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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왜 길러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하얀 소녀의 입에서 의문이 새어나왔다.
가문을 잇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쯤은, 아침부터 부랴부랴 달라붙는 하녀들을 보며 진작부터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 취급을 아무런 대가도 없이 받을 리 없다.
계속 하녀들에게 수발 받기 위해선 당연히 자신도 무언가 대가를 내놓아야 했다.
자신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무것도 한 게 없다.
그렇다면 지금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일 것이다.
알기 쉽고, 명확했다.
예정에 없었던 듯 급히 '만들어진' 남동생이 심약한 울보라는 사실도, 6살이 지났을 무렵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다.
해야 할 일을 끝내지 않고 딴청을 피운다든가,
가끔은, 아니, 자주 답답하고 힘들고 짜증 난다고 눈물을 뚝, 뚝, 흘린다든가.
고운 햇볕 아래 뛰어놀다 넘어진 것 가지고 콧물 방울이 생길 정도로 울음을 터뜨린다든가.
식탐을 조절하지 못해서 점점 살이 붙어간다든가.
그 탓에 검을 휘두르기 힘들어한다든가.
그런 동생이 가주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기 쉽고, 명확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시간이 지나도 이해되지 않았다.
"안 돼. 절대."
"효율적으로 살기 위해선 저도 백서처럼 짧게 깎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
"네."
"이렇게 예쁜데도?"
"검을 들었을 때 방해가 되다보니까…. 최근에 그것 때문에 검로를 놓쳐서 손목을 다친 것도 있고요."
소녀의 뒤에 앉은 여인의 손길이 새하얀 뒷머리를 훑어내렸다.
어느새 목을 지나 날개 뼈 즈음까지 길어져 있던 머리카락 끝자락에서 고운 손가락이 빠져나왔다.
간질간질한 감각이 기분 좋았다.
이대로 꼬물꼬물 다가가 포옥 따스한 품에 안기고 싶었다.
하지만 어리광부리기엔 너무 늦은 나이였다.
소녀는 가을바람에 낙엽이 나리는 정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 머리카락이 길어야만 아름다운가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잘 어울리니까! 게다가 네가 말한 건 단발머리도 아니고 백서같은 까까머리잖니."
"예쁜 게 꼭 중요한가요?"
"그럼. 투박한 인형보단 화려한 인형을 가지고 싶잖아?"
"저는……."
소녀는 뭐라 말을 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보다 훨씬 어릴 적 이후론 인형에 손을 댄 적이 없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던 까닭이다.
자신이 무슨 인형을 좋아했는지.
어떤 놀이를 했는지.
떠올려보기 위해 애쓰는 소녀의 귀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꾹, 꾹, 장난치듯 손을 움직이던 여인은 소녀의 말랑말랑한 뺨을 만지며 말했다.
"하으… 치유된다아…."
"……."
"엄마는 너랑 이렇게 이야기하는 시간이 너무 좋아. 예쁜 딸이 오죽 바빠야 말이지."
저도 좋아요.
소녀는 그 말을 꿀꺽 삼키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릴적부터 아버지에게 함부로 감정을 내비치는 것은 지양하라고 배웠으니까.
물론 대상이 어머니라면 조금은 괜찮을 것 같기도 하지만.
갖은 핑계를 대며 어리광피우기엔 너무나도 늦은 나이, 라고.
이 또한 아버지에게 배웠다.
"그 녀석을 따라서 효율적으로 사는 건 좋아. 하지만 나는 네가 계속 머리를 길렀으면 좋겠어."
"그 녀석…? 아…. 아버지."
"그래. 이렇게 예쁜데 아깝잖니."
"…하지만 저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싫어하실 거에요."
"그럴 리가."
"저번에 얼핏 들은 게 있어서요. 시간도 빠듯한데 고작 머리 말리는 데에 도대체 얼마나 시간을 쓰는 거냐고."
소녀또한 어느 정도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등 뒤의 여인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뭐? 정말?"
"네."
소녀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도대체가 딸아이한테 못하는 말이 없어!
짐짓 화난 듯 열변을 토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할 테니, 절대 자르지 말라는 말이 소녀의 귀에 닿았다.
물론 효율을 추구하는 것도 좋지만, 머리카락만은 이대로 길러보자는 부탁이 뒤를 잇는다.
어머니는 굳이 따지자면 소녀보다는 동생 쪽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시끄러워지는 사람.
딸은 아버지를 닮고, 아들은 어머니를 닮는다는 미신이 머릿속을 스쳤다.
미신은 믿지 않는 편이지만, 어쩐지 그것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정원을 향한 소녀의 입가가 부드럽게 끌어올려 졌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원래 자리를 찾아갔다.
다 나은 줄 알았더니, 저번에 목검에 스친 입가가 쓰라렸다.
"치렁치렁해서 방해만 되는 것 같아요."
"그게 예쁜 건데…. 어떻게 해야 마음을 바꾸려나…."
"음식을 먹을 때도 불편하고."
"묶으면 되잖니."
"피곤해서 세수로 잠을 깨우려 할 때도 신경 쓰이고."
"잠을 자면 되잖니."
"잘 때 목에 감기는 것도 가끔 불편해서…."
"그건……. 음…."
여인은 아쉬운 감정을 담아 소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이내 방법이 생각났다는 듯이 소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다소곳이 꿇어앉아 있던 소녀의 형체가 살짝 무너져내렸다.
여인의 풍만한 가슴에 뒤통수를 꾹 짓누른 채 눈을 깜빡이는 소녀.
"그러면… 지금까지 아빠 부탁만 들어왔으니까, 엄마 부탁도 하나는 들어줘."
고막을 두드린 건 억지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물론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머리카락을 기르라는 말씀이시죠?"
"응. 이렇게 새하얗고 예쁜데 잘라내면 손해야. 인류의 손해!"
"그 정도까진…."
"대신, 엄마가 이거 줄게."
뒤쪽에서 딸깍, 딸깍, 무언가를 건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 소녀는 옆으로 내밀어 진 조그맣고 하얀 꽃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쓰던 머리 장식이었다.
"이거 줄 테니까 길러 줘. 아니, 길러 주세요!"
"다, 다른 사람이 들을지도 몰라요. 어머니."
"들으라고 해. 모녀지간에 이런 대화가 뭐 어때서."
"아버지는 항상…."
"걔는 걔고. 엄마까지 딱딱하게 굴어서야 너희 남매가 숨 돌릴 틈이 있겠니."
"……."
"아무튼, 길러 주세요. 백야 님!"
"……."
연못에 마련된 조그마한 물레방아가 돌아가며 물소리를 흘린다.
손바닥만한 낙엽 하나가 나풀나풀 힘없이 허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가을바람을 타고 미닫이문 안으로 들어오려 한 낙엽은, 결국 디딤석 위에 놓여있던 소녀의 신발 속으로 폭 들어갔다.
"후후."
"……."
결국 여인의 손에 억지로 머리장식을 하게 된 소녀는 머리를 마구마구 쓰다듬어지며 무심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께서 이렇게까지 부탁하시니, 어쩔 수 없이 머리카락만은 이대로 길러야겠다고 생각하며.
또 어머니와 대화할 시간을 내려면, 다섯 밤쯤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끼며.
옆머리에 붙은 장식을 쓰다듬듯이 만져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보겠습니다.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실 거에요."
"그래. 다치지 말고."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다."
불가능하겠지만.
여인에게 인사를 남긴 소녀는 신을 신고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연무장.
그곳엔 다부진 육체의 남자 하나가 몸을 풀고 있었다.
"…아버지."
인기척을 낸 소녀는 방금 했던 머리 장식을 곱게 벗어 한구석에 놓아두었다.
어머니의 선물을 망가뜨릴 순 없으니까.
입구에 놓여있던 목검 하나를 들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잘 어울리더구나."
"감사합니다."
모녀지간 사이에서는 한 사람 탓에 대화가 길게 늘어졌으나, 부녀지간 사이에서의 대화는 이걸로 충분했다.
길게 말해봐야 힘만 낭비할 뿐.
팔뚝을 걷어붙인 채 몸을 풀고 있던 남자는, 검으로 소녀를 겨눴다.
소녀의 붉은 시선 위로 몇 번이나 보아온 익숙한 검 끝이 직선을 그렸다.
보호구따위는 없다.
그런 것쯤은 3년도 더 전에 졸업했다.
"내일부터 토벌 때문에 며칠간 자리를 비워야 하니, 오늘은 세 번 쓰러질 때까지 하자꾸나."
"네."
이것으로 벌써 5년 차.
소녀는 검을 들었다.
백 가문의 검을.
백 가문의 위세를 유지하기 위해선 자신이 부단히 노력하는 방법밖에 없다.
가장 빨리 강해지는 길은 역시 실전 같은 훈련뿐이라고.
실력이 비슷해지면, 당장 진검을 손에 들겠노라고.
남자도, 소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제 방식은요?"
목소리가 떨렸다.
언제나 '효율'을 추구하던 자신이,
한 사람의 시간을 '낭비'하게 했다는 죄책감에,
오랜 시간 교육받아온 평정심이 깨지려 했다.
낮에 보았던 움직임.
목검에 맞으면서도 지어지던 미소.
멀찍이 떨어뜨린 검을 줍기 위해 달려가는 의욕.
그 모두가, 백야 자신이 대련을 주도했던 때와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으니까.
"……."
루크는 조용히 침묵한 채 자리를 지켰다.
백야에겐 그 침묵이 무척이나 아프게 다가왔다.
"저는, 당신에게 도움이 안 됐나요?"
결국 한 번 더 묻고 말았다.
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육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였을 뿐인데.
마침 아카데미엔 성녀도 있으니, 조금 더 강도 높은 훈련을 해주었을 뿐인데.
그리 어설프게 자신을 변호하기엔, 이미 나이를 많이 먹고 말았다.
21살.
비록 많은 나이는 아닐지언정.
자신의 실수를 가볍게 넘길 수 있을 만큼 어린 나이도 아니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아요. 그냥 의견을 듣고 싶은 것뿐이니까."
지금부터라도 대련 방식을 바꾸면 된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카엔이 루크와 대련했던 것처럼, 백야도 실전같은 연습을 포기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루크가 고통 속에 보낸 시간은 누가 보상해줘야 할까.
답은 정해져 있었다.
백야.
자기 자신.
…그런데, 어떻게?
보상해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이미 시간은 흘러가고 말았는데?
마땅히 생각나는 것은 없다.
못된 생각을 떠올리자면, 신분의 차이를 이용해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식으로 찍어누르는 것 정도가 있겠다.
당연히 그딴 혐오스러운 생각은 곧장 주먹을 꽉 쥐어 떨쳐냈다.
조금 전부터 마주칠 수 없었던 루크의 시선이 잠시 왼손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솔직히 말하자면."
루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마른 혀끝이 입천장에 붙었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백야는 꼴깍, 혀 중간에 모여있던 침을 삼키곤 귀를 기울였다.
침묵이 무겁다.
풀벌레도 울지 않고,
새도 하늘을 날지 않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붉은 동공이 루크의 얼굴을 좇았다.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힘들었습니다. …많이."
담담하게 뱉어냈지만, 백야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말았다.
도움이 안 됐나요? 의 답변으로 '힘들었습니다'는 분명 어딘가 살짝 어긋나있긴 했다.
하지만 백야는 그걸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바보가 아니었다.
"…많이, 힘들었나요?"
답변과 똑같은 질문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백야 자신도 왜 그런 질문을 던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잘못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좇았기 때문일까.
"……네."
밤바람이 차갑다.
백야는 저도 모르게 천천히 내려가고 있던 고개를 조심스레 위로 들었다.
그동안 미안했어요.
별거 아닌 사과가 입안에서 한참 맴돌았다.
자신의 실수를 가볍게 넘길 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었지만.
제 실수를 인정하고 평민에게 고개 숙일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나이도 아니었던 탓이리라.
조금 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백야는 천천히 숨을 내뿜었다.
어쩌면 루크에겐 한숨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건, 조금 뒤의 일이었다.
"루크."
"네. 백야 님."
입에서 사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 대신 지금부터 루크에게 잘 대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대련 시간엔 절대 저번처럼 검을 휘두르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지 루크의 동작을 봐주면 그 간의 행동을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내가 또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톡, 톡, 엄지 끝으로 검지손가락을 긁던 백야는 루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온 이유가 생각난 탓이다.
"…성교육."
"네, 네?"
그는 카엔과 비밀스러운 연애를 하고 있다.
물론 신분의 차이가 있다 보니 어쩌면 아카데미에서의 짧은 불장난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몸을 섞는 관계까지 발전했다는 게 중요했다.
거기엔 문제가 하나 있다.
저번에 문틈새로 보았을 때 카엔의 입안에다가 그 더러운 걸 집어넣으려 하지 않았던가.
병균 덩어리일지도 모르는 그것을 핥다니.
같은 귀족인 카엔에게 그런 것도 모르냐며 지적하긴 무척 낯뜨겁지만, 루크에겐 지적할 수 있다.
이상한 길로 새지 않게 도와주자.
카엔과 루크가 예쁜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뒤에서 몰래 도와주자.
"저번에 도서관에서 애무받다가 못한 거, 이어서 할테니까."
"……."
"따라와요. 루크."
낡아빠진 기숙사의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