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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님?"
똑똑, 몇 번의 노크 소리가 더 울려 퍼졌음에도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뭐지.
제대로 안에 있으면서도 호다닥 문을 잠그고 대답하지 않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애초에 교회 주변을 청소해달라 부탁할만한 사람은 성녀밖에 없다.
게다가 아직 의뭉스러운 점이 남았다지만, 나름 '야설 작가를 찾아내 벌을 내리자!' 라는 부끄러운 목적을 함께하는 동료 사이인데.
결과는 쓸쓸한 문전박대.
"으음…."
문앞에 선 나는 예상 밖의 대우에 뒷목을 긁적였다.
이유가 뭘까. 내가 잘못한 거라도 있을까.
목덜미를 스치는 싸구려 장갑의 거칠거칠한 감각이 익숙해졌을 무렵,
확신없는 이유 하나가 머릿속에 툭 떠올랐다.
정작 내가 떠올려놓고도 설마설마 싶다.
어젯밤 백야 때문에 평소처럼 늦은 밤까지 말상대를 해주지 못하고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성녀(性女)답게 야한 이야기만 입에 담는 성녀라지만, 최근 들어 잠옷이나 말투 같은 사소한 부분에서 어린아이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잦기도 하고.
그렇기에 나오는 결론.
내가 안 놀아줘서 토라진 걸지도 모른다.
"…성녀님."
─똑똑
설마 정말 그러겠어.
라고 다른 이유를 찾아보려 했건만, 조금 더 생각해보니 그렇게까지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성녀는 아주 가끔 교수를 만날 때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교회에 콕 틀어박혀 지낸다.
도대체 왜 아카데미에 입학했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오랜 시간을.
그 동안 취미인 차나 끓이며 나와 이야기하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아카데미 구석구석을 뽈뽈뽈 돌아다니며 내게 엉겨붙는 카엔과는 정반대.
이렇게보니 내 앞에서 보여주던 재잘재잘 발랄한 모습과 달리, 방구석에 콕 틀어박힌 유즈와 꽤나 닮아있었다.
성녀를 처음 보았을 때의 조용한 눈동자가 문득 떠올랐다.
"성녀님, 그…."
뭐라 말을 꺼내보려던 나는 그 상태로 침음을 삼켰다.
그래. 다 좋은데.
이제 어쩌지.
어젯밤 일찍 돌아가서 죄송하다고 운을 띄워야 하나?
만약 이것 때문에 문을 잠근 게 아니라면, 오히려 상처를 들쑤시는 발언이 될 텐데.
…그냥 조용히 청소나 하러 갈까.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내렸던 마스크를 살풋 붙잡고 고민하던 그때.
다행히 잠잠하던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왜 오신 거죠?"
무척이나 여린 목소리였다.
평소 나와 이야기할 때의 끈적끈적하고 장난스럽고 야릇한 목소리가 아닌.
단어 그대로의 소녀다운 목소리.
이 목소리를 알고 있다.
성녀와 처음 이야기를 나누어보았을 때의 목소리였다.
반가워요.
오늘도 많이 다치셨네요.
곧 괜찮아질 거에요.
수고하셨어요.
그런 딱딱한 인사를 건네줄 때나 들려주던 목소리가 참 오랜만에 문 너머에서 조심스레 울려 퍼진다.
"일정이 있어서 찾아온 김에 인사차 들렀습니다."
"일정? 일정… 일정…. 아, 혹시 나뭇가지…."
"네. 그거요."
"그… 분명 저는 오늘이 아니라 내일 낮이라고 정확히 말해놨었는데요…."
"내일 낮이요?"
의뢰자. 행정담당관. 나.
의뢰자에게 직접 전달받는 게 아니라 하나의 중간단계를 거치다 보니, 그 와중에 누락된 부분이 있는 모양이다.
생각보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당장 2주 전쯤에도 연구동 청소와 관련해서 비슷한 일이 있었으니까.
뭐, 굳이 나뭇가지 정리 따위를 꼭 시간을 정해서 해야 하는가는 의문이었지만.
일단 대충 납득하기로 했다.
쓸데없는걸로 고민해봐야 머리만 아프다.
"알겠습니다. 성녀님. 그럼 내일 다시 오면 될까요?"
"…아뇨, 아뇨! 기왕 들리신 김에 잠시만…."
우물쭈물, 그리고 나긋나긋하던 조금 전에 비해 무척이나 급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후, 하, 후, 하, 장난스러운 심호흡 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달칵, 잠겼던 문고리가 열리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이윽고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문에 주먹 하나가 드나들 만한 작은 틈새가 생긴다.
그 사이로 빼꼼 보이는 것은.
"이, 이야기나 좀 할까요? 차… 마시면서…."
얼굴 반쪽.
시리도록 푸른 빙하 색 눈동자 하나.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건지 이곳저곳이 헝클어진 잿빛 앞머리.
마지막으로 뺨에 옅은 홍조가 남은,
성녀.
"……."
그리고 별개의 이야기인데.
열린 문틈 사이로 그 맛없는 찻잎의 향기가 가득 풍겨 나왔다.
냄새를 들이키자마자 삥한 감각과 함께 이마가 지끈거렸다.
독하다.
나도 모르게 감히 귀족의 앞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말 정도로.
아무리 좋은 향기의 향수라도 겹겹이 뿌리면 지독해지는 것처럼, 몸이 거부하는 향기였다.
게다가 이 익숙한 감각.
머리 안쪽 어딘가가 새카맣게 변하는듯한 이 오묘한 감각.
이것과 비슷한 감각을 최근에 느껴본 것 같은데…. 모르겠다.
향기 때문에 사고가 느릿해지는 기분이다.
몸에 좋은 차라고 하더니, 성녀도 자주 마시는 걸까?
조금 전부터 계속 마스크를 쥐고 있었던 나는, 나도 모르게 코 위에다 마스크를 올려썼다.
콧속에 가득 들어차 맴돌던 찻잎 냄새가 천천히 무뎌져 간다.
나를 지켜보던 성녀의 눈동자에 아쉬움이 스친다.
"지금, 요?"
"…네. 지금."
"죄송합니다. 바빠서… 힘들 것 같네요."
"…바빠요?"
"아직 연구동 청소도 남아 있고, 오늘은 유즈 님도 뵈러 가야 해서."
"그렇구나."
허심탄회한 목소리와 함께 천천히 시선을 떨어뜨리는 성녀.
기대감을 담아 예쁘게 빛나던 빙하 위에 시무룩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상하다.
저렇게나 감정을 솔직하게 겉으로 드러내는 여인이었나.
어째 지금의 성녀는, 귀와 꼬리를 이리저리 시끄럽게 움직여대는 카엔보다 더 알아보기 쉬운 것 같다.
"오늘 밤은… 요?"
취소.
못 알아 듣겠다.
"…글쎄요."
이야기.
이야기 말하는 거겠지.
도대체 왜 자꾸 천박한 단어가 머릿속을 가득 채울 기세로 미친 듯이 떠오르는 걸까.
굳이 이야기 하나 하자고 밤에 불려 나가긴 싫다.
요새 피곤한 일이 많아서 그냥 푹 자고 싶다.
그렇게 솔직하게 답할 순 없으니 '적당한' 말로 둘러댔다.
"피곤해서, 안 될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오기 귀찮아요."
라고.
벽에 팔을 짚은 채.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마스크 속에 남은 찻잎 향기를 삼키고.
살짝 풀린 성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요? 연구동 청소를 끝내고 나면, 유즈 님을 책에 적혀있는 대로 퍽… 퍽… 실신할 때까지 범한 뒤, 밤에는 일정이 없을 거잖아요…."
"…글쎄요."
조금 전과 마찬가지의 대답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혀 끝이 마른다.
혀 밑이 축축하다.
이마가 뜨겁다.
성녀의 얼굴이 점차 가까워진다.
꼴깍, 입술을 모으며 침을 삼키는 성녀.
주먹 하나가 한계였던 문 틈이 서서히 벌어진다.
하얀 목.
하얀 팔.
하얀 손.
급하게 입은 듯 흐트러진 성녀복.
어깨너머로 보이는 구깃구깃한 침대 시트.
그 위에 놓인 참 안 어울리는 녹색의 기다란 수건 하나.
테이블 위에 놓인 조그마한 찻주전자.
따뜻함을 과시하듯 그 위로 서서히 피어오르는 옅은 김.
후우, 한숨을 내쉰다.
내뱉어진 한숨은 마스크를 벗어나지 못했다.
빠져나가지 못 한 자극적인 향기가 조용히 맴돈다.
지금 마스크를 내리면,
이 독한 향기를 '뱉어낼' 수 있을 것 같아.
"오늘 밤 저랑 놀아요. 루크. …제대로 준비해 놓을 테니까요."
평소보다 훨씬 더 온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놀다' 에 담겨있는 수많은 뜻 중 단 몇 가지 뜻만이 뇌리에 쿡, 박힌다.
눈에 담긴 빙하가 눈꺼풀 뒤로 넘어갈 때까지.
이미 헝클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차분해질 때까지.
놀고 싶다.
그때였다.
"루크!"
쾅, 문이 열리고.
밝고 활기찬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도와주러 왔어! 교회 청소 해야 해? 이번엔 대빗자루 쓰는 법도 확실히 배워왔으니까, 도움이 될 거야."
"……."
"이건 그냥 빗자루랑 다르게 푹, 푹, 대각선으로 찌르듯이 밀어야 잘 쓸린다며? 이론은 완벽해. 응."
"……."
"아. 그러고 보니 여기서 해도 되나? 키아라가 분명 실내에서는 쓰지 말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목소리의 주인공은 카엔이었다.
자주 보던 딱딱한 제복은 어디 가고 또 가벼운 후드티 차림이었다.
나를 도와 청소하려고 저런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온 걸까?
아니면 저번에 나와 섹스하며 옷을 망가뜨린 뒤 메이드에게 혼난 걸까?
다른 귀족이라면 당연히 전자였겠지만, 카엔이니까 왠지 후자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저런 게 아니다.
그냥, 눈앞에 있는 성녀를….
"그런데 거기서 뭐 해?"
"……."
문은 어느새 닫혀 있었다.
무심코 문고리를 돌려봤지만, 잠기기라도 한 듯 덜걱거리는 소리만이 몇 번이고 귀를 두드렸다.
딱, 하는 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문도 제대로 못 여는 바보냐고 놀리며 대빗자루로 가볍게 내 머리를 두드리는 카엔.
깜빡, 깜빡, 눈꺼풀을 움직이던 나는 카엔 쪽에서 킁킁거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곧장 그녀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
봄바람에 살랑이는 푸른 숲.
봄바람에 날리는 새카만 머리카락.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꺄르르 웃는 소리가 교회 앞에서 울려 퍼졌다.
결국 나는 카엔과 함께 교회 주변에 굴러다니는 나뭇가지를 정리했다.
내일 하라는 말이 있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교회 안쪽부터 청소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묻길래, 나는 이미 거의 다 끝난 상태였다고 둘러댔고, 카엔은 해맑게 웃었다.
정황상 성녀가 교회에서 사는 것까진 모르는 모양이다.
그냥 저 조그마한 방은 날 치료하기 위해 있는 방 정도로 여기고 있나 보다.
만약 카엔이 방 안에 성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더라면….
"그런데 이게 끝이야?"
"아마도요."
내가 건네준 장갑을 낀 채 양손 가득 나뭇가지를 쥔 카엔.
그녀는 저 멀리 나뭇가지를 던져버리고 오겠다며 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미리 나뭇가지를 담을 쓰레기봉투를 보여줬어야 하는데.
실수였다.
"……."
카엔의 꼬리를 바라보던 시선이 교회를 향했다.
나는 아마도 지금 성녀가 숨죽이고 있을 방의 창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따사로운 햇살이 창문에 번진다.
성녀가 그런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첫만남때는 조용했다.
두 번째 만남부터는 딱히 기억에 남아있지 않았다.
인사를 나누고.
치료를 받고.
헤어졌다.
이따금씩 잡담을 나눈 것 같기도 한데, 대단한 내용은 없었기에 오려낸 것처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날부터 그녀는 먼저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가장 첫 섹드립이 아마…. 정액은 뜨거운가요? 따뜻한가요? 였었나.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오길래, 네? 하고 되물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이후 관능 소설에서 그런 문장을 읽었다며 조목조목 덧붙이긴 했지만….
…조목조목이 맞았던가.
애초에 그런 말을 덧붙이긴 했던가.
잘 모르겠다.
나처럼 찬장에 가득 감자를 쟁여놓지 않는 이상, 당장 3일 전 먹었던 음식도 잊어버리는 게 사람이다.
다만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색깔.
그때만큼은 분명.
아무렇지 않게 이상한 말을 뱉는 지금의 모습과 달리.
부끄럽다는듯이.
귀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차를 끓여오기 시작했던 것도 아마 그때 즈음부터….
"별거 아니네!"
멀찍이 나뭇가지를 버려두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카엔.
1분도 안 되어서 다 끝났다며 혹시 청소에 재능 있는 거 아닐까, 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카엔은 풍성한 꼬리를 양옆으로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또 해야 할 곳 있어?"
"오늘은 이제 한 군데만 남아있긴 한데…."
"도와줄게. 나 오늘은 시간 많아!"
"음. 지금 교수님들이랑 대련하고 있으실 시간 아닌가요? 백야 님도 그렇고."
완곡한 거절이었다.
곧 있으면 유즈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카엔을 데려갈 순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갑작스러운 성녀의 변화도 신경 쓰였다.
거기에 어젯밤 내게 강간당할 뻔 했다가 도망친 백야도 있다.
…생각해보니 카엔 빼고 모두 문제였다.
"괜찮대도. 나중에 해도 돼."
"하지만…."
"어허. 어딜 감히 평민이 토를 달아."
쿡, 카엔이 챙겨온 대빗자루가 배꼽을 찔러왔다.
깨지기 쉬운 물건을 건드리듯 부드러웠다.
"밤이 되면 곤란하잖아요."
"그 전에 끝내면 돼. 아니, 그보다 해야 할게 그렇게 많아?"
"가끔은 그렇죠."
"오늘도?"
"오늘은 아마 저녁 즈음 끝날 것 같네요."
"그럼 더더욱 내가 도와줘야지. 너도 빨리 쉬고 싶을 거 아냐."
반박은 받지 않겠다는 듯 팔짱을 낀 카엔은 그 상태 그대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집요하다.
아무래도 저번에 같이 욕실을 쓴 뒤, 기어코 작가를 찾을 거라 말해서 이러는 모양이다.
왠지 카엔 자신을 제외한 다른 여자와 대화할 수 없도록 목줄을 꽉 쥐려는 느낌.
…유즈의 연구동은 나중에 몰래 찾아가면 괜찮으려나.
저번에 일이 늦어서 해가 진 뒤에 찾아가니까 굉장히 차가워지던데.
괜찮겠지.
유즈가 작가라면 그것도 다 연기일 테니까.
결국 고개를 끄덕여주자, 조금씩 낮아지던 늑대 귀가 쫑긋 솟구친다.
밝은 색채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었다.
"어디로 가면 돼? 아니, 그보다 우리 점심부터 먹을까? 어제 고기가 많이 들어왔는데……."
구이가 어쩌니, 조림이 어쩌니, 튀김이 어쩌니,
먼저 앞장서서 걸어나가는 카엔.
나뭇가지가 버려진 곳을 대충 기억해놓은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백야 님은 괜찮으실까요?"
"백야? 왜?"
"평소 두 분이서 같이 연습할 때가 잦으시니까요. 카엔 님이 이렇게 쉬어도 괜찮나요?"
"응. 괜찮아."
카엔은 끄응, 기지개를 켜며 말을 이었다.
"걔 오늘 저택에서 안 나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