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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가 날 좋아한다.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가정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추리는 굉장히 섬세한 사고과정을 동반한다.
그렇기에 정보를 종합하기 이전에 하나의 가설을 세우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이다.
사실에 이론을 주는 대신, 자기도 모르는 새 이론에 사실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성녀가 날 좋아한다.
이것을 되뇌며 지금까지의 행적을 살펴보면, '어? 진짠가?' 하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피어났다.
빙하 색 눈동자.
그에 걸맞게 무뚝뚝하고 웃지 않던 여인이 어느 날부터 가볍게 미소 짓기 시작하더니,
결국 내 앞에서 화사하게 웃기 시작했다는 것은….
"좋아해서?"
성녀(聖女).
그에 걸맞게 첫 만남 땐 깨끗하고, 정숙한 모습을 보이던 여인이,
어느날부터 조심스레 야한 이야기를 입에 담기 시작한 이유가….
"좋아해서?"
처음 야설 노트를 들켰을 때, 야설 작가였냐며 가볍게 농담을 던지던 것도.
같이 그 야설을 쓴 범인을 찾자며 의기투합했던 것도.
유즈와 친구가 되어달라는 부탁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던 것도.
"……잠깐."
한 곳으로 집중되던 사고의 흐름이 잠시 멎는다.
이건 나를 좋아해서 해줬다기엔 뭔가 앞뒤가 안 맞는데.
다행이다. 모순점을 찾아내서.
야설 작가였냐는 짓궂은 농담을 던지는 것보단, 차라리 야설에 써먹었던 것 중에서 어떤 것을 가장 좋아하냐며 내 취향을 하나씩 알아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는 배덕감과 짜릿함.
거기에 그걸 빌미로 '다른 사람에게 들키기 싫으면 저랑 당장 이렇고 저런 짓을….' 같은 말로 단숨에 관계를 뺀다면.
물론 정석적인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남녀 사이가 확 가까워지는 데에 이만한 지름길은 없다.
역시 날 좋아한다기보다는 그냥 심심해서 놀려먹으려고….
"……."
포탈 앞.
수많은 쓰레기봉투들을 옮기던 발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놀랍게도 기억을 더듬어보자 하나 간신히 떠오르는 것이 있었던 까닭이다.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성녀가 놀리듯이 '루크, 이런 걸 좋아했었구나' 라는 말을 꺼내던 모습이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후장이, 뒷구멍이 어쩌고저쩌고, 주인공이 찍어 누르니, 마니 하는….
그떄 내가 어떻게 대답했더라.
「제가 쓴 거 아닙니다. 성녀님.」
「네. 작가님.」
떠올려보려 했지만, 이 문답이 기억에 콱 틀어박힌 바람에 세세한 것들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솔직하게 대답했더라면,
그런 것도 막 싫어하진 않는다….
라고 했을 텐데.
나는 차곡차곡 쓰레기봉투를 쌓아 올렸다.
어제 교회에서 보았던 축축하게 젖은 성녀의 눈동자를 떠올리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어 지워냈다.
착각일 것이다.
착각이어야 했다.
성녀는, 순결해야 하니까.
그게 '어디까지' 순결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말이다.
"후…."
혹시 일부러 그런 얘기를 흘렸던 걸까.
거긴 '사용해도' 괜찮으니까, 내 호불호를 미리 알아두려 한 걸까.
"미치겠네."
성녀가 날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짧은 가설 때문에, 성녀와의 모든 기억을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야설을 쓴 범인을 찾자며 의기투합한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사뭇 놀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랑 함께할 시간이 많아지니 성녀로선 아무래도 좋았던 걸지도 모른다.
게다가 「이슈타르 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였었나, 진심 하나 담기지 않은 문장을 보면서도 눈에 띄게 좋아했던 것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만약 새 놀림감이 생겨서 기뻐한 게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기뻤을 뿐이라면.
유즈와 친구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던 것도,
사실은 노력하는 '척' 만하고, 유즈와 나 사이의 관계가 깊어지지 않도록 방해했던 거라면.
"하…."
마지막으로 이 모두가 전부 착각일 뿐이고.
성녀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더라면.
아니. 오히려, 야설 작가 본인이었다면.
한숨을 집어삼킨 나는 포탈 주변에 가득한 쓰레기 봉투를 바라보다 남쪽 구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사랑이든,
장난이든,
아니면 야설 작가든,
의문 그 자체인 성녀를,
지금 꼭 만나야 했다.
****
하늘을 수놓은 나뭇잎 사이로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따각, 목검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숲 깊숙한 곳에서부터 경쾌하게 흘러나왔다.
세른일리는 없으니, 아마 카엔이나 백야… 혹은 둘 모두가 수련하는 소리일 것이다.
허름하고 조그마한 교회 앞은 무척이나 깔끔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작위적인 느낌이 가득 담긴 나뭇가지 몇 개가 형편없이 굴러다니던 공간이었다.
그랬던 공간이 지금은 포근한 잔디와 미처 뽑아내지 못한 잡초, 그리고 몇몇 이름 모를 하얀 꽃만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이제야 자연스러웠다. 이게 평소의 모습이었으니까.
백야에게 두드려 맞고 난 다음, 교회를 방문할 때면 항상 볼 수 있었던 고즈넉한 풍경.
성녀의 취미 중 하나가 정원 가꾸기였던 까닭이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만의 정원' 이었다.
뭐, 그래 봤자 정원이라기엔 저 새하얀 꽃 몇 송이가 전부였지만.
저 꽃. 예쁘지 않냐고.
직접 관리하는 건데, 제 머리카락색과 닮지 않았냐고.
은발인 성녀님보단 백야 님을 더 닮은 것 같다고 농을 던지니까 싸늘하게 시선을 내리깔며 뚝, 치료를 멈추기까지.
성녀와의 추억 하나가 데구르르 흘러 기억 속에 스며들었다.
…혹시 성녀가 나를 불러내고 싶어서 일부러 나뭇가지를 흩트려 놓았던 게 아닐까.
잠시 스치는 의심과 함께 교회 안쪽 조그마한 문을 두드렸다.
"성녀님."
문은 잠겨있을 게 분명했다.
굳이 손대어보지 않아도 확실했다.
대신 이름을 또 한 번 불렀다.
"성녀님."
닿았는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문 앞에서 힘없이 떨어졌다.
지금 이 상황을 요약하면 '너 나 좋아하냐?' 쯤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대상자가 나와 격이 맞는 옆집 시골 소녀 같은 것도 아니고, 무려 성녀다.
천출조차 아닌, 제대로 된 귀족의 피를 이은 성녀.
만약 야설 작가가 아닌 걸 확인하더라도 '그랬구나' 하고 넘길 수 없다는 뜻이다.
만일 그녀가 야설 작가라면 본때를 보여주면 그만이다.
그저 착각일 뿐이었다면 나중에 성녀에게 조금 더 놀림당하면 그만이다.
'제가 야설 작가… 푸흡….'
혹은,
'제가 루크를 좋아한다니, 그게 무슨…. 푸흡….'
따위의 목소리를 듣게 되겠지.
하지만, 만에 하나 성녀가 정말 나를 좋아하고 있었더라면.
…솔직히 어떡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카엔과는 육체 관계부터 시작해 속마음을 알아나갔으며,
유즈와는 어쩌다가 친구 언저리가 되었을 뿐 사랑이라 부르기엔 그 농도가 무척이나 옅다.
어딘가 크게 비틀어진 관계는 경험해보았지만.
제대로 된 관계는 잘 모르니까.
"안에 계십…."
차라리 이 모든 게 착각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과 함께 가볍게 문을 두드리려던 찰나.
"…왜 그러고 있어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안쪽이 아니라, 교회의 입구 쪽에서.
"이상하네. 평소엔 제 허락 없이도 벌컥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잖아요."
교회에 들어온 순간,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햇빛이 밝은 은발을 새하얗게 물들였다.
그 아래 바닷물을 함뿍 머금은 듯한 빙하색 눈동자가 내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청소할때나 입는 꾀죄죄한 셔츠차림이었던 것은 불가항력인데 말이다.
다만, 그래서 바라본 것 같지는 않았다.
성녀는 이보다 더한 상태도 자주 봤으니까.
잠시 성녀와 시선이 마주친다.
싱긋, 예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나는 웃지 못했다.
"혹시 들어가면 어제처럼 될까 봐 그러고 있나요?"
호기심 0%
애틋함 0%
장난기 100%.
나와 달리 무척이나 평소대로인 성녀가 입구에서 걸어왔다.
천천히.
품에 무언가를 껴안고서.
그걸 봐버린 탓에,
웃지 못했다.
"…성녀님."
"네. 루크. 듣고 있으니 말씀하세요."
살풋 내려갔던 시선이 다시금 그녀의 얼굴로 향했다.
그 품에 껴안아져 있는 것은,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물건이어서.
"이야기를 좀 하러 왔습니다."
적갈색 표지.
끄트머리에 살짝 풀잎 색이 배인,
그 외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그런 책은 내가 알기로 아카데미에 한 권밖에 없어서.
"…그래요. 독자님."
당장 묻고 싶은 의문들을 삼킨 나는 천천히 문고리를 비틀었다.
****
"제가 썼어요."
내 앞에 마주앉은 성녀가 가장 먼저 내뱉은 말이었다.
"…재밌었는데…. 허무하게 들켜서 아쉽네요."
"……."
"행정실 직원이 제대로 일했더라면 들키지 않았을 텐데 말이에요."
"……."
"하필이면 제가 자위하고 있을 때 찾아오실 줄은…."
비좁은 방 안엔 흐릿한 오렌지 냄새와 우유 냄새가 아스라이 떠돌아다녔다.
지금껏 맡아온 수상한 찻잎의 냄새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당장 내 앞에 내밀어 진 것조차 흔하디흔한 홍차 중 하나였으니까.
숨을 참아볼 생각도 했지만, 이제 와선 의미가 사라졌다.
"…자요. 정 믿기 힘들면 아무 데나 짚어서 물어봐도 괜찮아요. 거의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눈 앞에 적갈색 표지가 스윽, 내밀어 졌다.
나는 성녀가 내민 책을 받아들어 아무 곳이나 펼쳐보았다.
익숙한 필체다.
가볍게 넘기는 페이지마다 아름답다고 느낄 수준의 명필이 가득했다.
그 수준의 명필로 끄적인게, 개밥그릇에 담긴 우유를 바닥까지 핥아 먹도록 시킨 뒤 시작하는 목줄 주종 섹스 파트라는 건 굉장히 아리송했지만….
더 읽어볼 필요 없었다.
내 방에서 가져온 책이 분명했다.
어차피 커버에 배인 풀잎 색을 볼 때부터 의심하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페이지를 넘긴 나는, 어느 페이지 제일 위에 있던 글귀를 읽어내렸다.
"…침대를 짓이기는 주먹에 최대한 힘을 가득 실은 채, 그녀의 둔덕 위에서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나쁜 새끼야. 더 넣으려고 해도 안 들어간다고. 이러다가 임신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처음 듣는 욕설이란 감상은, 금세 무뎌졌다.
고저없이 내뱉어진 성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시선을 잡아끌었다.
아래로. 아래로.
거기에 있는 것은 성녀의 목소리와 똑같은 대사였다.
대충 어느 파트 어느 부분에 나오는 대사다, 정도면 넘어가려 했는데.
성녀는 그 뒤에 따라오는 대사를 정확히 읊조렸다.
처음엔 다른 부분도 물어보려 했었지만, 대사까지 정확히 맞추는 여인 앞에서 굳이 더 물어볼 필요는 없어 보였다.
다만 한편으로는.
아무리 작가라도 이걸 어떻게 다 외우고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들은 전부 이런 게 가능한걸까?
어딘가 수상하다.
"필체를 좀 봐도 괜찮을까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싱긋, 아까와 같은 미소를 남긴 채 잠시 침실에 들어간 성녀는 저번에 보았던 끄트머리에 다람쥐가 달린 펜을 들고 돌아왔다.
책을 건네주자 새하얀 백지인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 무언가를 열심히 적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거친 종이 위를 뾰족한 무언가로 긁는 소리.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녀는 내게 다시 책을 돌려주었다.
「그동안 감쪽같이 속았죠?」
…잘 썼다.
나 따위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필체였다.
하지만 아까의 의심이 남아 유심히 들여다보자, 금방 본문에 쓰인 것과 똑같진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치 흉내 낸 것처럼 미묘하게 다르다.
긴장한 듯 글씨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
이래서야 본문에 쓰인 필체 특유의 가벼운 마무리와는 어느 정도 모습이 다른 글씨가 나오는 게 당연하다.
잠정 결론을 내렸다.
거짓말이라고.
하지만, 왜?
언젠가 결국 들키게 될 거짓말을, 왜?
"하아…. 재밌었는데. 너무 아쉬워요."
"……."
"범인을 바로 앞에 두고 못 찾는 거. 생각보다 꽤 재밌더라고요."
"……."
"제 글은 어땠나요? 읽을만하던가요?"
"…성녀님."
"네. 루크."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짜증이나 분노 같은 감정은 아니다.
의문.
나를 좋아하는 것 같던 성녀가, 갑자기 야설 작가를 자처하는 데에서 생기는 의문이다.
야설 작가라 해서 얻는 게 도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이미지도 나빠질 것이고, 앞으로 나와의 관계도 소원해질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얻는 게 있었으니 저런 결단을 내린 걸 텐데.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런 두뇌 싸움은 쥐약이다.
다 터놓고 솔직한 대화를 하고 싶다.
그러려면 저 가면을 벗길 한방이 필요하다.
마침 생각나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성녀가 정말 야설 작가가 아니라면 대답할 수 없는 질문.
"위치."
"네?"
"야설 노트. 어디에다 마지막에 두셨습니까?"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밤하늘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아무 관심도 없던 날.
"이렇게까지 몸을 혹사시키면서도 아카데미를 다니는 이유라…."
만신창이가 된 루크의 오른 어깨에서부터 손끝까지, 평소대로 1시간 정도 투자해 완벽하게 고쳐낸 날.
"그, 음. 있긴 한데 하필이면 성녀님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려니 부끄럽네요."
'이슈타르 케라홀'이라는 이름이 있음에도 지긋지긋한 '성녀님'이라 불리게 된 지 어언 4,000일 가까이 지난 날.
"물론, 백야 님, 카엔 님한테 강제로 끌려간 것도 이유 중 하나고…. 마력을 개화한 김에 돈을 잔뜩 벌고 싶은 것도 이유 중 하나지만."
부끄럽다는 듯 눈을 피하는 루크의 시선을 따라, 창밖에서 고요히 흐르는 은하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날.
"사람을 지키고 싶어서요. 마수들에게서."
"……."
"…재미없으시죠? 성녀님에 비해 너무 초라해서."
"이렇게 다치면서까지, 그러고 싶나요?"
"당연히 안 다쳤으면 좋겠지만…. 제 뜻대로 되는게 아니니까요."
성녀는,
이슈타르는,
루크의 대답을 몇 번 더 곱씹어 보았다.
사람을 지키고 싶어서, 라니.
며칠전까지 더 이상 사람을 구하기 싫었던 제 생각과 정반대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