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69/187)

"크롸-아---아-----"

놈들이 허공에서 느릿하게 유영하기 시작했다.

난 즉시 검 두자루를 뽑아내곤 뛰어들었다.

쉬르릉!

"흡!"

파각, 파각, 파각!

가속 8회를 쓰고 서른마리를 잡았다.

그리고, 에스컬레이터로 곧장 뛰어 아랫층까지 질주했다.

[레벨이 3 올랐습니다.]

마트 1층.

이제 깨달았다.

시체가 별로 없다.

아까 낮에 레이드 하고 쉬는동안 사람들이 시체들 거둬서 밖에 갖다버렸나보다.

다들 열심인걸.

난 미소짓고는 곧장 1층을 빠져나가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렸다. 거기까지 가속 10회.

어차피 빠져나갈건데 굳이 가속을 아낄 필요는 없다.

"후우."

멀리서 희미하게 우당탕 하며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엔 가속을 제법 썼는걸.

가전제품 따위가 앞길을 제법 가로막아 한번에 우르르 몰려오질 못했어.

지하주차장처럼 와글와글 모여있는게 차라리 한번에 싹 쓸어버리긴 괜찮았지.

그런 생각을 한가롭게 하며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좀비의 떼거지가 떠올랐다.

예전같으면 긴장했을 것 같다.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불과 지난주 까지만 해도 그랬을거다.

그런데 지금은, 좀 다른 생각이 든다.

...그 놈들을 모조리 죽이면 얼마나 렙업하게 되는걸까?

약간 군침도는걸.

난 피식거리고 웃으며 검을 털어 검집에 집어넣었다.

촤륵! 슈르릉- 착.

이 소리.

언제 들어도 기분 좋단 말이야.

엘리베이터에 타서 10층을 눌렀다.

수현이 안에, 입에 한발씩 두 번 쌌다.

게다가 기쁘게도 삼켜주기까지 했지.

그래서인지 당장은 별로 여자를 안을 생각이 안 든다.

올라가서 쉬자.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1023호를 향해 걸어갔다.

...1024호가 눈에 들어온다.

...뭔 생각하냐 지금.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23호로 들어갔다.

"다녀왔어."

그렇게 말하곤 훌러덩 벗고 샤워실에 곧장 들어갔다. 옷 또 버려야 되네.

남의 집 옷장에 있던거 함부로 막 꺼내 입고 있는 중인데, 그것도 금방 떨어진다.

쏴아아.

아, 시원하네.

아까 2층에서 서른마리 죽이고, 몇마리나 남았지?

그리 많이 남진 않았던 기분이 든다.

1층 마지막 레이드 때랑 비슷하거나 좀 더 적게 남은 것 같은데.

어쨋든, 한번 더 가면 마트는 완전히 끝이다.

"흠흠~ 흠~"

학살하고 돌아와 깨끗하게 샤워하는 기분은 꽤나 나쁘지 않다.

씻으며 방금 얻은 3포인트를 체력에 넣었다.

이로써 체력 69.

레벨은 어느새 45.

69라...

낮에 그 말 들었던 이후로 자꾸 기분이 몽글몽글해지는데 숫자까지 이러니 꽤나...

...흠.

됐어.

방금 두번이나 해서 그런지 탱크도 텅 비었다는 느낌도 들고, 게다가 수현이도 말을 그렇게 한거지 진짜 무슨 여자들이 나한테 엄청 발정나서 그런 말을 한건 아닐거다.

내가 간다고 여자들이 곧장 나한테 안겨오는 것도 아닐텐데, 괜히 김칫국이나 마시고 있는것 같기도 하고.

그냥 생각하지 말자.

시원하게 씻고 나와 침대로 갔는데, 아무도 없었다.

"음? 수현아."

주위를 둘러봐도 그냥 조용하다.

이제 밤 9시가 좀 넘은 시각.

사람들이랑 놀고있나보지.

난 잠이나 자련다.

침대에 누우니 세상 조용하다.

약간 아늑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런데 뭔가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왔다.

웅웅거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질 못하겠다.

벽 너머에서 들려온다.

뭔가 까르르 웃는 소리도 들리는데?

옆집이네.

여자들 저기서 모여서 노는거구만.

난 피식 웃고는 몸을 틀어 옆으로 누웠다.

아침에 부스스해서 일어났는데 수현이가 여전히 없었다.

옆집에서 놀다가 자버렸나보다.

일곱시 좀 넘었나?

으음, 좀 출출한데.

일곱시라...

레이드 가서 마저 정리해놓고 와서 밥먹자.

대충 세수하고는 내려가서 2층을 휩쓸었다.

거기 남은 놈들은 23마리.

3렙업.

체력에 3점을 넣어, 72로 만들었다.

드디어 체력 70을 돌파했다!

좀 기쁜걸.

텅 빈 2층을 한번 둘러보며 혹시 남은 놈들이 없나 수색해봤다.

확실히 다 죽였다.

남은 놈은 없다.

이걸로, 우리쪽 사람들이 적어도 2~3년은 먹을 만한 식량과 생필품을 확보했다.

대형 마트라 20KG쌀푸대도 쌓여있고, 3층 창고에도 과자따위가 든 박스들이 숱하게 있었으니 적어도 그 정도는 풍족하게 먹고 지낼 수 있을것 같다.

이걸로 당분간 먹거리는 해결됐어.

이후에도 먹을건 계속 필요하게 되겠지만, 방법을 찾아낼 시간이 몇년이나 생겼다.

괜찮네.

2층에서 내려와 나가니 수현이와 훈이 아재가 보인다.

수현이는 아직 셔터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수현아. 마트 끝냈어."

수현이와 훈이 아재가 반색하며 나를 돌아본다.

"정말? 수고했어, 오빠."

"선생님, 고맙습니다!"

훈이 아재가 웃으며 일어섰다.

"안에 분유가 많더라고요. 아내가 기뻐할 겁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별 말씀을요."

난 웃고는 말했다.

"이제 9층을 다 열어서 확인해야 되는데, 수현이 좀 데려갈게요. 안에 시체 좀 부탁드립니다."

"아, 예. 선생님. 맡겨두십쇼!"

옆문쪽 셔터는 열려있다.

난 열린 셔터 너머 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인라인 사람들은 다 어디갔습니까? 시체 옮기려면 일손이 필요할텐데."

수현이가 일어나서 다가왔다.

"차 뜯으러 간다고 나갔어."

"그래? 남자들 얻어맞은건 이제 괜찮아?"

수현이가 어깨를 으쓱하곤 말했다.

"응. 괜찮아 보이던데? 한명은 아직 좀 어지럽나봐. 가끔 두통도 있고 그렇대."

난 팔짱을 끼고 수현이를 바라봤다.

"그래? 간호사 아줌마는 뭐래?"

"그 언니도 원인은 모르지. 병원에 가봐야 알 것 같다고 하던데, 요즘 병원이 어딨어. 그냥 두통약이나 주는거지."

...음.

그렇지.

환자들 받는 병원 같은게 아직 남아있을리가.

혹시 어딘가에 멀쩡한 의사가 남아있어 운영중인 병원이 남았다 하더라도, 하필 운 좋게도 여기서 10분 거리에 있을거라는 기대는 그냥 안하는게 좋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나았으면 좋겠네. 올라가자."

난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며 훈이 아재에게 말했다.

"인라인 사람들 돌아오면 같이 하세요. 시체들 저거 혼자 다 못합니다."

"예, 선생님. 걱정 마시고 일 보십쇼. 제가 알아서 얘기하고 같이 치우겠습니다, 선생님."

훈이 아재가 사람좋은 웃음으로 내게 손을 흔들어준다.

확실히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자기 일 찾아서 하니 꽤 편하다.

우린 엘리베이터 타서 9층을 눌렀다.

문이 닫히고, 수현이가 말했다.

"오빠."

"응?"

"어젯밤에 여자들한테 얘기했어."

...어제 안들어왔었지.

난 헛기침을 하곤 물었다.

"무슨 얘기?"

수현이가 날 힘껏 째려본다.

난 시선을 피했다.

수현이가 말했다.

"...받아줄 수 있는 날엔 받아주겠대."

...그...

진짜냐?

내 표정이 살짝 변했나보다.

갑자기 정강이에서 지독한 통증이 올라왔다.

"아윽!"

"좋냐? 좋아? 이 짐승같은 오빠야."

"아, 아니. 갑자기 때리고 그러냐."

"으유, 진짜!"

수현이가 날 째려보더니, 내 허리를 잡고 안겨왔다.

"약속한거 잊으면 안돼. 잊으면 죽여버릴거야."

난 한 팔로 수현이의 등을 감싸안았다.

"...알았어."

"............"

나는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다.

젊은 여자 시체다.

창백하고, 퀭하며, 손대면 바스라져버릴 것같은 초췌한 몰골로 젊은 여자가 죽어있다.

방 구석구석에 다이어트 식품 포장지들이 널려있다.

살을 빼려고 했던 모양이다.

별로 살 찌지도 않았다.

늘씬한 여자다.

그런데도 다이어트 식품을 달고 산다니, 나로선 이해 못 할 노릇이다.

내가 남자라 그렇겠지.

이 여자, 종말이 터지고 나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집 안에서 두려움에 떨며 지낸거다.

밖을 내다보는 것도 무서웠는지 커튼을 쳐두어, 방 안이 컴컴하고 침침하다.

그나마 있는 음식이라곤 칼로리도 없는 다이어트 젤리 따위 뿐.

냉장고에도 물과 곤약밖에 없다.

결국 먹을게 떨어져 수돗물을 받아먹고 버틴 모양이다.

그러다 굶어죽었다.

이런 시체들이 슬슬 생겨날 시기이긴 하다.

3주쯤 됐으니.

집에 먹을걸 두고 산 사람이 아니면 굶어죽는거지.

그래도 돈 깨나 벌면서 살았던 여자같다. 여기저기 요가 전단지가 있고, 전단지엔 자기 얼굴이 박혀있다.

부유한 동네의 잘 나가는 필라테스/요가 센터에서 일하는 여자가 아니었겠나 싶다.

9층 문을 전부 열었다.

살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여자 둘이 죽어있었을 뿐이다.

지금 내 눈앞에 죽어있는 여자와, 거의 한달치에 가까운 우울증 약과 수면제를 한 번에 털어넣고 자살한 여자.

기운이 있고, 살고싶고, 그나마 용기가 있었던 사람들은, 음식을 구하기 위해 내려갔다가 좀비가 되어버렸다.

텅 비어버린 유령층이다.

그래.

지금은 종말이다.

매일 수현이와 섹스하고, 사람들은 사이좋고, 서로 만나면 웃으며 이야기하고, 평상시와 다름없이 지내고 있어도.

지금은 종말이다.

그렇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인 세상이다.

그것을 나는 이 여자를 내려다보며 느낀다.

"...가자, 오빠. 시체는 사람들한테 부탁해서 치우라고 할게."

"그래."

집을 나와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죽은 사람 보고 씁쓸해지는건 졸업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꽤나 그런 마음이 내 안에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홀로 쓸쓸하게 죽어버린 사람을 보면 기분이 안좋아.

후우.

담배연기가 흐트러진다.

수현이가 공구를 챙기며 말했다.

"이제 뭐 할거야?"

나는 담배를 한모금 더 빨았다.

이 건물, 완전히 쓸어놨다.

렙업도 제법 많이했다.

시체만 치우면 완벽하다.

하지만, 그냥 사는걸론 내겐 부족하다.

난 레벨을 올려야 돼.

후우.

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좀 쉬었다가 밖에 나가볼려고."

"밖에?"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기분이 꿀꿀한걸.

"응. 너도 유튜브 봤지. 어마어마하게 몰려있던 놈들. 스읍- 후우..."

수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보고있다.

난 말했다.

"그 놈들, 여기에 나타나지 말란 법은 없어. 동영상 보니까 놈들이 나타날때 주변에 있던 놈들도 같이 어그로 끌려서 우르르 튀어나오는 모양이더라. 소리 때문인지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담배 맛 좋네.

스읍- 후우.

연기가 흐트러지는걸 바라보며 말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몰려 있는 놈들은 내 선에서 처리해둘려고. 가능하면 좀비떼가 나타났을때 이 동네에 있는 세력까지 다 빨아먹게 두고싶진 않아. 우리한테도 위험하고."

수현이는 일리있다 여겼는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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