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87)

머리다.

"가자, 소은아. 어서 일어서."

예은이가 동생을 챙기고 있다.

바닥에 시체들은 어떡하지.

하아...씨발.

문 앞에서 일단 죽어 엎어져 있는 체크무늬의 목덜미를 붙잡고 카운터 안쪽으로 질질 끌고 들어갔다.

고삐리도 교복을 붙잡고 끙끙대며 옮겼다.

아직 문 앞에 두놈이 죽어 엎어져 있지만, 바닥은 보인다.

"후우, 후우."

힘썼더니 숨차다.

예은이와 소은이가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나, 나가도 괜찮을까요?"

소은이는 예은이의 팔에 매달려 얼굴을 파묻고 있다. 난 예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 조심하고. 넘어지지 마요."

난 파이프 창을 들고 편의점 입구로 걸어갔다.

박살난 유리가 발밑에 자박자박 밟힌다.

새벽이다.

고요하다.

해가 뜨려면 한두시간 더 있어야겠는데.

세상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가로등은 참 편안하게도 길을 밝히고 서있다.

뭔가 자동화 되어있는 건가보네.

우린 소리내지 않고 편의점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조용하다.

고요하다.

그 흔한 고양이 소리, 개짖는 소리도 없다.

새벽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우리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2층 단독주택이 늘어선 골목.

날 따라오던 예은이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아, 여기군.

낮은 벽돌담장엔 뾰족한 창살이 돋아있고, 붉은 벽돌로 세워놓은 그냥 평범한 단독주택이다.

검은색 철문.

비밀번호를 누르자 지잉 촥! 하며 잠금이 열렸다.

이런 허름한 단독주택도 오토락을 설치해놨네.

도둑이 흔하게 드는 동네인가?

여자들이 들어가는걸 보고나서 나도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비좁은 마당에 돌벽을 따라 계단이 있고, 1층엔 문이 두개 있었다.

2가구 정도 사는 것 같은데.

여자들이 계단을 올라갔다.

2층이 자기들 집인가보다.

예은이 내 손을 잡았다.

뭐야?

예은이 속삭였다.

"식사...하고 가세요."

...으음.

거절하기 힘들다.

거의 이틀간 크림팥빵 하나밖에 못먹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그녀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열쇠로 문 열고 들어가니, 남의 집 냄새가 훅 난다.

약간 낡은 냄샌데.

할매냄새?

찰칵.

문을 닫고나니, 그제야 두 여자는 안도했는지 바닥에 풀썩 엎어져 숨을 헐떡였다.

예은이 날 돌아보며 목례해왔다.

"데려다 주셔서 고맙습니다."

데려다주고 할것도 없이 바로 코앞인데.

편의점 골목에서 세번째 집이다.

그래도 뭐, 지금 상황에서는 겨우 몇십미터도 아득하게 느껴질만 하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방을 내려놨다.

가방 안엔 만두가 들었다.

씨발것, 도대체 난 무슨 생각이었지?

끓이거나 뎁힐수도 없는 냉동만두를 참나.

이 여자들이 챙긴것처럼 핫바나 빵같은 거였으면 훨씬 나았을거다.

"이거 줄게요. 가져요."

그러며 만두를 꺼냈다.

여자들은 안도감에 맥이 풀렸는지 달리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안방에서 누가 나왔다.

꼬부랑해진 할매였다.

"아이고, 예은아, 소은아. 나가지 말래도."

날 보더니 눈이 동그래진다.

예은이가 말했다.

"우릴 구해주고 데려다 주셨어요."

할매가 날 보더니 울상이 되어 풀썩 무릎을 꿇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새벽이 되도록 얘들이 돌아오질 않아서 이제나 저제나 하고 있었어요. 경찰에 신고를 해도 받지도 않고, 내가 정말로, 속이 타들어갑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

난 고개를 저었다.

"아뇨, 별말씀을요."

꼬르륵, 꼬륵.

......젠장.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게 아니거든.

예은이 자리에서 호다닥 일어났다.

"밥 차려드릴게요. 소은아, 언니 좀 도와줘."

"응, 어여 차려드려라. 아이고, 선생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소은이가 부스스 일어나서 만두를 집어들었다.

나랑 눈이 마주쳤다.

음, 앳되네.

예은이랑 확실히 닮았다.

나를 보고 꾸벅 목례한다.

얘는 낯을 너무 가리는데. 여지껏 나한테 한마디도 말 건네지 않았지.

남자가 어려운건가.

할매가 들어오라고 재촉한다.

난 신발을 벗고 마루에 앉았다.

제법 집이...

노친네 느낌 나는데.

진한 갈색의 가구들은 수십년 전에 목공예된 것처럼 보이고, 벽에는 볼품없는 수묵화가 걸려있다.

딱 중산층 노인네가 살 것 같은 집이다.

"우리 아들 내외는 요 밑에 살아요. 일본에 여행갔는데 글쎄, 연락도 안 되고. 선생님은 어때요? 가족들은 잘 있어요?"

할매가 오지랖부린다.

난 고개를 저었다.

"집이 멉니다. 연락이 안 되네요."

할매는 울상이 되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이고...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 됐데요. 예? KBS가 안나와요. MBC도 안나오고. 지금 되는데는 SBS 뿐인데 뉴스밖에 안해요. 나오는 뉴스마다 흉흉하기가 짝이 없어요."

오.

방송사가 남아있었다고?

SBS 보도건물은 그나마 멀쩡한 모양이네.

"SBS가 나와요? 뉴스에선 뭐랍니까?"

경찰특공대나 군대가 출동했다는 뉴스가 있으면 좋겠는데.

할매는 고개를 저었다.

"기자들이 건물에 갇혀있대요. 밖으로 나가질 못한대요. 숨어있는 기자들이 자기가 본것만 보내주는데, 무슨 데모하듯이 몇천명이 길거리에 우르르 뛰어가고, 세상이 어찌 될라고..."

...데모하듯이 우르르?

...좀비들 말하는것 같은데.

저 놈들이 수백 수천명씩 우르르 몰려다니는거면...

...씨발, 생각보다 더 위험하다.

가속이 있어도 수천마리는 상대할 수 없어.

아...씨발...

맛있는 냄새가 난다.

내가 준 만두로 만둣국을 끓이는 모양이다.

꼬르륵, 꼬르륵.

"아... 죄송합니다. 하루종일 먹은게 없어서."

할매가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아이고, 걱정마시요. 먹는거야 드리지. 손녀들 데려다주신 것만 해도 그게 어디요. 밥 자시고, 그러고 나면 어디 갈 데는 있어요? 집이 멀리 있다면서요."

"아... 예. 멀죠. 기차를 타야됩니다."

우리 대화를 부엌에서 듣고있던 예은이 다소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그 분 우리 옥탑방에서 잠깐 지내도 되죠? 지금 사람 없잖아요."

할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지내는거야 누가 뭐라고 하겠니. 선생님. 식사 하시고, 열쇠 갖다 드릴게. 잠깐 있어요. 하휴, 정말, 집 안에 지금 여자들밖에 없어서."

할매가 엉거주춤 일어나서 방을 나간다.

으음......

그렇다.

이건 사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처음 본 외간 남자를 밥주고 재워준다?

있을 수 없다.

사람 뜯어먹는 괴물들이 득시글한 상황이라 여자들끼리 있는게 불안하다.

외간남자를 집 안에 들이는 것보다 밖의 괴물들이 더 무섭다.

그런거겠지.

방 안에 혼자 있으니 생각이 정리되는걸.

일단 난 레벨을 올려야 된다.

가속을 충분히 확보할 때까지는 머물 곳이 필요하다. 그럴러면 여기 사는 사람들과 불편한 관계가 되면 안된다.

더구나 여자들 뿐이니 좀 더 조심해야 된다.

그때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부엌에 있던 소은이가 총총거리며 문으로 가더니 뭔가 속닥거린다.

그리곤 문을 열었다.

키가 작고 안경낀 젊은 여자가 집안에 들어왔다.

"맛있는 냄새가 나잖아. 지금 밥먹어?"

소은이가 여자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여자가 안방에 있는 나를 휙 보더니 관찰하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곤 목례해왔다.

"안녕하세요."

나도 목례해줬다.

"아, 예."

씨발 낯설다.

마침 식사가 다 준비됐는지, 예은이가 날 불렀다.

후...

여자들 사이에 나 혼자라 좀 불편하긴 한데, 배는 고프니 일단...

식탁에 가서 앉자 꽤나 북적거린다.

할매, 예은, 소은, 안경녀, 그리고 나.

우린 둘러앉아 만둣국을 한그릇씩 받아들었다.

"잘먹을게요."

...다섯명이라?

나 이전엔 네명이었단 소리네.

"아저씨, 예은이랑 소은이 구해주셨다면서요? 아저씨, 뭐하던 분이세요?"

안경녀다.

난 만둣국을 퍼먹다 어깨를 으쓱했다.

"대학생입니다. 제대하고 이제 복학할려고 여기 왔는데, 정신차려보니 이렇게 됐네요."

"아, 대학생이셨구나. 무슨 과예요?"

어디 대학인지는 묻지 않네.

하긴, 이 동네에 대학은 하나 뿐이니.

"신방괍니다. 근데 아직 뭐 배운건 없어요. 재수했다가 합격하고 나서 바로 군대 갔다 왔거든요."

"아, 그러셨구나. 몇살이에요 그럼?"

"스물 다섯요."

안경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저도 같은데 다녀요. 기공과요. 스물세살, 안수현. 잘 부탁해요."

손을 내밀길래 나도 모르게 악수해줬다.

...잠깐.

"한성훈입니다. ...기공과요? 기계공학?"

"드물죠? 우리 과에 여자는 나뿐이예요."

안수현이라는 안경 공대녀가 씩 웃었다.

웃으니 귀여운 얼굴이네.

키작고 좀 통통하고 가슴은 큰, 약간 포근한 인상의 여자다.

난 웃어주곤 예은과 소은을 쳐다봤다.

안경녀가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아직 자기소개도 안 한거야? 어휴. 저긴 예은이 언니. 스물넷. 지금 학원에서 일본어 강사로 일하고 있고요. 얘는 언니 동생. 고삼 수험생이예요."

"아."

예은과 소은이 다시 목례해온다.

나도 꾸벅 해줬다.

일본어 강사와 고삼, 공대녀.

각양각색이구만.

난 고개를 끄덕이곤 만둣국을 게걸스레 퍼먹었다. 아, 존나 맛있네 진짜.

굶다가 먹으니 진짜 개꿀맛이다.

좋아.

어차피 요리는 좆도 할줄도 모르는데, 밥 챙겨먹을 곳도 생겼고 잘곳도 생겼다.

레벨업을 위한 거처.

강해지기 위한 중심점.

여긴 이제부터 나의 베이스 캠프다.

"성훈씨, 이제부터 어떡할거예요?"

안경녀가 물어왔다.

할매와 예은, 소은도 그 질문에 나를 돌아봤다.

음.

상태창이라든가 레벨업이라든가는 말 못하겠지만, 앞으로 뭘 할지 정도는 좀 얘기해둬야 되겠지.

"매일 밖에 나가서 필요한걸 갖고 올 겁니다."

당연히 레벨업도 하고.

아니, 레벨업이 먼저다.

물건 갖고 오는건 그 다음이고.

여자들은 내 말에 꽤 놀란 눈치다.

예은이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나... 나가시게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게 이것저것 있을테니까요."

무엇보다 내겐 무기가 필요하다.

저 좀비들의 대가리를 처리하면서도 내구도가 좋아서 쉽게 망가지지 않는 그 무언가가.

안경녀가 눈이 동그래져서 날 쳐다봤다.

"용기가 대단하네요. 전 원래 좀 히키라 집에서 게임하는게 좋거든요. 뉴스 나오는거 보고 나서는 아예 안 나가기로 했는데."

만둣국을 퍼먹으며 피식 웃었다.

집에서 게임하는거 좋지.

나도 그러고 싶네.

"먹을건 있어야죠. 휴지도 있어야 될거고. 아까 보니까 가게들이 그냥 다 열려있더라고요. 들어가서 그냥 집어오기만 하면 돼요."

"감염자들한테 안 붙잡힌다면 말이죠."

안경녀가 그렇게 말했다.

만두를 오물거리며 천연스러운 눈으로 날 보고있다.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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