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89/187)

연기가 흐트러진다.

정은서가 말했다.

"...제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왜 이렇게 화가 나는거죠? 모든게 다 화나고 짜증나요."

음...

난 정은서가 어떤 기분일지 상상도 못하겠다.

바퀴벌레들은 그들 스스로 바퀴벌레가 되어버린거다. 누가 바퀴벌레짓 하라고 등떠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을 밖으로 끌어낸건 정은서다.

동생의 죽음마저 자기 책임이라고 혹시 여기고 있는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자기혐오에 빠져버린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지만, 나로서도 모르는 일이다.

그저 옆에 같이 있으면서 담배 피우는, 담배 동지가 되어줄 뿐이다.

"은서씨."

정은서가 나를 본다.

나는 말했다.

"나는 은서씨가 좋아."

정은서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난 피식 웃었다.

"은서씨가 뭘 말하든 무슨 판단을 하든, 나는 잘못됐다고 생각해본적이 한번도 없어. 앞으로도 그럴거고."

후우-

담배 맛 좋네.

"아무도 아무것도 잘못한거 없어. 나도, 은서씨도, 전부 다."

난 저 멀리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 바퀴벌레들 빼고."

후우-

그렇게 말하며 담배연기를 뱉았다.

정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내게서 시선을 돌려, 멀리 바라볼 뿐이었다.

* * *

"후우, 하아."

지하도 입구까지 돌아오는데 점점 더 많은 가속이 필요해진다.

그만큼 깊게 들어갔다.

안에 얼마나 더 남아있는지는 모르겠는데, 확연히 눈에 띌만큼 줄었다.

슬슬 다음 목표를 찾아봐야 되겠는데.

지하도만큼 우글우글 몰려있는 그런 곳으로.

22레벨.

확실히 근거리 원거리 무기를 같이 쓰니 렙업 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감각에 8점을 넣어 19를 만들고는 대형마트로 돌아왔다.

화살을 연습한 것까지 다 합치면 최소 300발 정도는 지금까지 쏴본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시위를 당기는 속도, 조준하는 속도가 제법 빨아졌다.

계속 활을 쏘다보면 점점 더 빨라지겠지.

각궁 외에 다른 활은 써본적 없어서 차이를 분명히 알 순 없지만, 지금 쓰고있는 각궁, 정말 마음에 든다.

목표를 맞추는건 스킬이 해준다고 쳐도, 목표물까지 날아가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장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 활, 꽤나 멀리서 쐈음에도, 거의 100미터쯤은 떨어져 있겠다 싶을만큼 멀리서도 화살은 놀라운 위력으로 날아가 머리를 뚫었다.

100미터 밖에서도 머리를 뚫어버릴 정도의 장력은 보장된다는거다.

스킬빨을 생각해보면, 장력이 보장하는 최대사거리 안에서는 무조건 원샷 원킬.

그러면 최대 사거리는?

주위에 있는 놈들은 죄다 쓸어놨고, 은근히 골목이 꺾어지는 지하상가에서는 최대사거리를 알기 어렵다.

그렇다고 좀비 하나 꼬셔다가 가속박고 튀어서 거리를 벌리고 그런 귀찮은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언젠간 알게 되겠지 뭐.

난 활과 스킬의 성능에 만족하며 대형마트로 돌아갔다.

이튿날 아침.

난 훈이 아재, 준혁, 태영을 데리고 건물을 나섰다.

우릴 배웅해주는 여자들에게 남자들이 손을 흔들어주는걸 보고 있자니 미소가 나온다.

여자들과 한태는 건물 안의 자재를 뜯어다 셔터와 유리벽을 차례로 보강하거나 텃밭을 가꾸는 일을 거의 전담하고 있다.

그리고 남자들은 밖에서 알루미늄 판을 뜯어오거나 다른 유용한 물건들을 내가 전에 쓸어놓은 가게들에서 갖고 온다.

와중에 틈틈이 활을 연습하거나 한다.

자연스럽게 된 거라고 해야하나, 누가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다들 알아서 일하고 있다.

대형마트 내에 진열되어 있던 온갖 과자와 파이류, 햄과 소시지, 라면 따위들은 아직 넘쳐날만큼 있었고, 3층 창고에 진열된건 손대지도 않아 그대로 놓여있다.

적어도 1,2년은 먹는 것은 아무 문제 없을거라고 본다.

지금 나가는 레이드 목표는 중형 약국이다.

어제 여자들이 우르르 들어왔는데 다들 영양상태나 건강상태가 좋지 못하다.

간호사 할줌마가 의약품이 모자라다고 했으니, 약국 하나를 통째로 털어 올 작정이다.

남자 셋, 그리고 체력 업적 스킬로 강화된 내가 한보따리씩 들고 돌아오면 중형 약국이어도 거의 털어버릴 수 있지 않겠나 싶다.

바퀴벌레들은 뭐.

굳이 신경 써야되나?

저러다 굶어뒤지든지 내가 알 바 아니지.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았다.

청계천 가는 길.

높은 건물의 마천루가 하늘을 가리려 드는 길가에 큰 약국이 하나 있었다.

약국 앞 도로는 다소 난장판이었다.

종말이 터졌을 때 교통사고가 심하게 났던 모양이다.

트럭과 승용차 몇대가 뒤집어져 있고, 사고차량의 파편들이 도로에 널려있었다.

그러나 시체는 없다.

사고차량들의 운전석 안전벨트는 씹은건지 뜯긴건지 거칠게 끊어져 있었고, 주위에 피가 흥건했으나 아무도 없다.

그저 떨어져나간 팔과 손 한두개가 바닥에 널부러져 있을 뿐이다.

이 사람들을 구급대원들이 와서 실어갔을 리는 만무하다.

좀비 웨이브가 되어버린 거겠지.

뒤집어진 트럭 뒤에 남자들을 데려와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요."

훈이 아재와 준혁, 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선생님."

"네."

남자들을 뒤로한 채 검을 꺼내들곤 약국으로 걸어갔다.

약국 안엔 언듯 보기에 네다섯마리 정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닥에 엎어져 있을걸 감안하면 예닐곱? 그 이상일 수도 있고.

어깨로 약국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는 휘몰아쳤다.

그리고, 약국 문을 열고 나왔다.

우르르, 콰당탕!

무너지는 소리.

턱에서 피가 뚝, 뚝. 흘러내린다.

난 손등으로 턱을 쓸어닦고는 검을 집어넣었다.

스르릉- 착.

"들어와요."

남자들이 휘둥그래진 눈으로 나를 본다.

이미 몇번 봤음에도 적응이 안 된다는 얼굴이다.

남자들은 다소 긴장된 얼굴로 약국으로 들어왔다.

십여마리의 죽은 좀비들.

머리가 썰리고 뚫려 죽은 시체들이 바닥에 엎어져 있다.

"휘유."

"볼 때마다 엄청나네요, 성훈씨."

"그게 우리 선생님이라니까. 자, 담읍시다. 뭐부터 챙겨야 되지?"

남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백팩에 약을 우르르 쓸어담기 시작했다.

나도 피식 웃고는 약국을 돌아봤다.

약이라.

뭐가 됐든 풍족하게 갖고 있으면 좋지.

챙겨볼까.

등에 맨 백팩의 지퍼를 열었다.

지이익.

네명이 멘 가방이 두툼해졌다.

진열된 것들 중 반 정도는 쓸어담은 것같다.

뒤쪽에 창고 같은것도 아마 있지 않을까 싶은데, 이미 가방이 빵빵하다.

"여긴 나중에 세분이서 와서 마저 가져가세요."

"예, 선생님. 걱정 마십쇼."

남자들이 끄덕이며 나를 본다.

시선에 들어있는건 굳건한 믿음이다.

으음.

남자들이 저런 눈으로 보는건 좀 그렇네.

난 웃고는 약국을 나섰다.

"갑시다."

넷이서 두툼해진 가방을 메고 나오는데, 멀리서 도로로로- 하며 콩볶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비행기다.

태영이 말했다.

"저거 요즘 자주 보이더라고요."

"또 살아남은 그룹이 있는거 아닐까?"

훈이 아재가 갸웃하며 하늘을 쳐다본다.

준혁이 말했다.

"있겠죠. 우리도 살고 저 바퀴벌레들도 살아있는데 어딘가엔 또 사람들이 있겠죠. 그래도 그냥 무작정 찾아나서고 그러진 맙시다."

남자들이 준혁을 바라본다.

준혁이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시대가 시대잖습니까. 저 경비행기가 속한 그룹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몰라도 조심하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바퀴벌레들이랑 다를것도 없는 사람들이면 또 피를 보게 돼요."

듣고있던 훈이 아재도 고개를 끄덕였다.

"요전번엔 우리 선생님이 계셔서 그 놈들을 쫓아냈지만, 혹시나 다음번에 선생님 안계실때 그런 놈들이 또 우르르 몰려오면요. 어쩌면 우리쪽 사람들도 다칠지 모릅니다, 선생님."

태영이도 고개를 끄덕인다.

"형들 말이 맞아요. 위험할 수 있어요."

음.

일리있는 말이긴 해.

난 경비행기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갑시다."

"예, 선생님."

"네."

* * *

"후우..."

머리칼이 슬슬 눈가까지 내려온다.

조만간에 좀 잘라야 겠는데.

머리를 쓸어넘기니 핏물이 뒤로 주르륵 흐른다.

밤하늘에 달 떠있는거 보니 비는 안 오겠네.

"오셨습니까, 성훈이 형."

한태다.

2층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던 모양이다.

...음?

녀석의 뒤에서 연기가 슬슬 올라오는데.

...뭔지 알겠네.

난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고는 한태를 올려다봤다.

"너 담배 피우냐?"

한태가 눈을 굴리더니 멋적게 웃었다.

그리곤 머리가 사라진다.

다시 머리를 쏙 내밀더니 말했다.

"아, 아니에요. 안 피워요, 형."

"어린놈이 하여간. 너 몇살이라 그랬지?"

"여... 열 일곱이요..."

참 나.

그래도 뭐, 생각해보면 나도 저때쯤 구석에 숨어서 담배 피우고 그랬었지.

지금은 종말이다.

애새끼 하나가 구석에서 담배피운다고 벌금을 줄 사람이 있나, 저게 부모가 있어서 엄빠한테 오지게 처맞길 하겠나.

경찰도 법원도 정부도 없는 마당에.

난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문이나 열어, 임마."

"네, 형. 지금 열어드릴게요."

잠시 기다리자 셔터가 열렸다.

드르르륵-

한태가 멋적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다.

담배냄새 훅 난다.

"헤헤."

난 한태를 바라보다 어이가 없어져서 피식 웃어버리곤 계단을 올랐다.

"별 일 없었냐?"

"네, 형. 별 일 없었어요."

"그래."

마트 쪽에서 핏, 핏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가보니 사람들이 활 연습을 하고있다.

신선칸과 거기서 이어지는 정육점, 해산물, 야채코너들.

지금은 텅 비어버린 그쪽 복도를 활용해 활연습을 하고있던 수현이와 정은서, 준혁과 태영이 나를 보곤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오빠! 다녀왔어?"

"성훈씨. 수고하셨습니다."

난 미소지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연습하고 있었네?"

태영이 웃으며 말했다.

"네, 성훈이 형. 이거 하다보니까 진짜 재밌던데요?"

난 웃었다.

"그래. 계속 연습해."

"네, 형!"

난 수현이와 정은서를 보며 말했다.

"난 올라가서 씻을게."

"네, 성훈씨."

"오빠, 나도 좀 있다 갈게. 먼저 올라가있어."

손을 흔들어주고 돌아서는데 옆에서 놀란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보는 여자다.

광대뼈에 피멍이 들어있네.

아아, 새로 온 여자구나.

여자는 두 손에 라면과 과자, 환타가 든 장바구니를 들고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살며시 떠는게, 뭔가 엄청 무서운걸 본 태도다.

왜 저러지?

툭.

피가 턱에서 떨어진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지금 온 몸이 피에 젖어있다.

검 두자루를 허리에 차고, 활과 화살을 등에 멘 채 온 몸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내가 얼마나 섬뜩한 몰골일지, 얼마나 사납고 위험해 보일지는 눈 앞 여자의 얼굴만 봐도 짐작이 된다.

그럴만도 하다.

여러번 봐서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이런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겠지.

하도 피를 뒤집어 쓰고 다녔더니 나 스스로도 무감각해져 버렸나보다.

여자는 희미하게 떨고 있었다.

난 말했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습니까?"

여자는 흑, 흐윽 하며 숨을 몰아쉴 뿐 대답하지 못했다.

난 미소짓고는 살짝 목례하곤 걸어갔다.

피가 줄줄 흐르는 얼굴로 웃어준다고 뭐 얼마나 친밀해 보일지는 모르겠다만.

예은이 방에서 샤워하며 상태창을 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선택받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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