그 대신 만들어진 게 바로, 피의 계약.
이렇게 이루어진 주종은, 애초에 종이 바뀌지 않으므로 그 과정에서 미쳐버리는 일이 없다. 오직 스스로 피를 바쳐야 한다는 조건만 지킨다면 계약은 손쉽게 성립된다.
데이지는 수백년 전부터 체페슈를 섬기기로 하고 피를 바친 인간 가문의 아이였던 것이다.
“…제 모든 건, 주인님께 바칠 준비가 되어, 되어 있습니다.”
그녀도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지만, 그것 이상으로 각오가 서려있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 스칼렛 체페슈 개인을 향한 강렬한 충성심에 가까웠다.
기억이 없으니 뭐가 뭔지 모르겠네. 과거에 뭔가 인연이 있었던 걸까. 그랬다한들 과거의 스칼렛 입장에선 별 거 아니었을 거다. 데이지도 내가 알아보지 못해 슬퍼하는 기색은 아니었으니까. 아님 누님이 내가 기억을 잃었다고 데이지에게 말해줬든가.
아무튼. 아무렴 좋겠지. 그녀도 각오가 확실하고, 불법 아니고, 게다가 미인이고. 괜히 양심적으로 행동한답시고 풀어줄 필요가 하나도 없었다.
내가 풀어줘봤자 원래 집으로 돌아가서 혼나지 않을까?“체페슈에 제대로 봉사조차 하지 못하다니!” 같은 뉘앙스로.
나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대충 이해되네.”
“그래. 잘 보살펴줘. 귀여운 아이야.”
“걱정 마. 오늘은 언제 올래? 내 방.”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이상할 것 하나 없는. 그럼에도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정적이 이어지고, 무언가 이상하다 싶어 누님을 쳐다보니 무언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마저도 우아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러네. 네 전담 메이드가 생겼으니까, …찾아가도 될까?”
귀여운 소릴 다 하네.
“안 될 이유가 뭐가 있어? 난 누님이랑 매일 시간 보내는 게 좋은데, 누님은 싫은가?”
“그런 게 아니라! …아무튼, 알았어. 찾아갈게.”
누님의 대답을 듣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조용하게 응얼거리는 누님이 신경쓰였지만, 마찬가지로 새빨개진 얼굴로“주인님과 아가씨가 방에서…?” 따위를 중얼거리며 내 뒤를 따라오는 데이지 역시 신경 쓰이는 건 마찬가지였기에, 결국 둘 다 신경 쓰기를 포기했다.
*
방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앉아서 데이지를 가까이 불렀다.
슥슥 가까이 다가온 데이지를 옆에 앉히자, 당황해서 귀까지 빨개진 게 꽤 귀여웠다.
“힉. 주인님….”
무슨 착각을 한 건지. 허리를 움찔대며“안 돼요…” 따위를 소심하게 웅얼거리는 모습이 우스웠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누님만큼은 아니어도 도도한 인상인데, 하는 짓은 영 반대라서.
아까 식당에서 내게 모든 걸 바치겠다며 각오하던 때는 나름 분위기 있어 보였는데 지금은 왜 그럴까.
일단 재밌으니까 좀 더 놀려보도록 하자.
콕콕. 뺨을 찌르자, 파르르 입가가 떨리기 시작했다. 헤으…, 같은 소릴 내다가도 갑자기 정신이라도 차린 듯 눈을 번쩍 떴다가, 또 내가 귀라도 살짝 만져주면“히익” 하고 놀라곤 했다.
“주, 인님….”
데이지가 애타게 나를 불렀으나, 굳이 대답하진 않았다. 그럼 감히 메이드 된 자로써, 아니 그 이전에 소유물이나 다름 없는 자신이 주인의 답도 기다리지 않고 제 용건을 말할 순 없다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가 몇 분 안 가 다시 애타게“주인님” 하며 나를 부르곤 했다.
손가락이 뺨을 훑는다. 새하얀 볼살은 어느덧 발갛게 물들어서, 내 손가락이 지나갈 때마다 흠칫흠칫 떨고 있었다. 귓가를 톡톡 만지거나, 새빨개진 목까지 간지럽히듯 어루만져주고나니 거의 숫제 희롱이나 다름 없어진 꼴로 데이지는 내 손길에 허덕였다.
왜 이리 효과가 좋지…, 싶다가도, 같은 흡혈귀도 아니고 결국 인간인 데이지를 상대로 매료가 쉼 없이 들어가고 있었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야 누님은 잘 버티니까…, 패시브 매료의 정도를 낮춘 채로 유지하면 누님이든 나든 같은 고위 흡혈귀여서인지 딱히 매료에 당한단 느낌은 없어서 요즈음은 매료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어떡한담.
그래도 정도를 한 없이 낮춘 상태라, 심각해보이진 않았다. 그냥 술 좀 마신 것처럼 달아오른 정도. 이 정도면 손을 떼고 가만히 놔두면 가라앉을 정도다. 아마도.
이 이상 건드리면 안 되겠다 싶어희롱하던 손을 뗐더니, 데이지가 여린 손으로 내 손목을 꼭 잡았다.
애달픈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감히 메이드가 주인님 대답 없이 용건을 말할 순 없다는 것처럼 굴 땐 언제고….
“주인님…, 죄송… 해요. 조금만…. 더어….”
나는 난감했다. 확실히 음심이 없던 건 아니고, 어느 정돈 그럴 마음으로 장난을 친 것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뺨이나 귓볼 정도를 만져준 게 다였다. 좀 더 해봐야 입술이나, 쇄골 부근을 터치한 정도.
사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따먹고 싶었으나, 지금은 일단 누님을 공략하는 데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일전에 떨어졌던 호감도를 복구하고, 오히려 조금 더 올려놓긴 했으나 결정적인 무언가가 부족한지 그 이상으론 지지부진 멈춰있는 상태였으니까.
요즘은 날 이성으로 의식하나 싶었는데, 이렇게 다른 여자를 메이드로 붙여준 걸 보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여러모로 신경 쓸 게 많았다.
되려 차라리 한 번 따먹고 말 거면 몰라, 날 평생 섬기겠다고 찾아온 미녀 메이드를 먹버하는 미친놈은 아니었다 내가.
과거의 나와 무슨 인연이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이 정도로 먹음직스런 히로인인데 안 먹는다? 이건 안 먹으면 고자 새끼인 거니까, 언제든 먹을 생각은 있었다.
시기가 별로인거지, 시기가.
그래도 여자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매정하게 그만둘 수도 없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예뻐해주도록 하자.
누님한테만 안 들키면 되겠지.
*
낭패였다.
데이지의 가문, 블랙우드는 대대로 제국의 국경을 지킨 변경백이었다. 지금에서야 제국이 대륙을 평정해 북부 너머를 제외하곤 거진 대륙의 끝─바다가 보이는 곳까지 그 봉토가 넓어졌기에 블랙우드 역시 그 의무를 내려놓게 되었으나, 그들은 한때 자신들이 국경을 지키던 시절 한 없이 은혜를 베풀었던 체페슈를 잊지 않았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황실의 검독수리가 아니라, 체페슈의 까마귀와 박쥐였다. 제국의 입장에서야 용서할 수 없는 불경한 발언일지 모르나, 그만큼 열악하던 변경을 돕던 체페슈야말로 블랙우드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은혜로 남은 것이다.
결국 체페슈를 대표로 수많은 인외가 인간과 화합하며, 체페슈가 공식적으로 제국의 공작이 된 이후 블랙우드는 열성적인 체페슈의 지지자가 되었다. 한때 변경백이었던, 강력한 힘을 지닌 백작의 지지는 그것만으로도 체페슈의 입지를 살려주었으므로, 두 가문의 관계는 더욱이 돈독해졌다.
블랙우드의 모든 것은 체페슈의 것이다, 라고. 블랙우드의 가주는 가족과 가신들 앞에서 늘 말하곤 했다. 그것은 세대를 여러 번 거친 지금도 마찬가지로, 어느 가주든 간 체페슈에 대한 충성을 잊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
블랙우드에서 과년한 딸자식을 보내는 건, 세대마다 있던 일이므로….
레티시아의 입장에선 마찬가지로 '당연히' 받아줘야 하는 일이어서 받아준 것 뿐이었는데.
그게 집안에 새로운 여자를 들이는 악수라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무를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지난 상황이었고.
그렇게 집에 들어온 게 옛날에 동생이 구해주었던 꼬마애라니.
레티시아는 암담한 심정이었다….
힘 없이, 축 어깨가 처진 상태로 복도를 걷던 레티시아는,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러다 사랑스런 동생을 빼앗기는 건 아닌가, 그런 걱정이 들 정도였다. 지금의 동생은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하긴 했어도, 기억 상실의 여파인지 겉으로 보았을 땐 꽤, 여심을 자극하는 간질간질한 귀여운…? 사랑스러운…? 그런 게 남아있었다.
게다가 그,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짙은 향….
얼마 전에 동생이 매료를 조절하는 데에 실수한 건지, 터져나오듯 확 풍겼던 그 향기.
솔직히 반쯤 정신이 나가서 향기 조절 수준이 아니라 매료를 작정하고 사용했었다.
그럼에도 덮쳐지진 않았지만….
아무튼 조금 수행했을지라도 인간에 불과한 데이지가, 그 향기에 노출되면 무슨 꼴이 되겠는가. 분명 내 동생을 유혹하겠지. 레티시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건 내 동생을 위해서야. 훔쳐보는 게 아냐.
아직 동생을 만나러 갈 시간이 아닌데도, 레티시아는 그렇게 합리화하며 살금살금 동생의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방문 앞에 서서, 천천히 귓가를 기울이자….
“하윽! 읏, 흐앙…! 안, 대요…. 안 대─, 안, 흑…, 죠아아…!”
──뚝.
무언가 끊어진 소리가 났다고.
레티시아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