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버섯 먹고 몇날 며칠을 토하고 설사하며 사경을 헤멨을텐데 하루아침에 낫는건 아무래도 무리겠지.
"전 좀 들어가서 씻겠습니다. 보시다시피 피가 좀 묻어있어서요. 여러분 아마 당분간 여기서 지내셔야 될 것 같은데, 괜찮으시죠?"
"네."
여자들과 할배가 대답해오는걸 보고는 몸을 돌려 회의실로 들어갔다.
저 사람들도 눈치가 있으면 각자 알아서 할 일 찾아서 하겠지.
어차피 송중사는 당분간 여기 있어야 돼.
머리가 좋아서 빨리 배운다는데, 해봤자 사흘이다. 매뉴얼이라도 제대로 습득해서 사람들한테 알려주려면 당분간은 서래마을에 못 간다고 봐야된다.
사흘갖고 원전을 도대체 어떻게 관리하게 할 수 있는건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 못 할 노릇이다만,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다.
할 만큼은 해봐야되겠지.
회의실에 무장을 벗어놓고 갈아입을 옷을 들고 직원 휴게실로 향했다.
남자 휴게실로 들어서니 누가 샤워실을 쓰고있는지 쏴아아 하며 물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피묻은 옷을 벗어놓곤, 나체로 샤워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멈췄다.
거기에 성가연이 있었다.
생각보다 풍만한 가슴이, 핑크빛 감도는 젖꼭지가.
잘록한 허리와 보기좋게 힙업된 엉덩이가.
그리고, 놀란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
"......"
우리는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그대로 멈춰버렸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성가연이었다.
"...비명 질러야 돼요?"
어?
아, 아니.
잠깐.
"아, 시, 실례."
난 허둥대다 밖으로 나와 문을 바라봤다.
남자 샤워실이다.
뭐야 이거?
난 샤워실 문을 닫고는 말했다.
"여기 남자 샤워실인데, 잘못 온 거 아닙니까?"
제기랄, 목소리가 떨린다.
몸매 진짜 개쩌네, 씨발.
웬만한 레이싱걸 같은건 명함도 못 내밀겠다.
느낌이 이상해서 내려다보니, 아랫도리가 완전히 성질나서 벌떡 일어나 있다.
미친.
난 수건으로 아랫도리를 가리곤 다시 물었다.
"가연씨? 여기 남자 샤워실이라고요."
다 씻었던 참인지 물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성가연이 나왔다.
나체로.
전혀 가리지도 않은 채, 그녀가 샤워실 문을 열고 나왔다.
...털도 없네.
난 억지로 시선을 끌어올려 천장을 바라봤다.
성가연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여자 샤워실에 온수가 안 나와요. 그래서 좀 썼어요. 문제있어요?"
"아... 없는듯요?"
그녀는 웃더니 내 곁을 스쳐지나갔다.
"잘 썼어요. 내 차례 끝났으니 들어가요. 뽀득뽀득 잘 씻어요."
그러며 내 엉덩이를 찰싹 때리고 간다.
...건드리지 마라 아랫도리 터질것같다.
사물함 여는 소리.
뭔가 사락, 바스락 하며 옷입는 소리가 들린다.
이 여자 진짜, 보통내기가 아니네.
이 상황이 너무 어이가 없고, 또 너무 좋은걸 봐서 꽤나 복잡한 심경이다.
난 그런 심정으로 한숨쉬듯 웃고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씻자.
아, 진짜 몸매 개쩌네.
쌍년.
해가 진다.
멀리 보이는 노을을 바라보며 난 미소지었다.
하지만 웃는게 아니다.
살짝 불편하고, 좀 설레고, 한숨이 나오면서 동시에 즐거운, 묘한 기분이다.
먹을게 가득 들어찬 더플백 두 개를 어깨에 메고, 나는 동네 슈퍼를 걸어나왔다.
과자에 라면에 파스타면에 국수소면에 간장에 고추장에 뭐뭐 해서 더플백이 가득하다.
아침에 이미 더플백 두툼하게 두 개나 갖다줬으니 오늘 더 올 필요는 없었지만, 원전에 남아있기가 좀 불편해 나와버렸다.
성가연의 나체가 눈앞에 어른거려대서 누워도 쉴 수가 없다.
그래서 부구리 마을의 동네슈퍼다.
확실히 눈에 안 보이니 좀 낫긴한데, 서둘러 돌아가서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기도 하고.
파트너가 셋이니 하면서, 사실은 넷이지만, 그렇게 또 핀잔줄거 뻔히 알면서도 괜히 기대되는걸.
...나체는 쓸데없이 봐 갖고.
"어휴."
좀 쉴만하면 떠오르는 풍만한 젖가슴과 핑크빛 감돌던 젖꼭지를, 머리를 흔들어 지워버리곤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녁 여섯시? 일곱시?
두우우웃- 두우우웃-
폰이 울린다.
수현이한테 전화가 왔다.
"어, 수현아."
"오빠 바빠?"
"아니. 원전 근처 마을에서 사람들을 좀 구출했거든. 지금 동네 슈퍼에서 먹을것 좀 가져다 돌아갈려고. 근데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은. 별 일 없지. 그냥 오빠 바쁜가 연락해봤어."
마음이 좀 놓이네.
"하, 그래. 다행이다. 훈이 아재하고 뭐 다른 남자들은 뭐 어떻게 하고있어?"
"으응. 요즘 길거리 순찰한다고 총 들고 돌아다녀. 폭탄 설치한거 잘 있나 확인도 하고. 거긴 좀 어때? 위험하지 않아?"
위험...
환각 환청을 보고듣는 박소장이 위험요소라면 위험요소이기도 하지.
게다가, 철갑탄 박아넣은 놈.
분명히 저 산 속에 아직도 있다.
놈도 분명히 위험요소다.
하지만.
난 미소짓고는 말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건 없어. 걱정 마."
"으응... 언제 돌아와? 얼마나 거기 있어야 돼?"
수현이는 아마 내 소식을 다른 사람한테 전달해주는 창구 역할을 하고있을거다.
자기가 궁금하기도 하겠지만, 나한테 전화해서 묻는다는건 다른 사람들도 궁금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만큼 내게 의존하고 있다는 거겠지.
난 미소짓고는 말했다.
"가능한 빨리 돌아갈게. 며칠 안 걸릴거야."
"오빠... 빨리 와아... 응?"
"알았어. 저녁 뭐 먹을거야?"
"새싹 난거 할머니가 오늘 조금 수확하셨거든. 그걸로 새싹비빔밥 만들어 먹을려구."
좋네.
새싹비빔밥...
난 미소짓고는 말했다.
"계란후라이도 얹으면 좋을건데."
"계란 이제 없는걸."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면 닭 같은것도 한 번 구해보자. 평택에 농사짓는 분들이 아마 가축도 같이 키우고 있었던거 같은데. 한 번 구해볼게."
"몰라아... 오빠, 빨리 오기나 해에..."
난 웃고말았다.
"알았어. 빨리 갈게. 저녁 맛있게 먹어."
전화를 끊었다.
마음이 푸근해진다.
수현이, 예은이, 은서. 그리고, 아직 이름 모르는 여자.
그밖에 여러 남자들과 여자들, 할머니.
종말에 겨우 살아남아 모여 함께 살고있는, 이젠 식구들이나 마찬가지다.
...가족 찾으러 가야되는데.
이 사람들을 두고 아예 떠나버릴 순 없을 것같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정이 많이 들어버렸어.
가더라도, 금방 돌아올 수 있게끔.
부모님과 동생은 연락이 안된다.
아마 앞으로도 안 될 거라고 본다.
박소장과의 대화에서도 살짝 속마음을 내비쳤지만, 아무래도 내 가족들은 종말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살아있었다면 내게 적어도 한번은 연락했겠지.
어디서든 전화기를 구해서.
"...후우..."
난 한숨을 깊게 내쉬곤 돌개바람을 소환해 올라탔다.
"쯧."
가족만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종말이 터지고 가족을 잃은게 나 뿐만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내 가족은 부모님과 여동생 뿐이니까.
성가연에 대한 생각이 싹 사라졌다.
난 다시 한숨을 쉬고, 돌개바람을 몰아 원전을 향해 달려나아갔다.
원전에 돌아와 철조망을 뛰어넘는데,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남자 웃음소리.
익숙한 목소리.
송중사다.
카카카카!
타이어로 땅을 긁어 멈추곤, 곧장 돌개바람을 소환해제했다.
뒤돌아보니 송중사와 박소장이 함께 원전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어, 성훈씨. 다녀오셨습니까."
송중사가 반가운 얼굴로 뛰어온다.
"뭐 가져오셨나요?"
난 손을 들어보이곤 말했다.
"슈퍼를 좀 털었어요. 과자랑 초콜렛도 좀 갖고왔는데."
"오오, 초콜렛! 허쉬꺼도 있습니까?"
모르지. 아무거나 막 집어왔는데.
어깨를 으쓱하곤 더플백을 내밀었다.
송중사가 지퍼를 열어 잠깐 뒤적거리더니 환한 얼굴로 초콜렛 몇 개를 꺼내들었다.
"오우, 와! 성훈씨. 이거 제가 먹어도 될까요? 하루종일 소장님 따라다니면서 배웠더니 당이 좀 떨어져서."
"그래요."
느긋하게 걸어온 박소장이 나를 보고 미소지었다.
"바쁘게 활동하시는군요. 오면서 들었습니다. 음식을 구해오셨다고요. 수고하셨습니다."
"별 말씀을요."
성가연 나체를 보고 하도 꼴려서 도망치듯 나간거지만.
난 웃고는 물었다.
"송중사 배우는 속도가 빠르다는건 박소장한테 들었습니다만, 어떻습니까?"
송중사가 쑥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빠르긴요. 박소장님이 잘 알려주셔서 뭐, 어떻게든 따라가는거죠."
박소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말 머리가 좋습니다. 일머리도 있고. 정비사로 두기엔 아까워요. 규태야. 그냥 여기 말뚝박지? 원전 관리해보면 이것저것 많이 배울수 있을거야. 저기 저 건물 보여?"
박소장이 멀리 하얀 건물을 가리켰다.
언듯 보면 흰 벽돌 빌라처럼 생겼다.
박소장이 말했다.
"저게 우리 교육센터다. 채용한 신입들 현장 투입하기 전에 저기서 교육시키거든. 채용하기 전에 인턴들, 대학생들도 저기서 배우고. 교재하고 교육용 기기들 저 안에 다 있어. 저기 있는것만 뒤적거리면서 잘 배워놔도 원전 관리하는덴 문제 없을거야. 내가 써준 매뉴얼도 있고."
송중사가 황당한 얼굴로 웃더니, 초콜릿 하나를 까서 반을 뚝 부러뜨렸다.
반쪽을 박소장에게 건네며 그가 말했다.
"아이, 제가 무슨 원전을 관리합니까. 달랑 며칠 배워갖고 그걸 어떻게 해요?"
"자네라면 할 수 있다니까."
난 그런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을 보며 속으로 살짝 놀라는 중이었다.
이 두사람 엄청 친해졌네.
위험하다며 소리 버럭버럭 지르던 그 송중사 맞나?
어쩌다 이렇게 죽이 잘 맞아졌지?
송중사가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소장님이 그냥 계속 하시죠. 제가 도울 수 있는건 돕지요. 심부름도 하고."
회유다.
송중사, 자기 역할이 뭔지 확실히 아는걸.
나도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맞습니다. 며칠갖곤 아무래도 부족하지 않습니까. 소장님이 계시면 우리도 좀 더 마음을 놓을 수 있고. 좀 더 하시죠."
박소장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박소장이 웃고는 말했다.
"저는 갈사람입니다. 떠날 사람은 떠나는게 맞지요."
그러자 송중사가 뭐라고 말하려 했다.
박소장이 그런 송중사의 어깨에 손을 짚고는 내게 살짝 목례하고 관리건물을 향해 걸어갔다.
송중사가 박소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난 초콜릿을 한 입 베어무는 송중사에게 물었다.
"어때요? 진짜 떠날 것 같습니까?"
송중사는 입 안에 든 초콜릿을 두어번 씹었다. 달콤한 초콜릿이 입 안에 있음에도 그는 영 안 좋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예. 갈 것 같네요. 쩝, 음. 같이 일도 해보고 배우기도 하면서 넌지시 설득은 해 보는데, 안 됩니다. 죽은 애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한 마음을 돌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죽은 애?"
송중사가 끄덕이곤 말했다.
"예. 죽었다더라고요. 종말 터지고 죽은건지 모르죠. 마누라도 그렇고. 가족 얘기는 잘 안 할려고 해서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냥 한마디씩 하는걸 들었습니다."
"죽은거 확실합니까?"
송중사가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거 같습니다. 확실히 자기 입으로 애 죽었다고, 그래서 세상에 혈육 같은거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미련도 없다나."
...으음.
가족이 종말에 변해버렸거나 끔살당했고, 동료들 떠나고 자살하는걸 보고, 몇달이나 홀로 여기 갇혀있다 마음이 썩어버렸다.
그래서인가.
이따금 위험해보이는 이유는.
모든걸 포기하고 스스로 죽겠다고 여기고 있어서 그게 내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졌기 때문인 것이었을까.
난 말했다.
"설득은 그래도 계속 해봐요. 산사람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종말에 살아남은 사람들이라도 계속 살도록 해봐야죠."
송중사는 두어번 끄덕이더니 갸웃하며 말했다.
"설득이야 하겠지만, 기대는 마십쇼. 저 분, 진짜 속이 완전히 다 썩어 문드러졌어요. 일할때는 멀쩡한데 개인 이야기 할 때는 그 썩은게 질질 흘러 나온다니까요. 그 때마다 섬칫해요."
난 피식 웃고는 말했다.
"섬칫하다고 하기엔 둘이 꽤 친해보이던데."
송중사가 멋적게 머리를 긁더니 말했다.
"예, 뭐. 말씀드렸다 시피, 일할때는 멀쩡해요. 재밌기도 하고, 전문적이기도 하고. 선생님 해도 잘 했을 것 같더라고요. 잘 모르고 어리버리타도 엄청 잘 가르칩니다. 인내심도 보통이 아닌거죠. 체질이 가르치는 체질인건지 몰라도."
"그래요?"
난 고개를 들어 박소장이 걸어간 자리를 바라봤다.
그는 이미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그저 걸어간 공간이 남아있을 뿐이다.
박소장.
송중사의 말대로라면 꽤 유능한 인간이다. 자기 전문분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인내심이 있고, 잘 가르친다.
쓸모가 있다.
쓸모있는 인간은 죽게 놔두기엔 아깝다.
마음을 돌리게 하기가 어려운거지.
그 때, 관리건물에서 두 사람이 걸어나왔다.
특임대장 성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