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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야설을 주웠다-64화 (6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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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교수들의 개인실 청소든, 학회의 연구동 청소든,

평소 하던 일이라 그런지 어려운 건 없었다.

꽉 막혀버린 하수구를 뚫는다든가, 그런 고약한 중노동에 비하면 이쪽은 선녀나 다름없다.

옆에서 계속 이런저런 이상한 상식을 주입하려는 유즈가 좀 힘들긴 했는데….

계속 듣다 보니 나름 견딜만하더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그런 것쯤은 진작에 마스터했으니까.

남은 일정은 하나다.

원소 마법학 교수인 야크툰 푤리네어 교수의 개인실 청소.

자주 불러주는 건 고맙지만, 이렇게 며칠도 안 되어 다시 찾아온 것은 처음이다.

뭐라도 쏟은 게 아니려나?

달리 생각나는 이유는 몇 가지 없었다.

나는 마스크를 내리며 개인실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폴리네어 교수님, 지금 계십니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너머에서 찰칵, 잠금장치를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루크."

피곤하디 피곤한, 썩 마녀다운 눈동자가 나를 반겼다.

저 눈동자를 보니 나도 피곤해진다.

나는 목구멍을 긁으며 나오려는 하품을 흡, 삼키고 가벼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폴리네어 교수님. 이번엔 저번에 비해 되게 텀이 짧네요?"

평소 사무적인 인사와는 달리 이번엔 인사 끝에 목소리를 조금 더 덧붙여보았다.

그냥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나름 이 교수님과는 친분이 있으니, 라는 이유가 하나.

말 그대로 진짜 궁금해서, 라는 이유가 하나.

였지만.

"……."

대답 없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교수님을 보니, 그런 생각은 곧장 달아났다.

최근 귀족들과 가까워져서 살짝 겁을 상실한 모양이다.

평민이 귀족에게 친근하게 이야기를 꺼내다니 말이다.

뜬금없이 친한 척 말을 걸었으니, '이 새끼 도대체 뭐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괜한 짓을 했다.

"죄, 죄송합니다."

분위기를 살피던 나는 일단 빠르게 사과부터 내뱉었다.

무분별한 사과는 좋은 인상을 남기기 어렵지만, 유야무야 넘기려는 것보다는 낫다.

일부러 날 자주 불러주시는 고마운 분인데 나쁜 인상을 남겨선 안 된다.

…라는, 지극히 속물적인 판단이었다.

"죄송? 뭐가?"

"아, 그게…. 제가 괜한 말을 한 것 같아서."

"왜 또 불렀냐고?"

"…네."

"뭘 그런 걸로 죄송하다고까지…. 하으음…. 신경 쓰지 마."

신경쓰지말라는 말 덕분에 조금 안심이 되긴 했지만,

마녀 특유의 나른하고 피곤한 목소리는 굉장히 설득력이 없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마음 속으로만 생각해야지.

"아무튼, 들어와. 너 누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저 잔주름을 보면 아줌마란 호칭도 아슬아슬할 것 같은데.

마음 속으로만 생각했다.

"아. 코코아 좋아하니?"

…그러고보니.

'이야기…?'

****

야크툰 폴리네어 교수의 개인실은 무척이나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다.

낡은 게 아닌, 클래식한 분위기의 탁자.

젊어 보이려 노력하나 아무래도 살짝 늙은 티가 나는 주홍색의 소파.

잠깐만 바라보아도 뇌세포가 하나하나 죽어가는 것 같은 마법 관련 서적에….

아무튼.

며칠전 내 손을 거친 결과물이니 당연한 일이다.

청소할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

중요하니 다시 말하지만, 청소할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처음있는 일이었다.

청소하러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

…마실 것을 대접받는 상황은.

"계속 청소하다가 온 거니?"

"예. 세 군데… 아니, 네 군데 정도."

빗자루와 대걸레는 문 옆.

손걸레는 교수의 허락을 맡고 탁자 한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나머지는 주머니 안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정자세로 교수 맞은 편에 앉은 나는, 방금 그녀가 건넨 코코아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하얀 김이 얼굴을 데웠다.

뒤따라오는 달큰한 초콜릿 향기가 식욕을 자극했다.

코코아를 담은 고풍스러운, 그러니까 어쨌든 비싸 보이는 찻잔에 피가 바싹바싹 마른다.

깨뜨리면 좆된다.

"싫어하니? 코코아?"

"아뇨! 좋아합니다."

그런데 뭐랄까, 잔이 비싸보이는 건 둘째 치고, 선뜻 마시자니 눈치가 보였다.

부모님께 혼날 때 딱 이런 기분이 들었던 것 같은데.

…영문을 모르겠다.

"그런데 왜…. 아. 맛있는 건 아껴먹는 타입인가?"

"…네."

그런 타입이긴 하지만, 지금은 딱히 아무 상관 없었다.

불편하다.

교수가 직접 내온 코코아도.

건너편에서 넘어오는 씁쓸한 커피 향기도.

이 어색함을 깨보려는 듯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교수의 목소리도.

불편하다.

코코아가 담긴 따뜻한 잔을 만지작거렸다.

들어 올리진 않았다.

깨뜨릴까봐.

"나도 그랬었는데. 어릴 적엔 특히 딸기를 아껴먹곤 했었지."

"아…."

"따로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있니?"

"저, 저는, 그…."

그녀의 가벼운 질문이 탁자를 건넌다.

내 횡설수설한 답변이 탁자를 건넌다.

이야기는 이어지지만, 그뿐이었다.

남는 것이 없었다.

폴리네어 교수가 하루에 커피 10잔 정도는 가볍게 마신다는 걸 기억해서 써먹을 곳이 있을까.

교수가 자꾸 안 마실거냐고 눈치를 주길래 결국 코코아를 한 모금 들이켰다.

맛은 있었다. 비싼 물건인가보다.

슬슬 '나 왜 여기 앉아있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 때 즈음.

"…요새 무슨 일 있니?"

아무렇지 않은 듯.

교수는 내게 의미심장한 질문 하나를 던져왔다.

"무슨 일… 이라뇨?"

있다.

심지어 많다.

카엔에게 강간 취향을 심어주고,

유즈와 언제든지 가슴을 만질 수 있는 친구 사이가 되었으며,

백야를 성희롱했고, 감기가 다 나으면 뒤지게 쳐맞지 않을까 걱정 중임과 동시에,

성녀를 살짝 의심 중이다.

한 10%쯤 확률로 범인이지 않을까 하는 의심.

하지만 남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다.

…뒤늦게 '딱히 아무 일 없습니다.' 라는 완벽한 정답이 떠올랐지만,

이미 교수가 뒷말을 꺼내고 있었다.

"최근 기분 좋아 보이길래. 아까 문 앞에서 웃던 것도 그렇고."

후릅, 지금껏 들리지 않던 커피 마시는 소리가 자그맣게 울려 퍼졌다.

다른건 몰라도, 교수가 애써 아무것도 아닌 척 연기하고 있는 것은 잘 알겠다.

아직도 모르겠는 것은, 왜 그녀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하고 있냐는 것.

"전 제가 잘 웃는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필요할때만 웃는 편이지. 남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야 할 때. "

"……."

"최근엔 시도때도 없이 웃고 있고."

정곡을 찔렸다.

"시도때도 없이, 라는 건…."

"저번 일 기억 안 나니? 내가 시끄럽다고 몇 번 주의를 줬을텐데."

"…아, 네. 그랬었죠."

나는 한 모금 비워진 채 식어가는 코코아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시선을 맞추어야 할지, 시선을 내리깔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비록 추측일 뿐이지만 그때 일로 나를 혼내려고 이러는 것 같진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교수의 의도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최근 기분 좋아보이길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든다는 뜻일까?

아니면 네 주제를 알고 조용히 다니란 뜻일까?

후릅, 다시 한 번 커피 마시는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계속 똑같은 방법을 써먹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이번엔 아까보다 조금 더 소리가 작다.

어색한 분위기와 품위 중, 품위를 더 높게 쳤을 수도 있고.

"…내가 일부러 널 자주 부르는 건 대강 눈치채고 있지? 아마 나 같은 교수가 몇 명 즈음 더 있을 테고."

"네. 항상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 감사히 생각해야지. 네 후원자나 다름없으니까.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커피잔이 기울었다.

받침접시에 올라갈 때까지, 건너편에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목소리가 강조된다.

"그렇게 자주 마주칠 때마다 항상 애늙은이 같은 시선을 보여주던 놈이 말이야."

낮고, 또렷하게.

"…어느 날 갑자기 밝아졌더라고. 알아서 콧노래를 부를 만큼."

살짝 내리깐 시선.

그 끄트머리에서 교수의 머리카락이 가볍게 움직였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영 껄끄럽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살면서 한번 쯤 이런 말 들어본 적 있을 텐데."

"…."

"사람이 갑자기 확 바뀌면 죽을 병에 걸렸다고들 하거든?"

들어본 적 있다.

그냥 우스갯소리일 뿐이지만.

교수는 갑자기 흥얼거리는 날 보고난 뒤부터 자꾸 그 말이 신경쓰였나 보다.

"나쁜 생각. 하고 있는 거 아니지?"

이것 봐.

대뜸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한테 이런 소리나 하고 있잖아.

"……."

"……."

저질렀다! 같은 표정으로 말을 마친 교수는 다리를 덜덜 떨어대기 시작했다.

힐끔 내 쪽을 돌아보는 시선엔 걱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하지만 이내 책장을 뚫어져라 바라보고는 부끄러운 듯 뒷목을 긁어내렸다.

…나도 지금 표정이 좀 이상할 것 같은데.

저런 오해를 받고 있다는 게, 미칠 듯이 부끄러워서.

"…안 합니다. 애초에 제가 왜 신의 축복까지 받고서 나쁜 생각을 한다는 겁니까."

"……."

"게다가 남자니까, 희귀하잖아요."

일반인이랑 큰 차이 없더라도 어떻게든 먹고 살 길은 있지 않겠느냐, 라는 의미였다.

피곤하디 피곤한 눈동자 위에 연민의 감정이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제대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후. 이상한 말 해서 미안해. 그래도 이제야 좀 마음이 놓이네."

폴리네어 교수는 잔에 남은 커피를 몽땅 비운 뒤, 목이 탄다며 내 앞에 놓여있던 코코아마저 가져가 버렸다.

단걸 싫어하는지, 빠르게 식던 커피에 비해 뜨거워서 그런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 상태 그대로, 더더욱 이상한 말을 덧붙였다.

"내가 성녀님땐 아무 말도 못해서 말이야. 과민반응 했나봐."

"…성녀님이요?"

나도 모르게 되물어보았다.

성녀라니. 마침 만나러 가려했던 여인의 이름이 교수의 입에서 튀어나온 까닭이다.

고개를 끄덕인 교수는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입술을 닦아내곤 말을 이었다.

"애늙은이 같은 시선. 성녀님이 딱 그랬었거든."

대충 언제쯤을 말하는 지 알 것 같다.

성녀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필요한 말만 주고받고, 치료가 끝나면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돌려보내주던 시절.

그 때의 성녀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으니까.

"얘기해도 되려나…. 뭐, 괜찮겠지. 뒷담 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이런 걸로 천벌을 받겠어."

목소리가 조금 더 나른하게 풀린다.

아니, 나른하다기보다는 아쉬움에 가까워 보인다.

재능있는 학생을 놓쳤다는 아쉬움.

내 가슴팍 즈음을 응시하는 두 눈은 이미 과거를 훑고 있었다.

"처음 뵀을때부터 열심히 공부하시긴 하셨는데, 항상 뭐랄까… 전부 부질없다고 생각하시는 눈빛이라 해야 하나….'

지금까지 '성녀'가 마력까지 개화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신성력과 마력은 다른 분야.

그것이 상식이었고, 둘은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발전해나갔다.

그런데 이번 대 성녀에 이르러서는 그 상식이 완전히 깨지고 만 것이다.

신성력도, 마력도 다룰 수 있는 여인.

신에게 과분하게 사랑받는 여인.

르페아스 아카데미에 성녀가 입학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런 성녀님이 어느날부터 묘하게 표정이 밝아지시더니, 며칠 뒤부터 강의 요청을 안 하시더라고."

난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는데.

교수는 그리 덧붙이곤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녀님이시니까. 사람을 구하고 치료하는 데에 더 힘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시나 봐."

"…그럴 수도 있겠네요."

"따로 들은 건 없지만, 아마 곧 지상으로 내려가시지 않을까?"

"마법에 관심이 없으시면, 아마…."

지상.

문득 이상함을 느낀 나는 멍하니 교수의 마지막 말을 곱씹어 보았다.

성녀는 사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처음부터 마법엔 딱히 관심 없었다.

어느날 표정이 밝아졌을 무렵부터는 아예 마법 공부조차 손에서 놓았다.

교수의 말마따나 만약 마법을 공부하지 않을거라면, 더 이상 성녀가 아카데미에 있을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재능만 있다면 입학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아카데미이니, 굳이 계속 그 비좁고 불편한 교회에서 지낼 필요 없다.

하지만 성녀는 계속 아카데미에 남아 내 치료를 도와주고 있다.

조금 다친 날은 컨디션이 안 좋다는 핑계와 함께 밤늦게까지 나와 이야기를 나누며.

크게 다친 날은 어떻게든 빨리 치료해주며.

내게 수상 야릇한 차를 먹여왔다.

그녀는 항상 나와 이야기를 나눌때마다,

표정이 밝은 것을 넘어,

해맑게 웃고 있었다.

"…루크?"

"…네, 네? 듣고 있습니다. 교수님."

"그런 게 아니라, 괜찮아? 얼굴이 좀 빨개서."

나는 꼼지락 꼼지락 깍지를 끼고 있던 손 하나를 들어 올려 뺨에 가져다 대었다.

따뜻했다. 무척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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