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달칵
새카만 흑야.
오늘따라 유독 엷은 달빛만이 커튼 사이를 파고들어 음침하게 반짝였다.
조용히 침실에 들어간 백야는 가장 먼저 문부터 잠갔다.
다음으론, 꽉 닫힌 미닫이문 사이에 대각선으로 검 한 자루를 끼워 넣었다.
문득 떠오른 '그간 몰랐는데 잠금장치가 있긴 있었구나' 따위의 감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이제 가벼운 손짓 정도론 절대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 누구도 절대 알 수 없다는 것.
두근거리는 심장을 꾹, 잠재운 백야는 몇 번이고 그 사실을 확인했다.
─툭, 툭, 툭.
달빛에는 소리가 없다.
오직 달빛으로 가득한 침실은 무척이나 어둡고 고요했다.
그 때문에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백야의 귀에는 무척이나 크게 들렸다.
가령 저택 안 어딘가에서 하녀가 간질간질한 재채기를 내뱉는 소리라든가.
그 소리를 통해 대충 그녀가 어디 있을지 짐작한 백야의 꼴깍, 침을 삼키는 소리라든가.
─풀썩
결심을 마친 누군가가 침대 위에 풀썩, 쓰러지는 소리까지도.
무척이나 크게.
"하으……."
꾹 짓눌린 가슴이 답답하다.
이대로 힘껏 숨을 들이마시면 분명 호흡기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걱정 대신, 여전히 푹신푹신한 침대에 얼굴을 파묻은 채 혼잣말을 뱉어내는 백야.
"어째서… 왜……. 도대체 이까짓게 뭐길래……."
평소 저택에 돌아온 백야의 루틴은 옷을 갈아입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연무장에 한참 동안 틀어박혀 있을 때 생긴 하나의 습관이었다.
당시엔 하루 일과가 끝나면 도복이 피나 땀, 가끔은 위액 따위로 잔뜩 젖어있는 게 일상이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옷을 그대로 입은 채.
어색한 손놀림으로 문을 잠그고.
힘을 주어도 열리지 않는지 몇 번이고 확인한 뒤.
침대에 쓰러져.
아무도 듣지 못할 혼잣말을 뱉고는.
조심스럽게.
"…."
손을 밑으로 내렸다.
****
새빨간 단풍이 폭죽처럼 하늘을 물들이는 밤.
한 방에 모인 백야, 백서 남매는 책을 펼쳤다.
"……."
"오."
책을 펼치자마자 보이는 것은 '첫날밤 지침서' 라는 단어이다.
그 밖에 다른 특징을 꼽자면, 백야의 앞에 놓인 것은 20페이지가 될까 싶을 정도로 얇고,
반대로 백서의 앞에 놓인 것은 장편 소설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상하리만치 두껍다.
둘 중 누군가가 책을 잘못 가져왔기 때문이 아니다.
심심함을 계기로 남매의 성교육 교사를 자처한 어머니가 그렇게 지시했기 때문이지.
처음 백야는 그 이유가 뭔지 잘 몰랐었지만, 어머니의 설명 덕분에 금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너야 뭐, 내 딸이니 중요한 것만 가르쳐놓으면 알아서 잘할 테고.
백서는 어른이 될 때까지는커녕, 당장 내일이라도 어느 가문 딸내미와 사고 칠게 뻔하니까 세세한 것들까지 확실하게 가르쳐놓아야 한다고.
거기에 저 두꺼운 교재는 어머니가 직접 장장 200시간 즈음을 투자한 책이라 덧붙이셨다.
하기사, 동생은 천방지축이란 표현이 딱 어울리는 남자아이였으니까.
알아서 잘할 거라는 말이 내심 기분 좋았지만, 백야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무표정과 함께 책을 읽었다.
연인이 가져야 할 마음.
성교를 하는 이유.
아이를 가지기 위해 신경 써야 할 것들.
좋은 아내로서의 마음가짐.
그리고.
번외.
피임기구를 쓰는 요령.
그리고 뒤에 뭐가 더 있긴 한데….
"……."
굳이 번외라고 따로 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아니, 애초에 작성할 필요가 없지 않나.
그런 데엔 딱히 관심 없는데 말이다.
그저 아이를 가지기 위한 지식 하나면 충분하다.
첫날밤 남편의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 같은 모습을 보였다간 시간을 한참 잡아먹지 않겠는가.
슬쩍 어머니를 바라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어머니 특유의 환한 미소뿐이었다.
…그냥 앞부분 '좋은 아내로서의 마음가짐' 까지만 반복해서 읽어야겠다.
어차피 뒷부분 내용이야 뻔했다.
그렇게 책장 넘어가는 소리만 울려 퍼지던 것도 잠시.
눈썹을 씰룩거리며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백서는.
"그림도 그려져 있네요?"
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림?
자그마한 궁금증이 생긴 백야는 동생을 따라 팔락팔락 페이지를 넘겨보았으나 번외편에도 그림 같은 건 하나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오직 딱딱한 활자뿐이다.
동생쪽을 신경 쓰느라 여긴 어느 정도 타협을 본 걸까?
이해는 된다만, 어머니의 정성이 덜 담겨있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쉬웠다.
"그래. 직접 그렸어. 이해하기 쉬우라고."
"이건 굳이 없어도 될 것 같은데…."
"무슨 뜻이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래도 책이 무척 얇다 보니,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갈 즈음엔 이미 책의 마지막 페이지였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번외 편 바로 앞.
중간 즈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혹시라도 놓쳤을까 싶었던 어머니의 그림은 마지막까지 볼 수 없었다.
시무룩해진 백야.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저 멀리 떨어져 앉아있던 백서가 또 한 번 입을 열었다.
"어머니. 책에 오류가 있는데요."
"오류?"
"제 경험상 빼는 건 별로 안 좋아하더라고요. 다들 하나같이 안에다가…."
빼는 건?
안에?
곧장 이해하기 힘든 목소리가 흘러나오던 와중, 비명 소리와 함께 공기 찢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별건 아니고, 어머니가 회초리를 휘두르는 소리였다.
백야는 잠시 그 광경을 바라보다가 책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늘상 있는 풍경이었기에 딱히 놀랍진 않았다.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백서의 마지막 유언.
빼는 건 안 좋아한다라.
다들 하나같이 안에다가… 라고 했던 것은, 맥락상 바깥보다 안에다가 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뜻이겠지.
…아하.
아까 두 번째 페이지 즈음에 적혀있던 질내사정 이야기인가보다.
백서가 미처 끝맺지 못한 말을 대충 해석해낸 백야는 다시 질내사정이 적혀있던 페이지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책 속에는 질내사정시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뿐, 기분이 좋다는 이야기는 조금도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도 뭐, 삶의 목적이 '가문은 누나에게 맡기고 자신은 마음대로 산다'인 백서니까 아예 틀린 정보는 아닐 것이다.
조금 더 생각해보니 출산의 고통은 자주 들어보았어도 임신의 고통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좋긴 한가 보구나.
대충 이해한 백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언젠가 누군가와 혼인을 맺어 첫날밤을 보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터.
"잠깐, 어머니, 그러니까, 콘돔을, 끼우고…!"
백야는 살려달라고 나뒹구는 동생과 아직까지도 회초리를 휘두르는 어머니를 보다가, 처음부터 다시 책을 읽어내렸다.
그리고는 번외 앞에서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별로 안 궁금하니까.
필요 없으니까.
****
이 행위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침대에 폭 얼굴을 파묻어 눈앞이 새카맣게 물든 채 자꾸만 먼지를 들이마시는 백야.
그녀의 머릿속으로 글자 조합 하나가 천천히 흘러갔다.
"응…. 으극…."
혼자 하는 애무.
그리 떠올린 직후, 조금 전 루크가 꽉 쥐어주었던 엉덩이를 직접 쥐어보고서는,
혼자 하는 애무.
그리 떠올린 직후, 조금 전 루크가 버릇없이 가볍게 두드렸던 엉덩이에 직접 손찌검을 한 뒤,
혼자 하는 애무.
라고.
피부에 손길이 닿을 때마다 타닥, 타닥, 스파크가 튀는 듯한 머릿속으로 똑같은 단어 조합 하나가 몇 번이고 피어났다.
"헥, 헤엑…. 흐급…."
고작해야 엉덩이에 손이 닿았을 뿐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신기한' 기분이 드는 걸까?
백야는 열심히 숨을 몰아쉬며 루크의 손길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이렇게 했던가.
여기서 조금 더 강하게 쥐었던가.
쥔다기보단 거의 훑는 것에 가까웠던 손놀림은, 몇 분 새 끈적하고 집요하게 달라붙는 손놀림으로 바뀌었다.
루크가 했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가볍게 부딪히던 손바닥은, 몇 분 새 짜악, 하고 제법 큰 소리를 냈다가 허공으로 도망쳤다.
시작한지 1분쯤 지났을 무렵 이대로는 자국이 남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 꺼내왔던 수건 위로 투명한 액체가 뚝, 뚝, 떨어졌다.
루크의 방에서부터 이미 젖을 대로 젖어버린 팬티가 더 이상 수분을 머금길 포기한 탓이었다.
"왜, 왜애…."
얼굴을 파묻은 채 부들부들 떠는 백야.
기분 좋다.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좋다.
하지만 그냥 기분이 좋은 것과는 사뭇 달랐다.
맛있는 것을 먹어서 기분 좋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어서 기분 좋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기분 좋다.
이런 것들의 방향은 대개 행복함에 가까웠지만, 지금 이 감정만큼은 행복이라고 부르기엔 어딘가 크게 어긋나 있었으니까.
뭘까?
도대체 뭘까?
간지럽다?
하지만 간지러운 건 금방 고통스러워지니까 별로 안 좋아하는데.
한참을 고민하던 백야는, 결국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제 손으로 엉덩이를 때렸다.
…또 그 감각을 느끼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냥 정체가 궁금해서.
─짜악…….
백야는 엉덩이에서 펴져 나가는 신기한 감각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머리 속이 반짝거리고,
허벅지가 꾸욱, 조여들며,
몸 안쪽이 저린듯한 감각.
아까와 마찬가지로 기분 좋았다.
하지만, 이번엔 차이점이 확실히 느껴졌다.
조금 전 두루뭉실하던 미묘한 감각과는 달랐다.
일반적인 기분 좋음이라면, 필시 뒤따라나오려는 미소를 가다듬고 정제해 겉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엉덩이에 손이 닿았을 때 입을 꽉 깨물었다가, 이내 곧 바보같이 벌리길 반복하며 탁한 숨을 내쉴 뿐이다.
차이점은 확실하다.
허나 아직 여기에 무슨 단어를 붙여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
그리고 하나 은근히 신경 쓰이는 점.
지금 이렇게 직접 만지작 거리는 것보다, 루크가 아주 잠깐동안 쓰다듬어 주었을 때가 훨씬 더 기분 좋았던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으으…."
왜. 어째서.
부스럭부스럭 침대 위에서 허리를 움찔거리는 소리뿐인 침실 안.
꼴깍, 커다란 군침 덩어리를 삼키는 소리가 모든 소음을 잡아먹고 백야의 귀를 두드렸다.
한 번 더.
딱 한 번만 더.
결국 확인을 위해 다시 한 번 제 엉덩이를 때려보려던 백야는,
있는 힘껏 손을 높이 들었다가.
눈을 질끈 감고.
그대로,
─똑똑
"백야 님."
"……!!?"
침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자그마한 목소리에, 백야는 다급히 저 멀리 곱게 개어져 있는 이불을 당겨와 머리를 폭 박았다.
"백야 님?"
"……."
…생각해보니 이런 행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몇초도 안 되어 금세 부스스해진 머리카락과 함께 이불 속에서 빠져나온 백야는, 일단 목부터 가다듬었다.
하도 입을 벌리고 먼지를 마셔댄 탓에 혀가 마르고 목이 칼칼했다.
"목욕물 준비해뒀습니다."
"슈… 수고, 수고했어요. 아니, 네?"
"네?"
"목욕물…?"
아까 저택에 왔을 때 잠들기 직전에나 할거라고 일러두지 않았나.
하녀의 말을 듣고 깜빡, 깜빡, 멍하니 눈꺼풀을 움직이는 백야.
그녀의 시선이 침대 반대편에 놓인 벽시계를 훑었다.
조금 전 저택에 돌아온 뒤로 등 하나 켜지 않고 '탐구'에 푹 빠진 탓에 잘 보이지 않았다만,
어렴풋이 빛나는 달빛 아래 시침이 곧게 위를 향해 뻗어있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자정이었다.
"입학 전 시로아에 계실 때 자정에 주무시던 게 기억나 시간을 맞춰 준비해놓았습니다."
"……."
"사실 지금보다 더 일찍 준비해두긴 했는데, 바쁘신지 침실에서 나오질 않으셔서…. 혹시 너무 일찍 준비했을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끄응, 신음 소리와 함께 침대에서 빠져나온 백야는 푹 젖은 수건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 수건은 젖은 팬티랑 같이 세탁물 깊은 곳 어딘가에 숨겨두어야 할 듯하다.
"조금 있다가 들어갈 테니 쉬어요."
"알겠습니다."
꼭 닫힌 문밖으로 하녀의 사뿐사뿐한 발소리가 점차 멀어져갔다.
드르륵, 탁, 저 멀리 위치한 그녀의 방문이 움직이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갔나?
문에 귀를 가져다 댄 백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하녀에게 이 장면을 들켰더라면 필시 유서를 남겼을 것이다.
다 큰 여자가 침대 위에서 제 엉덩이를 만지작거리고 있다니,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3살배기 어린애쯤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제 자연스럽게 씻으러 가면….
"……."
씻으러 가면….
"……."
손에 쥔 축축한 수건을 만지작거리는 백야.
하녀는 저 멀리.
밤은 이미 깊은 상황.
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피곤하지도 않고.
한 번 꺼낸 수건은 이미 푹 젖은 상태.
백야의 침실 문은 그로부터 3시간 즈음이 더 지난 후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