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서는 그렇게 말하곤 다시 두 손으로 이마를 감쌌다.
속이 문드러지는 모양이다.
난 계단 벽에 어깨를 살짝 대어 기대었다.
이젠 습관이 되어버린 듯 검자루에 손이 자연스레 올라간다.
팔을 들어 팔짱을 끼곤 물었다.
"많이 안좋습니까? 동생분."
"...네. 어제는 아프다고... 잠을 한숨도 못 잤나봐요."
하나 남은 가족이 아프다...
나로서는 달리 해줄 말이 없다.
난 의사가 아니다.
병원은 기대할 수 없다.
이 여자, 동생을 꽤 아끼는 모양이다.
아직 전화는 된다.
동생을 아낀다면, 인근 병원에는 죄다 연락을 돌려봤겠지. 어딘가 연락을 받았다면 병원에 데려다 달라는 말을 꺼냈을거다.
그럼에도 여기 앉아있다는건, 인근 병원은 초토화되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감이라는 말을 하기도, 힘내라는 말을 하기도 어렵다.
유감이라면, 이미 가망 없으니 포기하라는 것 같잖아. 힘내라는 말도 이 여자에겐 그저 공허하게 울리는 단어일 뿐이다.
난 그저 말없이 서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은서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촉촉하다.
울고싶은걸 참은 모양이다.
그녀는 애써 미소지으며 일어났다.
"미안해요. 다들 바쁜데 저 혼자 여기서..."
난 고개를 저었다.
"그런건 신경쓰지 말고 올라가서 동생분하고 같이 있어요. 다들 이해해줄 겁니다."
정은서는 그러겠다 말겠다 말도 없이 그저 서있었다. 혼자만 빠진다는게 못내 미안한 모양이다.
착하다.
사람들한테 열심히 음식 나눠주고 다닐 때부터 느꼈는데, 참 착하다.
...종말에선 살아남기 어렵겠다.
난 말했다.
"동생분 지금 혼자 있지요?"
"...네."
"올라가요."
정은서가 나를 바라봤다.
잠시 그러고 있다 고개를 숙였다.
"...염치 불구하고... 그럼... 감사합니다."
"염치 불구할거 없어요. 자아."
난 나오라고 고개를 까딱 하고는 엘리베이터 근처까지 정은서를 바래다줬다.
멀리 작업중이던 인라인 사람들과 한태, 훈이 아재와 여자들이 이따금 이쪽을 돌아본다.
난 손을 흔들어주며 슬쩍 정은서를 가리켰다.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여 왔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네.
정은서가 엘리베이터에 타며 내게 목례해왔다.
난 미소지으며 끄덕여주곤 옆문으로 나갔다.
인라인 사람들은 아직 시체를 치우는 중이다.
윗층에도 시체들이 있고, 마트에도 백마리가 넘게 죽어있으니 시체 치우는 것만 해도 한세월일거다.
할매들은 텃밭을 가꾸고 있고, 수현이들은 셔터를 보강하고 있다.
난 말 한마디 안 했는데 자기들끼리 분업이 꽤 잘 되었다.
다들 바쁘다.
난 사람들이 작업하는 걸 바라보며 건물을 빠져나갔다.
나도 바쁘게 렙업해야지.
정은서의 동생, 아마도 세상에 하나 남은 혈육일거다. 여기 남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족의 생사를 알 수 없거나 좀비가 되어버렸겠지.
하나 남은 혈육이 아파 드러누웠다는건 어떤 심정일까.
...내 가족들은 어떻게 되어있을까.
점점 마음 한켠이 무거워진다.
가족을 찾아 나서겠다고 애저녁에 결심했었지만, 이 사람들과 하루 하루 지낼수록 그저 내버려둘 수가 없게 된다.
두고 떠날 수 있을까?
수현이, 예은이.
다른 사람들.
"...쯧."
몰라, 씨발.
지금 내가 아는건, 지금은 떠날 때가 아니라는거다. 같이 있어 즐거운 사람들이 있으면 그것으로 지금은 충분하다.
렙업하자.
편의점 옆.
하숙집 쪽 골목을 힐끗 쳐다봤다.
없다.
24시간 염탐하는건 아닌 모양이지.
난 고개를 돌려 지하도로 내려갔다.
* * *
"후우..."
변기에 앉아, 턱에 흘러내리는 핏물을 닦아냈다.
현재시각, 밤 9시경.
두 번의 레이드.
레벨은 벌써 75나 됐다.
아까 3을 올려 체력은 98.
포인트는 3점.
...마침내, 100을 돌파한다.
135까지...!
난 손을 들어 체력을 눌렀다.
99, 100.
그리고...
...?!
뭐지?
100에서 올라가지 않는다.
다시 눌러봤다.
그리고 또 다시.
수차례 눌러봐도 체력이 올라가지 않는다.
포인트는 1점이 남았다.
어째서?
"...제기랄."
허탈감이 밀려온다.
스테이터스 캡이 있었나.
100이 한계였던거야?
"...하."
욕 나올 것 같네.
눈을 감고 혀를 차고는, 다시 상태창을 바라봤다.
체력 100.
...스테이터스 캡이라니.
체력이 100에서 멈췄다면, 다른 스테이터스들도 100이 한계라고 봐도 타당할거다.
힘을 최대로 찍고 나면 한 번 레이드에 100마리? 그런건가?
"...쯧."
아쉽다.
정말로 아쉽다.
난 나머지 포인트 1을 힘에 넣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 좀비들, 뛰는 좀비들을 한 번에 몰살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이 있었다.
기대를 배신당한 심정이다.
성과가 없었던건 아니다.
체력 100이면 엄청난 회복량이다.
예전에 비하면 거의 4배나 빠르게 회복할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마음 먹으면 하루에 네 번 레이드도 가능해졌다.
힘 100이라면, 하루 400마리인가.
이 지하상가.
천마리라고 가정했을 때, 넉넉잡고 사흘이면 몰살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꽤나...
장족의 발전이다.
하지만 아쉬운건 어쩔 수 없다.
체력 135 찍고 싶었는데.
폰을 꺼내 시계를 봤다.
밤 9시 2분.
...9시 2분이라...
좀 이른걸.
한 번 더 하고 가자.
기분은 영 별로지만, 스테이터스 캡이 존재했다는걸 알아낸 것도 일종의 수확인거다.
렙업하고, 새로운 전문화를 획득하자.
그래.
다음 전문화.
서둘러 렙업해서 전문화를 빨리 얻어야 돼.
새벽 한시.
겨우 네시간만에 모든 스텟이 충전되었다.
...네시간만에 50점이 회복됐다.
스텟 충전시킬려고 하루종일 기다렸던게 불과 일주일쯤 전이었던 것 같은데.
아쉬운건 아쉬운 거지만, 회복이 빨라진건 확실히 마음에 든다.
성장방향을 좀 생각해두는게 좋겠는걸.
힘이 지금은 확실히 모자라.
가속이 꼭 2회씩 남는다.
하지만 가속 2회.
많이 남는다고 보기도 힘들다.
못내 마음에 걸리는게 있기 때문이다.
우릴 염탐하던 바퀴벌레들.
놈들, 멀리서 지들끼리 죽고 죽여가면서 작은 가게들을 털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럼에도 머릿수가 줄지 않았었다.
점점 숙련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람들을 계속 집 밖으로 끌어내고 있다는 뜻도 된다.
세력이 늘어가는거다.
유사시에 사용할만한 가속을 확보해 두는건 지금 상황으로썬 나쁘지 않아.
렙업에 집중해야 되는 타이밍만 아니었다면, 가서 뭔데 염탐질이냐고 족쳐놓을 수도 있었겠지.
지금 난 그럴 여유가 없다.
가속을 그런데 쓸 수 없다.
새 전문화를 얻어야 돼.
하루라도 빨리.
그러면, 5점씩 나누기로 하자.
힘 5, 다음은 정신 5.
가속도 확보하면서, 킬카운트도 늘려나간다.
난 끄덕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젠장, 화장실 변기.
정말 맘에 안들어.
엉덩이가 눌려서 아프다.
지금까진 넓은 곳에 우글우글한 곳을 처리해 왔으니, 이젠 적당히 쉴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싹 쓸어놓자.
그래.
분수가 있는 공원이 좋겠어.
서점이 있는 2층 테라스도 좋고.
난 미소지으며 화장실을 나섰다.
화장실 복도에 널려있는 열 몇구의 시체를 건너, 지하상가로 들어갔다.
백수십여구의 시체가 사방 수십미터에 걸쳐 늘어져 있다.
내가 죽인 좀비들.
죽어버린 좀비들.
...뿌듯해지는걸.
난 미소지으며 멀리 서점을 바라봤다.
언듯언듯 좀비들이 움직이고 있다.
난 그 쪽으로 걸어가며 숨을 들이켰다.
"이리 와!"
"크롸라르륽?!"
서점과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가게들.
우르르 튀어나온다.
대가리가 홰래랙 돌아간다.
눈이 마주쳤다.
"크아아아악! 캬아아아아악!"
놈들이 달려온다.
나는 걸어간다.
일제히 달려온다.
발소리가 시끄럽다.
으르렁이 공기를 울린다.
넘어지고, 붙잡고, 짓밟으며 놈들이 달려온다.
인간 파도를 만들어내며 내게로 쇄도해 온다.
난 검을 뽑았다.
슈르릉-
탓.
한 발을 딛고, 무릎을 굽힌다.
몸을 숙인다.
놈들이 들이닥친다.
눈 앞에서 수많은 아가리들이 쩌억 벌어진다.
"크아아아아악!"
나는 휘몰아쳤다.
다음 순간, 나는 지하도 입구에 서 있었다.
지하도 입구까지는 꽤나 거리가 있다.
가속을 11회나 써버렸다.
콰르르릉.
지하 저 먼 곳에서 산사태가 난 것 같은 소리가 벽을 타고 메아리친다.
절규를 담은 포효가 공기를 쩌렁쩌렁 울린다.
난 미소지으며 마트 건물로 걸어갔다.
옷.
또 버려야 되겠는걸.
골목 쪽을 바라보니, 전봇대 쪽에 또 사람같은 그림자가 언듯거리고 있다.
징하네.
난 코웃음치곤 걸음을 옮겼다.
건물 입구는 이제 완전히 틀어막혔다.
내가 드나들던 옆문은 셔터가 내려가 있다.
"흐음."
어쩌지?
갸웃 하며 셔터를 바라보고 있자, 윗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성훈씨. 다녀 오셨습니까."
응?
고개를 들어보니, 인라인 동호회 남자들 중 한명이었다.
아마도 같은 동호회 여자들 중에 여자친구가 있었던, 그 남자같다.
이름은 열렬히 까먹어버려 모른다.
난 손을 흔들어주었다.
인라인 남자가 말했다.
"지금 열어주라고 할게요. 잠시만요."
잠시 기다리자 무슨 쇳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곤 셔터가 드르륵 올라갔다.
훈이 아재가 웃으며 날 맞아주었다.
"서, 선생님. 오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