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작년에 입었던 도복을 버리지 않고 또다시 입게 된 가을.
언제나처럼 살벌한 쇳소리가 울려 퍼지는 연무장.
최근 그곳에서 검을 휘두를 때면, 이따금씩 신기한 감각이 스칠 때가 있었다.
16살.
손아귀에서 굳은살이 사라지지 않게 된 건, 대략 9년 즈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그동안 검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어릴 적엔 매일매일 아버지의 허초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연무장 위에 벌러덩 쓰러졌었건만,
지금은 실초 사이에 섞여 들어오는 날카로운 허초들 마저 하나둘 읽어낼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그것을 검사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눈' 이라고 일러주셨다.
마력을 다루는 자들 앞에선 귀여운 발버둥 즈음으로 보이겠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은 이 '예민함' 이라는 무기를 꾸준히 갈고 닦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던 소녀는 아버지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이해한 뒤에 끄덕인 것은 아니었다.
사람 간의 전쟁이 잦던 먼 과거면 모를까, 마물이라는 공동의 적이 있는 지금 예민함이 그렇게까지 중요한진 아직 잘 모르겠으니 말이다.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이런 느낌.
대신 딱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다.
어머니의 품에 안길 때마다 느껴지는 온기도.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빗겨주시는 어머니의 손길도.
자신이 노력한 만큼, 이전보다 더 예민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
땀을 다 닦아낸 소녀는 다시 검을 들었다.
배시시 웃는 속마음과 달리, 눈꼬리와 입꼬리는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
삽입, 운동, 사정.
루크가 적어주었던 4개의 단어들 중, 이 3개의 단어는 백야 또한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애무.
분명 사랑이 담긴 손짓이라고 설명했었던가.
당연히 처음엔 스킨쉽과 비슷한 의미의 단어일 것이라 생각했다.
연인끼리는 당연히 할법한.
하지만 삽입하기 전에 꼭 필요한 과정은 아닌.
사랑을 나눌 때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행위.
따라서 딱히 문제 삼으려고 하진 않았다.
루크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굳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덧붙였기에, 개인의 생각 차이 정도로 넘기려 했다.
루크가 카엔의 입에다가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걸 떠올리기 전까진, 분명 그랬다.
생각이 바뀌었다.
이대로 가볍게 넘겨선 안 된다.
꼭 '애무'가 도대체 뭔지 제대로 된 설명을 들어보아야 했다.
루크와 카엔이 실수 없이 예쁜 사랑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라도, 꼭 그래야 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사랑이 담긴 손짓' 같은 추상적이고 애매모호한 표현 대신, 명확한 행위를 보여주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루크에게 받게 된 애무는.
"읏…. 읏…."
굉장히….
신기했다.
그 날 밤 자기 전에 문득 애무라는 두 글자가 떠오를 정도로.
대련 시간이 시작되기 전, 남는 시간에 자기도 모르게 루크의 방을 기웃거렸을 정도로.
찾아보면 다른 좋은 단어가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하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지 않은가.
목적은 성교육이다.
애무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시간은 이미 며칠 전 도서관에서 모두 끝마쳤다.
그러니까, 빨리 이 손을 떨쳐내고 무릎베개라든가, 팔베개라든가, 어머니께 배웠던 연인끼리의 '제대로 된' 스킨쉽을 알려줘야 하는데….
"가르쳐 줄 게 많다고 하셨잖아요."
백야는 꼴깍, 침을 삼키며 하반신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엉덩이와 손가락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고작 얇은 천 하나가 전부다.
언제든지 벗겨지거나 찢어질 수 있는 빈약한 방어구 위로 루크의 손이 부드럽게 살결을 쓰다듬어왔다.
어릴 때 이런 건 성희롱이라고 배웠다.
그러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 나쁜 일이라는 뜻이다.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만약 다른 가문의 사람이 이런 짓을 하면 책임은 자신이 질 테니 곧장 상대방의 손목을 꺾어버리라고.
분명히 그렇게 배웠던 것 같은데.
…어쩌지.
힘이 안 들어간다.
갑자기 이런 이상한 형태의 애무를 받고 있는데.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간질간질한 감각이…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서.
그만두어야 한다는 생각과 달리,
몸은 자꾸만 가만히 웅크린 채 루크의 손길을 느끼려 하고 있었다.
"백야 님. 잘 안 들려요."
"……많다고요…. 아직…."
"잘 안 들린다니까…."
"……읏…?!"
저번에 도서관에서 어깨를 주물러 주었던 남자답게 커다란 손.
그 손에서 시작된 '더듬다'에 가깝던 손놀림이 점차 '쥐어짠다'에 가깝게 변해갔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번에 애무받을 때와는 미묘하게 다른 손놀림이었다.
물론 그때 애무받은 곳은 엉덩이가 아니라 어깨였긴 했어도, 분명 꾹, 꾹, 짓눌러주는 듯한 느낌이 전부였었는데.
오늘의 애무는 그…. 콕 집어서 말할 순 없지만….
엄청….
야릇…? 하다…?
"……."
뭔가 이대로 있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
백야는 평생 다듬어온 평정심조차 잊고 조심스레 소리쳤다.
"많… 다니까요…! 아직…!"
"…그런데 왜 조용히 있었어요? 크게 말할 수 있었으면서?"
"그게 무슨…. 읏…?!"
파앙, 하고 어딘가 무척이나 부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루크가 가볍게 백야의 엉덩이를 두드린 탓이었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꽈악, 엉덩이를 쥐기 시작했다.
사고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탓에, 백야는 루크의 허벅지에 뺨을 비비는 상태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첫 번째.
그 동안 옳다고 굳게 믿어온 교육법이 루크에겐 맞지 않았다.
두 번째.
미안해서 카엔과의 연애라도 돕기 위해 성교육 선생을 자처했다.
세 번째.
루크의 허벅지 위에 누운 채, 그에게 엉덩이를 손찌검당했다.
이상하다.
첫 번째에서 두 번째까지 자연스럽게 흐르던 흐름이, 갑작스레 꺾인 듯한 느낌.
어딘가에서 단단히 꼬인 게 분명했다.
말? 아니면 행동?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역순으로 거꾸로 찾아보면 원인을 찾을 수 있을까.
흠칫, 흠칫, 자신도 모르게 허벅지를 꼬옥 조이던 백야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리고는,
또다시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
"왜 조용히 있었냐고."
"……?!"
방금까지 엉덩이를 쥐었던 루크의 손이, 이번에는 백야의 가슴에 닿아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밑가슴에.
검지 손가락을 꾸욱, 밀어붙이면서.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확인하듯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검사하듯이.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가슴 끝이 저릿저릿 울려왔다.
차가운 바람이 가슴 끝에만 지독하게 스치는 것처럼.
"…루크? 저기, 손이…."
"그러고 보니 저번에 그랬었지. 바쁘다면서 책 읽을 시간도 있냐고."
"네? 갑자기 그게 무슨…?"
"그것도 은근히 티를 내는 거였구나. 몰랐네."
책?
무슨 책을 말하는 거지?
백야는 빠르게 기억을 뒤적거려봤으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책이라고 했으니 아마 도서관에서 있었던 일이 아닌가 싶은데, 그런 말을 한 기억은 전혀 없었던 까닭이다.
"이제야 다 이해가 되네. 지금까지 사과 한 번 없었던 네가 갑자기 내 방을 찾아온 이유라든가."
"……?"
평소보다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가 끈적하게 백야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자연스레 튀어나온 반말은 귀에 걸리지 않았다.
대신 '사과'라는 짧은 단어만이 귓속에서 오랫동안 맴돌았다.
그때 일은 충분히 사과할만한 일이었으니 사과했을 뿐이다.
고작 늦잠을 자서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은 것은 굉장히 불쾌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력까지 다루며 사람 어깨를 박살 내는 건 도가 지나쳤으니까.
루크가 의식을 잃은 뒤, 뒤에서 구경하고 있던 카엔의 얼굴색이 새파래지길래 그제야 정신을 차린 거고.
"갑자기 그런 건 하면 안 된다며, 성교육을 핑계로 나를 불러낸 이유라든가."
"그, 하면 안 되니까요…."
"…안 된다고?"
"햑…?!"
조심스레 목소리를 내밀어 보았으나 돌아온 것은, 밑가슴 대신 젖가슴 전체를 꽉 쥐어오는 루크의 손.
그 탓에 평생 내뱉어본 적 없는 부끄러운 목소리가 목을 긁으며 새어나왔다.
"루크, 그만…."
"책에는 그보다 훨씬 더 과격한 플레이들만 잔뜩 휘갈겼으면서?"
"그게, 무슨 말… 읏……."
"아. 맞아. 이것도 있었지. 이렇게 젖꼭지만 괴롭히는 에피소드."
"쟈, 쟘까…."
손목을 꽉 쥐어보는 가벼운 저항 따윈 아무런 의미조차 가지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히양…?!"
얇은 옷감을 살풋 밀어내고 톡 튀어나온 젖꼭지가 루크의 손끝에 붙잡혀 바깥쪽으로 당겨졌다.
"읏…! 읏…?!"
그대로 도망갈 수 없도록 양 손가락으로 첨단을 꽉 붙잡고 끄트머리를 툭, 툭, 튕겨대는가 하면,
"아…. 하으…."
백야의 손가락이 파들파들 루크의 팔뚝을 긁어댈 무렵, 오히려 깃털로 간질이듯 가장 끄트머리만 살랑살랑 만져주기도 했다.
이런거, 이상해.
이상하고, 이상해서.
이제는 아무것도 모르겠어.
저도 모르게 깨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놓친 백야.
그녀는 이제 오히려 입을 작게 벌린 뒤 이상한 숨소리를 루크의 허벅지 위에다 내뱉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서관에서 안 참았을 텐데."
"흐으으…. 헤…."
"사서도 없었으니까, 그냥 책상 위에서……."
책상 위에서,
뭘?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백야는 머리맡에서 무언가 딱딱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아… 으…."
지금 백야 자신이 누워있는 곳은 루크의 허벅지.
여기서 머리맡에 단단한 게 느껴지려면.
그럴싸한 이유는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안 되겠다."
"읏……?"
툭, 밀쳐지는 머리.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지익, 지퍼를 내리는 소리.
이후 무언가가 천을 스치는 소리까지 뒤를 잇는다.
백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끝날 때까지 눈 돌리고 있으란 말이 없었음에도.
봐도 좋다는 말이 없었음에도.
가만히 기다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그러니까,
음.
어,
저게,
그….
"……아?"
바보같은 반응을 보인 뒤, 조용히 눈만 깜빡이는 백야.
"왜 그래? 네가 그렇게 열심히 묘사해놨었던 거잖아?"
"……."
"저번에 카엔이 핥는 걸 보기도 했고."
거기엔 책으로 배웠던 평균 따윈 가볍게 찍어누르는 크기의…
자지… 가, 있었다.
지금 허벅지에 누운 상태 그대로 백야의 눈 두 개가 가려지고도….
한참 남는 길이의.
커다란 자지가.
바로 코 앞에.
"어…. 어…?"
남성기를 여성기 안에 넣어서 정액을 분사한다.
이것은 부부끼리 아이를 만드는 법.
여기에 피임구를 쓰거나 질외사정을 한다면, 그것은 연인끼리 쾌락을 나누는 법.
나중에 제대로 가문의 뒤를 이어야 하기에, 어린 시절 특히나 열심히 공부한 부분이다.
그곳에 '남성기를 입으로 빨아주는 것' 따위는 없었다.
"뭐 해? 알잖아?"
"……."
없었다.
"……."
없었다.
"……."
─꼴깍
결코, 없었다.
"…아, 안 돼요."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은 백야는 겁먹은 초식동물처럼 부들부들 자리에서 벗어났다.
어쩐지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다행히 방 자체가 좁았던 덕분에 크게 문젯거리가 되진 않았다.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까지 상황이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분명 자신은 루크에게 연인다운 행동을 가르쳐주기 위해 잠시 허벅지를 빌렸을 뿐인데.
엉덩이에 손찌검을 당하고
젖꼭지까지 마구잡이로 희롱당한 뒤.
저렇게 커다랗게 변한 자지를… 보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안 된다니? 여기까지 와서?"
"진정해요, 루크. 저희 지금 커다란 오해가 있는 것 같으니까…."
루크의 검고 탁한 시선이 곧장 따라붙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는 진심으로 몸을 섞을 생각이었나 보다.
백야는 더듬더듬 벽을 짚어 뒷걸음질치며 조금 전의 상황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실수한 부분은 없었다.
그나마 하나 꼽자면 루크의 허벅지에 머리를 뉘인 것 정도.
하지만 고작 그것 가지고 이런 오해가 생겼을 린 없다.
그것을 제외한 어디선가 오해가 생겼으니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 터.
물론 당장 오해를 푸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오해? 이제 와서 또 그런 컨셉을 잡으려고? 웃기지 마."
잔뜩 흥분한 루크를 상대하며 오해의 발생지를 찾는 건 힘들지 않을까.
결국 백야는 눈을 질끈 감은 뒤,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다치게 해서 미안해요, 라고 속으로 되뇌이며.
고양이를 닮은 눈매 밑.
적색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잠시 청록빛으로 반짝였다.
****
"…좆됐다."
백야가 방에서 도망친지 어언 30분.
눈 앞에 보이는 거꾸로 된 책상이 무척이나 낯익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