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 빙의 (3)
침실로 돌아온 나는 생각을 마저 정리하기로 했다.
내가 빙의한 캐릭터, 스칼렛 체페슈는 원작에서 썩 비중 있게 등장한 캐릭터는 아니었다. 아니, 사실 본편에는 등장조차 하지 않았다.
설정집에서야 겨우 레티시아의 동생으로 언급 된, 단역조차 되지 못한 미등장 캐릭터.
잘 짜여진 캐릭터와 잘생긴 외모가 아까울 정도다.
하지만 그 설정과 외모가 너무 매력적이어서일까, 비중이 적은 수준도 아니고 아예 없는데도 반해 팬의 숫자는 꽤 있는 편이라고.
꽤 많은 숫자의 팬들이 게임 제작사에 스칼렛 체페슈 메인의 외전 굿즈를 내주라며 성화였을 정도랬다. 정작 그 누님인 레티시아 체페슈는 작중 내내 보여준 악독한 모습에 소수 매니악한 팬층을 제외하면 거의 팬이 없었댄다.
아무튼.
왜 등장이 없었지? 하는 의문이 절로 생긴다.
아카데미에 다니지 않아 개입하기 어려운 위치도 아니고, 그렇다고 발언력이 약한가 하면 오히려 체페슈의 가주는 레티시아가 아니라 스칼렛이다. 발언력이며 영향력이 더 강하면 강했지 약하진 않았으리라.
물론 어른의 사정 같은 게 있었을테지. 게임에서 스칼렛이 등장하는 분량이 없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다. 내가 게임 유저도 아니고, 난 게임 유저인 누나에게서 돈 받고 그림을 그려주는 역할이었으니까 더더욱.
하지만 내가 그 장본인에게 빙의한 시점에서 게임사의 사정 따위로 퉁 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게 됐다.
음.
그렇다고 지금 이렇게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봐야 답이 나오진 않는다. 아는 게 쥐뿔도 없는데 끙끙 앓아봐야 뭐가 떠오르겠는가. 다만 내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언제 내 발목을 잡을지 모르니, 적어두도록 하자.
침대 옆 서랍에서 노트를 꺼내, 볼펜을 들고 지금 내가 떠올린 고민을 슥슥 적어내려갔다.
누군가 보더라도 알아볼 수 없게 한글로. ‘원작에서 스칼렛이 비중이 없던 이유 알아내기’라고 적힌 문장 위로는, 지난 한달간 내가 떠올린 세계관과 인물의 설정, 주의해야 할 것들이 적혀있었다.
우선 최우선 요주인물로 당연히 뽑혀야 할 여주인공, 루나 테일러는 지금 당장은 우선순위가 상당히 낮다.
일단 루나 테일러 자체가 중요하지 않은 건 당연스럽게도 아니다. 일단 게임의 묘사로는 상당히 말이 없는 편에다 순진한 얼굴에다, 얼굴에 어울리는 순수한 성격이라고. 흔히 그렇듯 변두리 남작가 출신이라 솔직히 만만하지 않은가 싶지만….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들이 문제다. 원작이 진행되면 될 수록 꼬여드는, 여러 남캐들이 껄끄러운 건 당연하고 본인부터가 최고의 정령사가 될 자질이라는 설정빨로 상급 정령을 부리고 다닌다.
다만, 그녀가 지금 당장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그녀의 입학이 내가 2학년이 될 때, 즉 앞으로 1년이란 시간이 남았다는 것이다. 시간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출신이 어딘지도 알고 있으니 정 뭣 하면 내가 찾아가봐도 될 테고.
오히려 가장 주의해야 할 인물은 황자, 루크 아르카디아일 것이다. 여러 루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누님이 반하게 되는 네임드 캐릭터.
지금까지 한 달간 내가 봐온 누님이 이 남자에게 반해서 비호감 그 자체나 다름 없는 악역 캐릭터가 된다 생각하니, 얼굴이라곤 내 손으로 그리거나 액정 너머로밖에 본 적 없는 황자가 원수처럼 느껴졌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건 NTR이 아닌가? 그야 내가 누님을 꼬시기로 마음 먹었으니, 누님이랑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 없는 황자가 누님의 마음을 뺏는다면 그게 NTR이랑 뭐가 다르단 말인가….
즉 황자는 NTR충이었다. 죽어 마땅하다.
….
그런 개인적인 사감을 일단 접어두자면, 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황자는 살려야 했다. 마왕 침공에서 이겨내기 위한 필요조건이 우선 루트가 있는 네임드 캐릭터 전원과 여주인공 루나의 생존이었으니까.
아예 뿌리를 잘라내기 위해 암살을 시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이유가 이것이었다.
결국 방법은 아까 다짐했던대로 내가 먼저 누님을 꼬시는 수밖에 없었다.
펜을 들고, 괜히 황자의 이름 위에 펜촉을 꾹꾹 눌러 잉크가 번지게 하곤 노트를 덮었다. 더 봐도 이 이상 적을 게 생각나지 않았으니까.
노트를 서랍 속에 툭 넣어두곤, 다시 속으로 상태창을 중얼거렸다.
반토막 나다시피 한 스탯을 넘겼다. 아카데미 입학생 평균이 30에서 40 사이고, 상위권 학생들이 보통 50에서 60, 네임드 취급 받는 최상위권 정도쯤 돼야 70급이라는 걸 떠올리면 이 정도로 충분했다.
죽 스탯을 내리자, 특성칸이 나타났다.
+++++
스칼렛 체페슈
…
특성: 「혈귀」「공空」
고유특성: 「부여」「연결」「조율」
+++++
우선 특성 「혈귀」는 모든 흡혈귀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지만, 그 격에 따라 특성의 랭크도 달라진다.
랭크에 따라 특성의 출력과 활용도가 크게 차이가 있다는데, 예시로 F랭크의 흡혈귀는 고작 피를 흡혈할 때 좀 더 몸에서 빨리 뽑히게 한다거나, 그림자가 일렁이게 하는 수준밖에 되지 못한다.
한 마디로 흡혈귀로서 결함품이란 뜻이었다.
반면에 S랭크쯤 되면 단순 흡혈만으로 도시 하나를 몇 시간만에 몰살 할 수도 있고, 그림자로 들어가 몸을 움직이거나, 그림자를 실체화 해 공격하는 등의 활용도 가능했다.
상태창에는 굳이 랭크 표기가 되어있진 않지만, 설정집에 따르면 아슬아슬하게 구울이 아니라 흡혈귀가 된 자의 혈귀 특성 랭크가 F이고, 반면 흡혈귀 중 가장 고귀하다 불리는 체페슈의 핏줄인 레티시아는 S 랭크라고 돼 있었다.
즉 나 역시 못 해도 S랭크라는 것.
그 중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하나였다.
+++++
「혈귀」
▶피, 그림자를 지배한다. 이성을 매료할 수 있다.
+++++
'이성'을 매료할 수 있다는 점.
비록 같은「혈귀」특성을 가진 누님이라지만, 잘 써먹으면 통하지 않을까? 일단 마력 수치는 내가 월등히 높았다. 승산이 없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매료는 액티브 효과도 있지만 패시브 효과도 있었다. 혈귀 랭크가 높을수록 페로몬에 가까운 좋은 향기가 난댔나.
일단 액티브는 나중에,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하기로 하고 패시브 효과가 좀 더 강화되도록 마력을 활성화 시켰다. 지난 한달간 꾸준히 연습한 덕분에 썩 능숙하게 몸 전체에 활기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똑똑.
때마침, 누님이 찾아온 것인지 방문 너머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스칼렛. 자니?”
아까 식당에서 헤어질 때 잔다고 하고 나왔으므로, 게다가 내가 잔다고 해서 들어오지 않을 누님이 아니기에─일전에 한 번 기다리다 잠들었었는데 눈 떠 보니 누님이 내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이대로 자고 있는 척 해도 상관은 없었으나, 마침 마력의 활성화로 몸에 활기가 돌아온 나는 괜히 즐거운 마음에 대답하기로 했다.
“안 자. 들어와도 돼.”
내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부드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 누님이, 늘 그랬듯 구울 메이드 대신 티 세트를 제 손에 들고서 조심조심 침대까지 걸어왔다.
지난 한 달간 누님이 내 방에 찾아올 때마다. 내 방이야말로 단 둘이 있을 공간이라는 듯, 적어도 이 시간만큼은 그 누구도 이 방에 들어오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지를 상실한 구울 메이드밖에 없는데도.
그것이 꼭 어리광에 가까운, 동생에 대한 애정 어린 집착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받아주었다. 나 역시 누님을 좋아했으니까. 비록 누님의 입장에선 연약해진 동생이 걱정 돼서 한, 깊은 우애의 발로였을 뿐이겠지만. 오히려 내게는 그것이 그녀를 여자로 보게끔 한 계기가 됐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달 내내, 매일 몇 시간씩 침실에서 단 둘이 얇은 옷을 입은 채 가까이 붙어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면 그 어느 남자가 마음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녀의 입장에서야 동생 앞에서 편한 차림새를 하고 있을 뿐이겠으나.
“어딜 그리 봐?”
달그락. 푹신한 침대 위로 티 세트를 올려둔 누님이 물었다. 내 눈길이 묵묵히 그녀의 가슴골이며, 비쳐 보이는 허벅지나 허리 라인을 쫓았음을 고백할 순 없어서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실 없긴. 작게 웃은 누님이 능숙하게 차와 다과를 내주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것을 보여주듯 한 달 전만 해도 참 서툴기 짝이 없었거늘, 한 달이란 시간동안 꾸준히 해오던 보람이 있다는 듯 이제는 썩 자연스러웠다.
“어떠니. 누나 요즘 차도 잘 타지?”
요샌 이렇게 어깨를 으쓱이며 자랑스러워 하기도 했다. 인간 귀족 사이에선 다과를 만들거나 차를 타는 데에 능숙한 귀족가의 영애가 은근히 선망 받는다고들 하던데. 아랫사람을 시켜도 되지만, 어린 나잇대의 소녀들에겐 달고 맛있는 것들을 만들어 보고 싶은 욕망도 있을테니.
인간의 음식은 기호식품에 불과한 흡혈귀가 다도를 능숙하게 해낸다면, 그건 그것대로 사교계에서 이목을 끌지 않을까.
“그러게. 누님 인기 많겠네. 좋겠다.”
건네 받은 쿠키를 씹어 삼키고, 달콤한 뒷맛을 잠시 즐기다 말했다. 이 정도 실력이라면, 주방일 하나 배워본 적 없는 꼬맹이들 사이에선 나름 먹히지 않을까.
좋은 뜻에서 한 말이거늘, 어쩐지 누님이 보는 시선이 조금 차가워졌다. 창백한 피부며 붉은 눈동자 덕에 차가운 얼굴로 노려보면 솔직히 좀 무섭다. 얼굴 자체에서 냉랭한 기운이 감돈다고 해야할까.
뭐가 문제지.
“…인기 많은 게 싫은가?”
결국 정답을 찾지 못해서, 조심스레 물어보자 누님이 어이 없다는 듯 되물었다.
“진짜 몰라?”
“몰라.”
솔직하게 대답했다.
누님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내게 손을 뻗었다. 침대 한 켠에 걸터앉았던 상반신이 내게로 살짝 기울어져서, 서로 가까워진 상태로 누님이 내 뺨을 꼭 꼬집었다.
“다른 사람한테 인기가 많아지고 싶어서 능숙해진 게 아니야. 이제 알겠니?”
아.
음. 그러니까.
“날 위해 연습했는데 다른 사람한테도 줄 거라는 듯이 말해서 서운하다?”
라는 건가.
설마 이게 정답이겠어ㅡ 싶었는데도, 정답이라는 듯 누님이 장난스레 살풋 웃곤 고개를 끄덕였다.
“너한테 줄 것 만들 시간도 없는데, 다른 사람 걸 언제 만드니.”
라고.
뭘까. 우리 누님 왜 이렇게 예쁘고 착하지?
솔직히 좀 꼴린다. 이렇게 예쁘고 착한 누님이 나한테 착하지 착하지 해주니까. 응애 나 아기 흡혈귀…. 하고 싶은 심정이다. 심지어 내 뺨을 꼬집겠다고 상체를 기울인 터라 넉넉하게 입고 있던 옷 틈으로 속옷에 감싸인 젖가슴이 한 눈에 들어왔다.
손으로 주무르고 싶다. 게다가 가까이 붙어서인지 은근히 향이 나는 거 같기도 하고. 발기할 것 같다. 몸에 흐르는 피를 살짝 손 봐서 참아냈지만.
“왜 말이 없어? 누나 말 똑바로 듣고 있는 거 맞아?”
“듣고 있어.”
안 듣고 있다. 뭐라고 말하는 거 같긴 한데 꼴려서 귀에 잘 안 들어온다.
맨정신이 아니다. 술 마시고 취기가 올라온 느낌? 같은. 누님이 뭐라고 말하는 것 같긴 한데, 듣는 대신 하고 싶은 말을 맥락 없이 뱉어댔다. 인간 메이드 하나 들여도 되느냐, 했을 땐 누님의 표정이 좀 차가워져서 정신이 잠깐 돌아오긴 했지만.
그러고도 또 금방, 몽롱해져선.
….
생각해보니 나 지금 매료당한 거 아닌가?
은은하게 좋은 향도 나고, 갑자기 욕구가 막 올라오고, 눈 앞에 보이는 젖이 주무르고 싶어서 손이 막 움찔거리고. 이게 매료가 아님 뭐란 말인가.
정신을 퍼뜩 차려서 내 몸에 은근하게 차 있던 매료의 마력을 쫓아냈다.
이윽고 정신이 맑아지자, 시야가 온전히 되돌아왔다.
새빨갛게 물든 뺨, 느릿하게나마 허덕이는 숨소리. 땀 때문에 젖은 이마와, 촉촉하게 젖은 목과 쇄골. 꼭 흥분한 듯한 모양새의 누님이 눈 앞에 있었다.
“으… 응…. 너…. 누나 말, 잘…, 하으…. 듣고 있, …어…?”
아까만 해도 자기 말을 제대로 안 듣는다며 잔소리 하더니, 지금은 아예 말 대신 웅얼거리는 소리만 가득이다. 내가 누님의 매료에 당한 동안 누님도 내 매료에 당한 모양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저항감이 없다보니, 마력이 높은 한쪽이 낮은 쪽을 제압하고 일방적으로 매료하는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매료에 쉽게 당해버린 듯 했다.
상기 된 얼굴로, 움찔움찔 떠는 게 굉장히 야했다. 분명 매료를 쳐냈는데 왜 또 꼴리는 기분이지. 못 참고 발기해버렸다. 누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까 이 정돈 안 참아도 되겠지.
그래도 지금 여기서 건드는 건 시기상조이므로, 허덕대는 누님을 안아올렸다.
“읏, …뭐… 하는, 거…!”
바둥바둥. 다리를 흔들자 훤히 드러난 매끈한 허벅지를 굳이 참지 않고 주물주물 만져댔다.“히으으윽!” 새된 비명이 들리기는 했어도 가볍게 무시하고, 누님을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구울 메이드에게 넘겨줬다.
휴.
개따먹을 뻔 했네.
그래도 호감도는 좀 올랐겠지?
+++++
레티시아 체페슈
호감도: 58
+++++
왜 떨어진 거지.
*
왜 안 덮쳐주지?
매료 엄청 세게 썼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