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돼버린 걸까.
"…성교육."
"네, 네?"
성교육이라니.
그게 지금 분위기에 나올 말이 맞나.
바보같은 되물음이 내 입술에서 터져 나왔다.
급변하는 대화 주제를 따라가기 버거웠던 탓이다.
─그럼 그냥 졸다가 늦었나 보네요.
며칠 전만 해도 고작 대련 시간에 지각했다는 이유 하나로 나를 죽일 듯이 두드려 패던 여인이.
─저는, 당신에게 도움이 안 됐나요?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요. 그냥 의견을 듣고 싶은 것뿐이니까.
─…많이, 힘들었나요?
카엔과의 대련 이후, 갑자기 그동안의 대련 시간이 어땠는지 내게 질문을 던지다가.
"저번에 도서관에서 애무받다가 못한 거, 이어서 할 테니까."
"……."
"따라와요. 루크."
종극에는 갑작스럽게 못다 한 성교육을 하러 가자니.
도대체 백야의 마음속에서 무슨 변화가 일어났길래 이런 중구난방의 대화가 흘러간 걸까.
머리가 아팠다.
야설 작가를 찾는 것만 해도 머릿속이 꽉 찬 와중에 저 의미불명의 대화 흐름까지 해석하려니 금세 한계에 다다랐다.
중간까지만 해도 카엔의 제대로 된 교육 방식을 보고서 내게 사과하려는 건가 했건만….
심경의 변화 정도는 있는 듯한데, 사과하려는 것까진 또 아닌 모양이다.
하긴 그런 걸로 고개를 숙일 여인이었으면 지금까지 꼬박꼬박 내 몸을 부수려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카엔이 가벼운 역할을 맡았으니, 백야 자신은 더욱 엄한 역할을 맡아야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는데….'
카엔에게 다음부턴 백야없이 단둘이 대련 시간을 보내자고 말을 꺼내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
낡아빠진 기숙사의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성큼성큼 내뻗는 발걸음이 무섭도록 올곧다.
잠시 제자리에서 백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애꿎은 뒷목만 긁적이곤 백야의 뒤를 따라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창작물엔 복선이라는 장치가 있다.
처음 볼 때는 거기에 다른 뜻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나중이 되어서야 '아 그게 그런 뜻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그런 장치를 뜻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삶에 복선이라는 장치는 없다.
작금의 아무런 복선도 없이 벌어진 상황은 그저 백야의 변덕일 것이다.
내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하나뿐.
"……."
애무조차 뭔지 모르는 순수한 여인이니까,
저번처럼 적당히 받아주다가 돌려보내자.
그것 말곤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
손님에게 내놓을만한 간식.
당연히 없다.
귀족들이 즐겨 마시는 차.
당연히 없다.
물이라도 대접해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방이라 거창하게 말했지만, 실상은 현관에서 침대까지 걸어가는 길목에 있는 자그마한 찬장일 뿐이다.
내 침대를 의자 삼아 앉은 백야는 평소 같은 무심한 눈빛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더 비좁네요."
"……."
알 것 같은 기시감이 뇌리를 스쳤다.
분명 저번에 카엔이 방을 찾아왔을 때도 저것과 똑같은 말을 들었던 것 같다.
하기사 귀족들이 사는 대궐 같은 저택과 이 방을 비교하면, 침실은커녕 욕실이나 화장실 정도에 아슬아슬 닿을 수 있는 크기니 말이다.
카엔의 저택 욕실 크기를 떠올리던 나는 백야에게 조심스레 물잔을 건네주었다.
루비를 닮은 적색의 눈동자가 눈꺼풀 뒤로 깜빡깜빡 사라졌다.
"전 괜찮아요. 루크."
"말을 많이 하시게 되면, 목이 마를지도 모르니까요."
"…그것도 그렇네요. 오늘은 정말 완벽하게 가르칠 테니까."
완벽하게 가르친다니.
도대체 어떤 말이 백야에게서 튀어나올지 궁금했다.
기껏해야 체위 정도의 이야기가 전부 아닐까.
그것도 정상위, 후배위 딱 두 개.
아니면 기승위 정도까진 알고 있으려나.
…아니지.
저번에 도서관에서 봤던 백야라면 정상위라는 체위 하나라도 알고 있으면 다행이었다.
후배위, 기승위같은 짐승같이 추잡한 체위가 머릿속에 있을 리 없다.
백야는 양손을 쭉 내밀어 부드럽게 물잔을 감쌌다.
"그럼 일단 받을게요."
"…백야 님. 저번처럼 노트를 가져올까요?"
"네. 그리고 펜."
"준비하겠습니다."
침대 바로 옆 책상으로 다가간 나는 서랍에서 쓰다 남은 공책 하나를 꺼내 들었다.
모든 일의 원흉이 된 적갈색 표지의 야설 노트가 잠시 눈에 들어왔으나, 이내 살포시 서랍을 닫자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쓰던 노트인데 괜찮을까요?"
"문제없어요. 노트를 꽉 채워서 설명할 예정은 아니니까."
썼던 노트라 해봤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날 교수에게 배웠던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놓은 활자 뭉치에 불과했다.
그것 외엔 남자가 마력을 다룬다니 신기한 건 사실이다만, 그 양이 여자에 비해 현저히 낮아서 이류 무인이 한계라는 이야기라든가.
이대로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면, 서른이 조금 넘었을 무렵 무명 토벌대의 대장 자리 정도는 꿰찰 수 있지 않겠느냐는 현실적인 조언이라든가.
아마 그것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쓰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꿈을 잃었다기보다는, 청소하느라 바빠서였다.
토벌대의 대장이라니.
평민인 나로선 충분히 만족할만한 자리였으니까.
그 이상 대단한 직책은 꿈꾸지 않았다.
"식탁으로 가죠. 책상이 비좁아서 둘이 함께 앉기엔 힘들어 보이네요."
"그…. 차라리 저번처럼 도서관에 가는 건 어떨까요?"
"제가 불편할까 봐 그러는 거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
사람을 마구 두드려패던 여인과 단 둘이 좁은 방 안에 있는 게 불편하다.
라는 생각은 밖으로 새어나가기 전에 꼭꼭 씹어 목 뒤로 삼켰다.
나는 백야의 뒤를 따라 식탁으로 다가갔다.
식탁이라고 해봤자 책상보다 조금 사정이 나은 정도였기에, 노트를 펼치자 곧장 식탁 절반이 뒤덮였다.
백야는 노트 앞에 적혀있던 악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휙, 페이지를 넘겼다.
읽었는지, 못 읽었는지 까지는 잘 모르겠다.
"저번엔 제대로 된 성교 방법을 이야기하려다 시간이 부족해서 헤어졌었죠?"
"…네. 아마도."
"그때 애무, 삽입, 운동, 사정이라고 했었던가요?"
"기억력이 좋으시네요."
"애무를 처음 들어봐서요. 안 잊혀지더라고요."
백야는 펜을 휘적휘적 돌리며 말했다.
백야의 손을 바라보는 시선 너머로 그 때 내게 어깨를 주물러지며 흠칫 거리던 백야의 손이 겹쳐 보였다.
언제나 딱딱하게 굳어있던 목소리에 숨결이 섞이던 그 광경.
고개를 푹 숙인 채 부끄러운 소리를 삼키던 그 광경.
평소 목소리 하나 바꾸지 않는 백야에게선 볼 수 없던 희귀한 광경.
우월감… 은 아니다만, 그것과 닮은 오묘한 감정이 마음속을 간질였다.
밤새 차곡차곡 쌓인 깨끗한 눈밭 위에 처음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의 감정이라 해야하나.
…잘 모르겠다.
"……."
정복감… 일까.
"아무튼 그 때 제가 가르쳐 드리고 싶었던 건…."
슥, 슥, 노트 위에 무언가를 또박또박 쓰기 시작하는 백야.
아니. 자세히 보니, 글씨를 쓰고 있다기보다는 무언가를 그리고 있다.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
꼬물꼬물 그리고 있는 그림.
두 가지 단서를 합치자, 자연스레 조금 전 했던 생각이 다시 물 위로 떠올랐다.
그러니까 분명….
"한 번 보세요. 뭔지 알겠나요?"
펜을 식탁 위에 올려둔 백야는 내 쪽을 향해 노트를 내밀었다.
내뻗어진 노트 위엔 하나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똑바로 누운 무언가가, 직각으로 솟은 무언가와 겹쳐져 있는 그림.
예상대로였다.
"정상적인 남녀는 이런 식으로 사랑을 나눠요."
글씨는 잘 쓰더니 그림은 생각보다 못 그리는구나.
저 동그란 게 얼굴인 걸 알아보지 못했더라면, 정상위가 아니라 노른자가 없는 달걀 프라이 쯤으로 알아봤을 것이다.
짧은 감상과 함께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고르던 와중, 그림 위에 짧고 유려한 필체의 문장 하나가 빠르게 수놓아졌다.
「입은 성기를 넣는 곳이 아니에요.」
참 한결같은 여인이었다.
저번에도 이것과 비슷한 말을 노트에 적었던 것 같은데.
입도 쓸 수 있다든가, 사랑을 나누는 방법은 다양하다든가.
하고 싶은 말은 참 많았지만, 모두 품속에 담아두었다.
일단은 이 시간을 무사히 넘기고 시한폭탄이나 다름없는 백야를 밖으로 내보내고 싶었던 까닭이다.
"알겠습니다. 백야 님. 다음부턴 꼭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딱딱하고 모범적인 답안이 입술에 담겼다.
"카엔도, 당신도, 잘 몰라서 저지른 일이니까 괜찮아요. 다음부터 하지 말아요."
마찬가지로 재미없고 모범적인 목소리가 백야의 입술에 담겼다.
자. 이제 기분 좋게 헤어지자.
그리고 앞으로 가능한 한 백야와 이런 이상야릇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먼저 자리에서 살며시 일어나보았다.
아주 살짝.
티 나지 않을 정도로.
"……."
하지만 백야는 여전히 노트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아니.
그리고 있었다.
결국 살짝 떨어졌던 엉덩이가 다시 의자에 달라붙는다.
"…끝난 거 아니었습니까?"
"아직 많이 남았어요."
"어, 음…."
"당신이 카엔과 예쁜 사랑을 나누려면, 이걸론 부족해요."
예쁜 사랑.
예쁘다, 라는 단어는 무척이나 주관적인 표현이다.
누군가는 봄날의 활짝 핀 꽃을.
누군가는 부서지는 황금빛을 남기며 사그라지는 노을을.
누군가는 뒷골목에 진득하게 고인 붉은 피를 아름답다고 논할 것이다.
남녀 관계도 마찬가지다.
카엔은 내게 강간당하고 싶다고 말해온 여인이니, 오히려 과격하게 다루는 게 예쁜 사랑일 텐데.
백야가 알고 있을 순둥순둥한 행위들이 과연 도움될까.
백야가 쥔 펜이 부드럽게 원을 그렸다.
날카로운 선을 그리고,
마지막엔 색을 칠하듯 사각사각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그렇게 공개된 그림은.
"어때요?"
"……?"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이게 뭡니까?"
"네?"
"그…. 이건 머리 같은데."
나는 조금 전 정상위 그림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동그라미를 가리켰다.
위 아래로 이어진 동그라미 두 개.
그보다 더욱 밑에는 사각형 두 개가 놓인 채 까맣게 덧칠되어 있는데….
이게 도대체 뭐지.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이 네모난 건 뭡니까?"
적어도 자지는 아닐 것이다.
조금 전과 달리 두 개나 있으니까.
"방금 그림은 잘 알아봤잖아요."
"정상위 그림은 아무래도 표현이 이것보다 훨씬 더 직관적이었다 보니까…."
"정상위…? 거기에 따로 이름도 있나요?"
"그… 네. 아무튼, 그렇습니다."
한 가지 체위만 알고 있는 게 아니라 아예 체위라는 단어조차 모르는 거였구나.
백야라면 당연히 그럴 것 같았다.
일단 중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대충 넘겼다.
"다리에요."
"다리?"
"네. 사람 다리."
백야의 보충 설명을 들은 나는 다시 그림을 바라보았다.
동그라미.
동그라미.
그리고 까맣게 덧칠된 네모 두 개.
해석하자면, 얼굴, 얼굴, 다리 두 개일 것이다.
"……."
어쩐지 생각보다 조금 더 그로테스크하다.
이런 걸 그려내려 한 것은 아닐 텐데.
수수께끼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이게 뭐죠?"
괜히 더 머리를 굴리기 싫었던 나는 솔직하게 물었다.
머리 아픈 수수께끼는 야설 노트 하나로 충분하다.
또다시 같은 질문을 돌려받게 된 백야는 펜을 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아마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는 뜻이리라.
그림을 알아보지 못해서?
설마 고작 그런 걸로 기분 나빠할 여인은 아닌데.
다행히 백야의 주변에 무기가 될만한 것은 놓여있지 않았다.
대련 시간 외에 백야에게 두드려 맞은 적은 없다만, 뼛속 깊이 각인된 폭력이다 보니 자연스레 그것부터 찾게 되었다.
어색한, 그리고 무척이나 익숙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은 심장이 세 번 뛰었을 무렵 조심스레 부서져 내렸다.
"이게 뭐냐면, 그…."
입을 열었다가 말끝을 흐려버리는 백야.
검지를 툭, 툭, 튕기며 펜을 돌리던 그녀는 식탁 위에 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타이밍에 돌아가려고 일어난 것은 아닐텐데.
어쩐지 불길한 것은 과연 내 착각일까.
"……."
항상 느끼는 거지만.
불길한 상상은 언제나 현실이 된다.
"루크. 잠시만 이리 와봐요."
그 말이 전부였다면 당연히 백야의 말을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침대 위에 풀썩 앉아서 꺼냈기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꼭 가야 합니까?"
"제 그림 실력으로 설명하기보다는, 한 번 보여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머리,
머리,
다리.
갑작스레 펠라치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그리고는 상대가 백야인 걸 깨닫고 곧장 북, 북, 찢어서 구석에다 밀어 넣었다.
"어서요. 피곤하니까 빨리."
이제 고작 밤 10시쯤 되었는데 피곤하다고 하는 게 백야답다고 해야 할지.
천천히 숨을 내쉰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백야가 직접 보여주겠다고 말한 것이니, 적어도 야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유즈의 발정제가 말썽부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하필 침대에 앉아 있는 것은, 주변에 마땅히 앉을 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겠지.
일련의 추측에 확신을 가진 나는 조심스레 백야의 옆에 앉았다.
"가만히 있어요."
하지만 왜 이렇게나 불길한 걸까.
살풋 멀어지는 백야의 몸놀림이 왜 이렇게나 불길한 걸까.
천천히 내게로 쓰러지는 백야의 몸놀림이 왜 이렇게나 불길한 걸까.
허벅지에 닿는 부스스한 감촉이 왜 이렇게나 기분 좋은 걸까.
"어머니에게 배웠어요."
왜 나는 하필, 이것과 비슷한 장면을 야설 속에서 본 적 있는 걸까.
"사랑하는 연인끼리는 이렇게 서로의 몸을 맡기기도 한다고."
내 허벅지에 풀썩 드러누워 뺨을 비비는 백야.
차갑고 무뚝뚝한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뺨은 무척이나 따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