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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물어보니까 감기래."
"……감기, 요?"
저택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말에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던 나.
아무렇지 않게 덧붙이는 카엔.
"이불 속에서 엄청 끙끙대고 있다던데. 밖으로 신음 소리가 새어나올 정도로. 혹시 모르니 병문안도 오지 말래."
"아…."
탄식을 내뱉었다.
요새 자꾸 야한 생각만 해서 그런가.
저택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자마자 차올랐던 음습한 생각이, 카엔의 설명 덕에 깔끔하게 지워진다.
지금껏 자위를 모르던 순수한 여인이, 처음 성적 쾌감이란 것을 깨닫고 그것에 푹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니….
너무 편의주의적 생각이긴 했다.
정상적인 여인이라면, 내게 희롱당해서 기분 나빠 하는 게 당연할 테니까.
당장 어제 백야는 참다참다 카엔이 했던 것처럼 나를 침대에 거꾸로 엎어 친 다음 방에서 도망쳤다.
만약 정말 기분 좋았더라면 내게 조용히 몸을 맡겼겠지.
"…빨리 쾌차하셨으면 좋겠네요."
"백야는 감기 같은 거 안 걸릴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러게요."
"뭐, 백야도 사람이니까."
후우, 멋쩍음을 담아 숨을 뱉어낸 나는 카엔의 뒤를 따라 서쪽 구역으로 향했다.
멀쩡해진 백야에게서 어떻게 살아남을지는 일단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껏 내게 권해오던 맛없는 차가 무척 수상해진 성녀.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이면서, 오늘 만날 일정이 있는 유즈.
그 둘을 머릿속에 담아두기에도 벅찼던 까닭이다.
"가자. 밥도 먹고, 청소도 빨리 끝내야지."
"네."
최대한 해가 지기 전에 유즈를 만나러 가자.
이것이 가장 급선무였다.
*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카엔의 저택.
주방 안쪽에서 기름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입 크게 베어 문 쫄깃한 고깃덩어리에서 뜨거운 육즙이 넘쳐흐른다.
다음, 고기를 한 아름 감싸고 있던 튀김옷을 씹어 배어 나온 기름이 혀를 녹인다.
다음, 이름 모를 소스에 가득 절여진 고기의 맛도 첫인상과 달리 굉장히 산뜻했다.
처음엔 어느 정도 눈치 보이지 않을 만큼만 먹고 나서 잘 먹었습니다, 하고 일어서려 했는데.
정신을 차리자 주방에서 전달되는 요리를 모조리 입속에 집어넣는 내가 거기 앉아 있었다.
혀가 즐겁다.
맛있다.
이 단순하고 직설적인 생각 너머로.
대충 이틀 치 식비는 굳었다. 라는 생각이 뒤따라오는 내가 싫었다.
그러면서도 손에 쥔 포크는 놓지 않았다.
어설픈 나이프 질.
품위없게 따각, 따각, 접시에 식기 부딪히는 소리.
내가 열심히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입맛을 다시는 카엔.
그럴수록 점점 더 나를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메이드.
"많이 먹어. 루크."
입 안에 육향이 퍼질수록.
해가 기울었다.
*
카엔의 청소 실력은 예상했던 대로 어정쩡했다.
아예 도움이 안 되는 건 아닌데, 기본기가 없다 보니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다.
그래도 정리정돈 같은 단순한 건 괜찮겠지 싶어서 이곳저곳 흐트러진 빈 플라스크나 서적, 병 따위를 모아달라고 부탁했다.
이것을 조금 더 단순하게 가다듬으면, 한 평민이 일국의 북부대공녀에게 청소를 하라고 지시한 것쯤이 되겠다.
그리고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 봉투에다가 넣을까?"
"네. 카엔 님."
"이 그을린 유리병은? 따로 빼?"
"일단 그건 저쪽 테이블에 잠깐…. 그리고 목소리를 조금 낮추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응! 소곤소곤 말할게…!"
연구동 안의 수많은 시선들이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각오는 했다만 교수들의 의문 가득한 시선이 우리에게 쏟아지니 생각보다 부담스러웠다.
다행히도 '너희 무슨 관계니?' 같은 직접적인 질문은 없었지만 말이다.
마력으로 만들어낸 손과 함께 연구동을 반짝반짝하게 만들어가는 나.
허둥지둥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가 부탁한 것들을 모아오는 카엔.
새카만 싸구려 마스크에 감춰진 내 얼굴.
힐끔, 힐끔, 청소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만 내 쪽을 바라보는 카엔.
대강 이런 순서로 교수들의 시선이 몇 번 움직이더니, 잠깐의 관심 이후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어느 이름 모를 교수의 '핏덩이들이….' 라는 자그마한 속삭임 하나가 내 목덜미를 스친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다행히 카엔이 나랑 친하게 지내는데에 이상함을 느끼는 교수는 보이지 않았다.
귀족과 평민 사이인데.
그냥 그럴만한 나이의 아이들끼리 그럴만한 짓을 하고 있구나, 정도로 여기고 있는게 느껴진다.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더니, 그 정도로 이상한 모습은 아닌걸까?
아니면 카엔의 신분이 너무 높아서?
…아무래도 후자가 이유일 것 같다.
빗자루가 사락, 사락, 움직일수록.
해가 기울었다.
*
들쭉날쭉 뻗은 건물 사이로 붉은 석양이 절반 즈음 잠겼다.
땅거미가 어두컴컴하게 물들기 전, 마지막으로 붉게 타오른다.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굳이 안 도와주셔도 됐는데."
"괜찮아. 내가 도와주고 싶어서 도와준 거니까."
연구동 앞.
마스크를 벗은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동안 귀족들 앞에서 쌓아온 연기용 미소 절반.
거기에 진심 절반을 섞은 미소였다.
내가 감히 저 말 뒤에 숨은 뜻을 받아들여도 되는가는 일단 제쳐놓더라도, 분명 예쁜 말이었으니까.
내 얼굴을 본 카엔이 곧장 따라 웃었다.
나 같은 거짓 웃음보다 훨씬 더 화사한 미소가 노을을 받아 반짝였다.
"오늘 일정은 이걸로 끝?"
"…네."
"좋아."
카엔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에 유즈의 연구동을 들려야 한다는 말은 꺼낼 수 없었다.
아무리 유즈가 나를 가지고 연구한다는 걸 알고 있어도, 100% 수상하게 바라 볼 테니까.
최소한 같이 가자며 따라올 게 분명했다.
그러면 곤란하다.
"도와주신 건 감사한데, 해가 져버려서…."
"됐어. 됐어. 하루 쉰다고 뭐 죽는 것도 아니고."
"……."
"어차피 단순한 자세 연습 같은 건 해가 져도 할 수 있어. 대련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을 뿐이지. 게다가 백야는 지금 아프잖아?"
뒷짐을 진 채 먼저 한발 앞서 중앙 구역 쪽으로 걸어가는 카엔.
슬쩍 유즈의 연구동 방향을 바라본 나는 곧 그녀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맞췄다.
이럴땐 보통 남자가 여자의 집까지 배웅해주는 게 맞지 않나 싶지만….
신분의 차이도 있고, 켕기는 게 있다 보니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지그재그로 뻗어진 가파른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중앙 구역은 다른 구역보다 한 층 더 아래쪽에 묻히듯 생긴 구조였기에, 이미 한밤중처럼 깜깜했다.
그 탓에 자칫하면 발에 미처 치우지 못한 쓰레기 더미가 치일지도 모른다.
여러모로 데이트 코스로서는 최악의 장소다.
그렇게 계단을 밟던 카엔의 발이 중앙 구역에 닿았을 찰나.
"…오늘 말이야. 루크."
예쁜 목소리가 저녁 바람에 실렸다.
"내가 도와줘서 얼마나 빨리 끝난 것 같아?"
"…음……."
얼마나, 라.
그때그때 계산이 되는 영역이면 좋겠다만, 청소에 그런 게 어디 있겠어.
오늘 카엔이 한 일은 분리수거 정도가 전부다.
대충 계산해보자면 아마 평소보다 30분에서 1시간 정도 일찍 끝난 게 아닐까 싶다.
"방해는 안 됐지?"
하지만 이런 걸 물어보는 저의는 무척이나 뻔하다.
오늘 내가 너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느냐가 핵심 키워드.
살면서 처음으로 청소를 해보았을 카엔.
그녀의 기분을 위해서라도 조금 과장해서 답하는게 좋을 것 같다.
노을을 넘어 일몰.
힐끔 어두컴컴한 주홍빛의 하늘을 바라본 내가 조심스레 말했다.
"2시간쯤…?"
"정말?"
"확실하진 않지만요."
아직 눈에 익지 않은 어둠 속.
새카만 늑대 귀가 파르르 떨려왔다.
"그럼 내가 없었으면 완전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겠네?"
"아마 그랬을 것 같네요."
"고맙지?"
"고맙죠."
먼저 나온 감사인사조차 아닌, 생색 덩어리 고마움이다.
그것만으로도 기쁜지 배시시 웃는 미소가 밤 그림자에 가려진다.
"다음에도 또 도와줄까?"
"괜찮아요. 그러면 민폐잖아요."
"민폐 아니야! 내가 하고 싶어서 도와주는 거지."
"그래도…."
"게다가 내가 도와주면 자연스럽게 네가 수련할 시간도 늘어나잖아."
"그건… 그렇긴 하지만."
"그렇지?"
잠깐 말을 고르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안 돼.
네가 계속 옆에 붙어있으면 여기저기 들쑤시기 힘들어져.
따위의 대답을 할 배짱은 없었던 까닭이다.
나는 카엔의 마음을 대강 눈치채고 있다.
지금까지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이유가 사실은 서투른 관심의 표현이었다고.
카엔도 내가 야설 작가를 만나 무엇을 할지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이전에 사과만 받을 거라 둘러대긴 했지만, 자신을 범했던 것처럼 '진짜' 야설 작가도 범해지고 마리라고.
서로가 만족하는 합의점을 찾긴 힘들다.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카엔의 성 취향이 강간으로 교정되었다지만, 과연 그렇다고 해서 평소에도 내게 억지로 휘둘리고 싶을까?
…글쎄다. 지금 당연하다는 듯 나보다 몇 걸음 앞장서서 걸어나가는 카엔을 보니 그런 생각은 쏙 들어갔다.
"가자! 데려다 줄게."
일단 침대 밖에선 카엔의 비위를 맞추고,
침대 위에선 원하는 대로 대해주며 살살 구슬려보는 방법 말곤 없을 것 같다.
그나마 찾아낸 이 방법도 굉장히 현실성이 없다.
"뭐해? 빨리 와."
혼자 다섯 걸음 먼저 걸어나간 채로 나를 돌아보는 카엔.
네가 기숙사에 들어가는 걸 내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리겠다.
함부로 쏘다닐 생각하지 마라.
일단 지금 당장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느새 군청색으로 뒤덮이기 시작한 하늘.
나는 군말 없이 순순히 카엔의 뒤를 따랐다.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질수록.
해가 떨어졌다.
밤이 되었다.
****
오후 7시.
평소 루크였다면 진작 찾아왔을 시간이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진작 기숙사로 돌아갔을 시간이다.
루크는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따라 바쁜 모양이다.
연구동엔 오직 유즈가 톡, 톡, 펜으로 마기(魔記)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오후 8시.
고요히 타오르던 푸른 불꽃들이 불안하게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언제 오지……?"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유즈.
그녀의 손 안에서 빨간 알약 하나가 데구르르 굴러다녔다.
이성은 더 강하게 지워져 본성만이 남을 것이고, 기억을 지우는 효과도 제대로 작동되도록 새로이 재구성 해놓았다.
지금까지 이런 저런 트리거(Trigger)를 실험해보며 시약을 계속 제조했었지만, 일전에 '흥분하면' 이성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했었으니 그에 맞춰 배합식도 제대로 확정지었다.
이 시약을 준비해놓은 알약과 함께 씹어삼킨다면, 이번엔 저번같은 부끄러운 실수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이성을 잃게 된 루크에게서 '무엇을 가장 좋아하는지' 알 수 있을테니까.
그리고 그 동안의 기억은 모두 지워질테니까.
친구가 될 수 있다.
루크의 '첫' 친구가.
"……."
그렇다면 이리스는 더 이상 꼭 필요하지 않다.
이리스를 대신해 언제든지 필요할때마다 곁에 있어주는 친구가 생겼으니까.
게다가 자신이 첫 친구인 루크쪽에서 더 매달릴 게 분명했다.
절대 떠나지 말아달라 매달리는 친구라….
묘한 우월감.
흐헤, 바보같은 웃음소리가 짧게 새어나왔다.
그런 친구를 만들 수 있다면, 가슴 정도야 닳는 것도 아니니 얼마든지 주무르게 해줄 수 있다.
고작 이것 가지고 친구를 만들 수 있다면 싼 값 아닐까?
연구동을 밝히는 푸른 불꽃들은 지칠때까지 고요하게 타올랐다.
오후 9시.
연구동을 밝히던 불꽃이 희미한 수준까지 사그라들었다.
왜 아직까지 안 오지?
10시까지 오라고 약속해두긴 했지만, 매일 10시는커녕 5시나 6시즈음에 들려줬잖아.
설마 저번에 쌀쌀맞게 대해서 화났나?
유즈는 턱을 괸 채 남는 마기 위에다가 자신이 '좋은 친구' 로서 실수했던 것들을 하나씩 써보았다.
생각보다 양이 많다.
며칠전 알겠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성큼성큼 나가던 루크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다음 실험은 2일 뒤라 말했는데도 아무 대답이 없었던 것이 떠오른다.
그 차가운 모습 위에 갑작스럽게 아카데미를 떠나던 이리스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말을 조금 더 예쁘게 했어야 했는데.
차라리 저번에 캐물었을 때 이성을 건드리는 약이었다고 솔직히 말할걸.
그런 뒤에 그 동안 속여서 미안하다며 용서라도 구하고….
아니, 아니야.
남을 속인 사람이랑 어떻게 친구가 되겠어. 들키면 안 돼. 이게 맞아.
루크의 본성만 남겨놓은 채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내야 해.
이것 말곤 방법이 없어.
"……루크."
작은 한숨.
펜을 놓아버린 유즈는 아예 몸을 돌리고는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