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유난히 찌뿌등한 아침.
천천히 눈을 뜬 나는 크루아상처럼 두른 이불 속에서 누런 벽지를 마주했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눈꺼풀도 무척이나 무겁다.
이유는 단순했다.
어젯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 늦게 잠든 탓이다.
지금 상황으로선 유즈가 야설 작가일 확률이 가장 높다, 라는 대전제는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았지만.
신경쓰이는 게 한 가지 늘었으니까.
쿵, 가볍게 벽에 머리를 부딪쳐 잠을 깨운 나는 몸을 돌려 벽에서 멀어졌다.
그리고는 '설마 이래놓고 꿈은 아니겠지' 따위의 감정을 담아 어젯밤 지켜보았던 부분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흰색이라기엔 우윳빛에 조금 더 가까운 침대 시트.
그 위의 동전 크기만 한 옅은 얼룩이 좋은 아침, 이라며 나를 반겼다.
착잡한 감정에 잠이 좀 깬다.
나는 침대에다가 무언가를 흘린 기억이 없다.
그렇다는 것은 곧, 이 방을 방문한 누군가가 저기에 얼룩을 남기고 말았다는 뜻.
"……."
카엔.
혹은.
백야.
당연히 카엔일리는 없고.
도서관에서 '성교육'을 해주겠답시고 앉았다가, 내게 어깨를 주물러지며 흠칫 거리던 백야.
어젯밤 이성의 끈을 놓은 내게 가볍게 손찌검을 당하자, 그때보다 훨씬 더 몸을 움찔거리던 백야.
가슴을 쥐고 놀기 시작하니 머리를 뉘고 있던 내 허벅지에다가 자꾸만 뜨겁고 축축한 한숨을 뱉어내던 백야.
언제나 한결같은 무표정을 담고 있던 여인이, 내 품에서 무너지고 망가져 가는 모습 세 가지가 방금 잠을 깬 뇌리를 따라 몇 번이고 반복 재생된다.
"…."
하지만.
백야가 작가라기엔 어젯밤 일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그때만큼 몸을 섞기 좋은 타이밍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억지로 나를 홀린 것도 아니고 알아서 혼자 날뛰고 있으니, '그러지 마세요. 강간당하기 싫어요.' 따위의 분위기를 잡은 채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곧장 노트에 적어 놓았던 꿈을 이뤘을 것이다.
새벽녘에 내린 결론은 한숨 자고 일어난 지금 다시 찬찬히 되짚어 보아도 별다른 오점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되면 결론이 '백야는 야설 작가' 보다 조금 더 이상한 곳으로 흘러간다.
백야는 그냥 몸이 좀 많이 민감한 여인일 뿐이라고.
"끄응…."
어이가 없네.
말이 되나?
평소 그렇게나 무뚝뚝한 여인이 유독 성감대만 민감하다?
아니지. 도서관에서 건드렸던 어깨는 성감대조차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곧 몸 전체가 민감하다는 뜻이나 다름없게 되는데….
백야가 남들 몰래 내게 강간당하는 소설을 썼을 확률.
백야가 몸 어딜 만져도 느껴버릴 만큼 민감한 육체를 가지고 있을 확률.
둘 중 어디의 확률이 더 높을지 재어보던 나는 이내 계산을 포기했다.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어.
"…몰라."
의심스러운 것은 많고,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가장 처음 노트를 주웠을 때 카엔을 범인이라 생각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답답하다.
마음 같아선 그녀들 모두를 내 앞에 일렬로 세워놓고 누가 작가냐고, 손을 들어보라 시키고 싶다.
결국엔 또 '강간당하고 싶어서 모른 척하겠지' 라는 끊임없는 딜레마가 동시에 찾아온다.
평민인 내가 그녀들을 불러모은다는 발상 자체도 문제였지만 말이다.
"미친년…."
소설 속에 써놓았던 프롤로그처럼 날 열받게 하려고 이런 작전을 세운 거겠지.
머리는 잘 썼다.
시계를 보니 평소보다 분침이 반 바퀴즈음 더 흘러가 있었다.
아침부터 백야를 떠올리며 늦장을 부렸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충 이불을 벗어 던진 나는 책상 위 탁상 달력을 주워들었다.
내 기억상 요 며칠간 특별한 일정은 없다.
하나 확실한 것은 어제 저녁 몇몇 가문의 몸종들이 잠시 아카데미에 들를 예정이었으니, 포탈 청소 하나가 있을 거라는 것 정도?
작게 하품을 한 나는 슬며시 달력을 읽어보았다.
「폭렬 마법 학술회 연구동 청소」
「교회 옆 나뭇가지 정리」
「포탈 청소」
「결전의 날」
"아. 맞다."
일단 포탈 청소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으니 그렇다 치고.
그 위에 적힌 '나뭇가지 정리'를 본 내 입에서 짧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래. 저런 게 있었지.
저 의미 모를 나뭇가지 정리가 오늘이었구나.
고작 나뭇가지 정리를 시키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일정을 전해 들을 때 조금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의뢰를 내건 사람은 아마도 성녀.
물론 나야 보수를 받으니 좋긴 한데….
고작 저런 일로 돈을 쓰긴 좀 아깝지 않나.
모르겠다.
돈 많은 사람들 생각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아무튼간 오늘의 일정은 청소, 청소, 청소.
그리고, 결전의 날.
"……."
유즈 베르나.
지금 아카데미에 남은 용의자는 그녀뿐.
나는 대충 옷을 벗어 던지며 욕실로 향했다.
****
르페아스 아카데미.
성운부유석이라는 광석을 기반으로 한 최초이자 마지막 공중요새.
신의 축복을 받은 소수를 위해 여러 국가가 합심해서 세운 전 세계 단 하나의 아카데미.
어느 한 국가에 소속된 게 아닌, 범세계적 기관… 이라든가.
딱히 알고 싶지 않은 이런저런 이야기가 참 많지만, 소시민인 내게 와닿는 이야기는 그런 게 아니었다.
365일 공중에 둥실둥실 띄워놓은 탓에, 사람이든, 물건이든, 무언가를 들이거나 내보내려면 꼭 포탈을 거쳐야 한다는 것.
게다가 학생에다가 교수까지 포함하면 내부 인원이 꽤 되기 때문에 포탈을 이용할 땐 대부분 대량의 물건이 한꺼번에 드나든다는 것.
그리고 대량의 물건 뒤엔, 그것을 옮길 대량의 사람과 동물 따위가 따라붙는다는 것.
그렇기에.
"씨…."
그들이 한 번씩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자연스레 포탈 주위가 엉망진창이 되곤 한다는 것.
"돗자리 펴고 나들이 나온 것도 아니고, 뭔 놈의 쓰레기가…."
귀족들의 거주지인 서쪽 구역.
그 가장 깊숙한 곳의 몇 발자국 안 되는 짧다란 동굴 안.
높이는 5m쯤 될까.
작동을 멈춘 채 스산한 푸른 빛을 내뿜는 돌덩이 주변엔 쓰레기가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마차를 이끌던 말이 푸짐하게 싸지른 것으로 추측되는 저 덩어리들은 물론이고.
실수로 잃어버린 것으로 보이는 동전.
간식거리용으로 싸들고 왔는지, 심지만 남아 굴러다니는 과일 쓰레기들.
약속했다는 듯이 꼭 한두 개 즈음은 보이는 고장 난 마차 바퀴.
거기에 곳곳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저 유리 조각들까지.
청소할 때 가장 유심히 살펴야 할 것을 꼽자면 당연히 저 유리 조각들이다.
대부분의 경우 가문의 상징을 단 휘황찬란한 마차를 끌고 온다지만, 간혹 마차 없이 맨몸으로 방문하기도 하니까.
그러면 그 누군가가 다칠 수도 있다.
"으…."
말똥까진 그렇다 쳐도, 나머지들은 좀 아니지 않나.
다들 이름있는 가문에 소속된 몸종들이라지만, 워낙 사람이 많다 보니 '이 많은 인원 중에 범인을 어떻게 찾겠어.' 같은 마인드가 탑재되어 있는 모양이다.
내가 입학하기 전 관리를 맡고 있었던 사람도 이런 풍경을 보며 쌍욕을 내뱉었겠지.
마스크에 덮인 콧대 옆을 꾹꾹 짓눌러 빈틈을 없앤 나는 빠르게 하나둘 쓰레기를 치워나갔다.
.
.
.
약 20분경과.
이곳저곳에 굴러다니는 쓰레기를 열심히 치워가던 와중.
쓰레기를 줍던 집게 끝에, 무척이나 생소한 물건 하나가 걸려들었다.
"뭐야 이건 또."
엄청 대단한 건 아니고.
콘돔이었다.
정확히는 콘돔 한 통.
"이게 도대체 왜 여기…."
설마 시발.
사람 많을 때 몰래 마차 안에서 야외섹스라도 했나.
새카맣고 네모난 통.
그 겉면에 금박으로 큼지막하게 적힌 'XXL' 따위의 글자를 바라보던 나는 생각외의 묵직함에 그것을 슬쩍 흔들어 보았다.
분명 한껏 숨을 죽인 채 저지른 야외섹스의 결과물일 거란 예상과 달리, 뜯지도 않은 새 제품이었다.
뭐…. 하지만 지금껏 쓰레기 사이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보니 무척이나 더럽다.
"으…."
몸종 중 누군가의 물건일까?
아니면 가끔 같이 따라 들어오는 행상인의 것?
하지만 여자뿐인 아카데미에 콘돔을 팔기 위해 들렀을 린 없고….
아마 누군가의 주머니 속에 꾹 쑤셔 박혀 있던 콘돔이 데구르르 빠져나왔나 보다.
성욕덩어리구만.
끌끌 혀를 찬 나는 쓰레기봉투 안에 콘돔을 집어넣었다.
****
쉴 시간은 없다.
해가 중천을 지나기도 전에 포탈 주변 청소를 끝마친 나는 곧장 남쪽 구역으로 향했다.
나뭇가지 정리라니, 도대체 뭐가 필요할지 몰라서 일단은 장갑만 챙겨오긴 했다만.
사브작, 사브작, 흙길을 걸으며 보이는 것은 언제나처럼 드높게 뻗은 고목뿐이었다.
며칠전 내린 소나기 때문에 나뭇가지가 꺾이기라도 했나 싶었더니 딱히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뇌우가 쏟아져 내린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바닥에 쌓인 건 오직 부드러웃 나뭇잎뿐이었다.
나뭇잎을 나뭇가지라고 잘못 쓴 걸까?
그러면 오히려 더 좋지.
도서관을 지나 저 멀리.
오직 성녀를 위해 지어진 작은 교회의 새하얀 벽면이 시선에 들어왔다.
역시나 그 주변에도 나뭇가지는 몇 개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열댓 개 정도.
다른 곳보다는 비교적 많긴 하나 아무튼 눈으로 대충 셀 수 있을 정도의 양이다.
설마 저거 하나 치우기 귀찮아서 날 시킨 건가.
저번에 교회에서 살면 제단까지 몇 걸음 안 된다며 기뻐하던 성녀를 떠올리니,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만 끝나면 곧장 연구동 청소를 끝낸 뒤, 유즈를 만나러 가면 될듯하다.
혹여 냄새가 날까 싶어 킁킁 앞섶을 당겨 냄새를 맡아본 나는 교회 안쪽에 마련된 조그마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성녀 님?"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대신 언제나 그렇듯 자극적인 찻잎 냄새가 나를 반겼다.
"계십니까?"
한번더 목소리를 내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낮에 교회를 방문한 건 처음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들릴 일은 거의 없고, 교회를 들리는 날은 언제나 대련 시간이 있는 날 뿐이었으니까.
짧은 복도를 지난 나는 조그마한 거실에 서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찻잎 냄새가 풍기는 걸로 보아 얼마 전까진 있었던 모양인데,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혹시 낮잠이라도 주무시고 계신 것은 아닐까, 아주 살짝 침실 문을 열어보려 하던 그 때.
"……아…."
평소 내가 치료받던 방 안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루…… 미안…. …해……."
뭐라 말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너무 작아서 뭐라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잘못해……. 잘못…."
잘…?
잘 까진 어떻게든 들었다만 그 뒤는 역시나 오리무중.
바쁘신가?
노크만 해볼까?
크흠, 헛기침을 한 나는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성녀님? 바쁘신가요?"
쿠당탕, 무언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
이윽고 땅을 박차는 소리가 멀찍이서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마지막으로.
찰칵, 문을 잠그는 소리가 마침표를 찍었다.
"……? 성녀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