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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야설을 주웠다-42화 (4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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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욕실 천장에 맺혀있다 떨어져 내린 물방울이 어깨를 때렸다.

아무리 지금 미지근한 물 속에 들어가 있다곤 하나, 차가운 물방울이 어깨를 건드리는 감각은 무척이나 오싹했다.

차라리 어깨까지 푹 담그면 나을 텐데.

품속에 꼬물거리는 여인이 한 명 나와 살결을 맞대고 있으니 그것도 영 여의치 않았다.

오싹한 감각에 어깨를 부르르 떠는 것도 잠시.

이제 조금은 지긋지긋해진 질문이 슬그머니 내게 건네져 왔다.

"…정말? 네가 쓴 게 아니라고?"

의문이 가득 담긴 카엔의 목소리가 벽면을 타고 웅웅 울려 퍼졌다.

평소보다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였다.

그도 그럴게, 지금까지 베개 안에다가 마음껏 교성을 질러댔으니까.

여유 시간은 대략 2시간.

섹스하는 데 쓴 시간은 대략 1시간 30분.

그 시간 내내 짐승처럼 박아댄 탓에 셀 수 없을 정도로 가버린 카엔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정이 끝난 뒤 스스로 입을 써서 자지를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까진 괜찮았는데.

그 뒤에 제 손가락으로 끈적끈적해진 구멍을 벌려 보이며 더 해달라고 유혹해대니, 도저히 못 버티겠더라.

그런 유혹만 없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오래 하진 않았을 텐데.

내 속마음도 모르고 몸보신 했다는 듯 천진난만하게 움직이는 늑대 귀를 바라보던 나는 피곤한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분명 처음부터 아니라고 했을 텐데요."

"그… 랬긴 했는데…."

분명 몸을 섞으며 훨씬 더 가까워졌을진대 왠지 모를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카엔은 등 뒤의 나를 곁눈질로 한 번 살피더니 흐음, 하고 제 턱을 만졌다.

"…거짓말."

"여기까지 와서 왜 거짓말을 해요."

"아까도 억지로 하려고 했잖아. 그… 내 목구멍까지… 쿡, 하고…."

"…쓴 사람이 아닐 뿐이지, 취향은 대충 비슷하니까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것 때문에 해명이 어려워지는 것도 사실이었고.

좋은 방법이 없으려나.

또다시 필체 얘기를 꺼내보려던 나는, 그 대신 카엔의 배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카엔 님."

"응."

"이쯤 왔으면 솔직히 밝혀도 될법한데, 자꾸 아니라고 하잖아요. 이유가 뭐겠어요."

"……."

입을 꼭 다문 카엔은 배 위에 겹쳐진 내 팔을 부드럽게 꼬집었다.

마땅히 생각나는 이유가 없는 모양이다.

미지근한 물 속에서 별거 없는 자극이 이어졌다.

손목부터, 팔꿈치 안쪽까지.

꼬집는다기보다는 만지작거리는 것에 가까운 자극.

점차 느릿해지던 손가락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 내 손을 꼬옥 끌어안았다.

"부, 부끄러워서?"

"……."

……퍽이나 그랬겠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카엔은 다시금 이쪽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눈동자에 깃든 제비꽃을 닮은 연보랏빛이 호기심을 담아 순수하게 빛났다.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제가 쓴 게 아니라고요."

"진짜?"

"네."

"하지만…."

"……?"

"그러면 그…."

카엔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내 품에 조금 더 몸을 기대어왔다.

"……싫어?"

무언가 중요한 것이 생략된 게 분명한 말.

나름대로의 추측을 덧붙이던 와중, 카엔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그 소설 속 주인공처럼 변태 같은 여자는…."

"……."

"싫어?"

더듬더듬 내뱉은 조용한 목소리가 욕실 벽에 튕겨 크기를 키워나갔다.

여태껏 카엔의 이미지를 떠올려보자면 '대하기 귀찮은 여자' 그리고 '태생이 특별한 탓에 콧대가 높은 여자' 라는 감상이 전부였지만, 최근 카엔은 그런 모습에서 동떨어져 있었다.

귀족을 엉망진창으로 망가뜨리는 소설을 읽고서도 자기 죄가 크다며 내 방을 직접 찾아와 포상을 내린다든가.

그런 와중에 커다란 사고가 생겼음에도 모든 것을 불문에 부치곤 그 대신 자신의 호기심을 해결시켜달라든가.

거기서 이어진 강간 이후 머리를 박기 위해 도장까지 따라갔더니, 내게 부끄러운 진심을 밝힌다든가.

지금껏 쌓아온 그녀 나름의 '유아독존' 이란 이미지는 며칠 새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그 곳을 대신한 건,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지도 모를,

아둔한 내 머리가 내린 잘못된 판단일지도 모를.

사랑에 빠진 소녀.

라는 이미지.

그 탓에 카엔이 조심스레 꺼낸 저 말이, 무척이나 의미심장하게 들려왔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변태같은 여자가 싫냐는 말이 아니라,

카엔 폰 단델리온.

그녀 자신이 싫냐고 묻는 것처럼.

"……."

사랑 고백?

일국의 북부대공녀씩이나 되어서 나를?

망상도 정도가 있지, 너무 나갔다… 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엔, 지금껏 보고 느낀 것이 있다 보니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부터 열심히 일하는 내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말을 걸어오던 카엔.

어느 날부터 갑작스레 나와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기 시작한 카엔.

그 이유가 새로운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향해 보이는 일종의 서투른 관심 표현이었다면.

"카엔 님."

뭐라 진중한 대답을 내뱉으려던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온갖 고민들을 지워버린 뒤 카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답했다.

"…좋아해요."

주어 없이.

그리 말하자, 우리 사이에 놓여있던 늑대 꼬리가 우뚝 굳는다.

나쁜 반응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기뻐하는, 그리고 기대하는 반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달려나갈 수도 없었다.

어릴 적부터 사랑을 약속한 애틋한 소꿉친구 같은 여인이 고향에 있어서는 아니다.

그냥, 무척이나 간단한 이유.

나는 평민.

카엔은 귀족.

사랑보다는 멀고, 친구보다는 가까운.

그런 상냥한 관계 이상으로 나아가기엔, 숨 쉬고 있는 이 세상이 철저한 신분사회였으니까.

아름다운 동화 속에서 숨 쉬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적당히 말을 이었다.

"그런 여자, 좋아해요. 싫어했으면 여기까지 안 따라왔지."

"……흐히이…."

꾹 숨을 참고 있다가 터져 나온 바보 같은 웃음소리.

얼마 전까지 내 앞에서 근엄한 척 짓던 웃음소리와는 다른 날것의 웃음소리가 카엔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옆으로 살짝 보이는 뺨이 무척이나 붉다.

"아무튼 제가 쓴 거 아니니까 이제 오해하지 마요."

"…아, 알았어. 결국 네가 쓴 건 아니지만, 나랑 소설 속에 적혀 있던 것들을 하는 게 싫진 않았다는 거잖아."

"뭐, 그런 셈이죠."

"그럼 됐어."

말을 마친 카엔은 내 품에서 벗어나 욕조 밖으로 빠져나갔다.

어깨 즈음까지 차올라 있던 수위가 순식간에 가슴께 밑으로 내려간다.

안 그래도 미지근한 물이었는데, 따끈따끈한 카엔의 몸이 도망가니 덜컥 한기가 느껴졌다.

욕조 물을 퍼올려 한 번 몸을 씻은 나는 카엔을 뒤따라 욕조에서 빠져나갔다.

"…아."

비틀비틀 걸어가던 와중, 무언가 잊었다는 듯 터져 나오는 카엔의 목소리.

"그럼 그 소설은 도대체 누가 쓴 거야?"

하얗고 뽀송뽀송한 타올을 머리 위, 그리고 꼬리에 덮어쓴 카엔이 그리 물었다.

거기에 내가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대답은.

"…글쎄요."

그리고.

"계속 찾아봐야죠."

"뭐?"

밖에 없었다.

****

비상사태.

"찾는다니?"

"네?"

새하얗고 말끔한 셔츠.

그 위에 평소의 먹색 재킷을 걸친 뒤, 허리춤에 맨 벨트에다 검집 한 자루를….

아니, 아니!

다 필요 없다.

지금 그런게 중요한 게 아니다.

"뭘 찾겠다고…?"

침실을 목격한 키아라의 한숨 가득한 배웅을 받으며 저택을 떠난 카엔은 루크와 함께 동쪽 구역으로 향하며 그렇게 물었다.

"소설을 쓴 당사자요."

"당사자? 그러니까, 작가?"

"…네. 왜요?"

왜요?

지금 저런 말이 들려와도 되는 게 맞나?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탓에 천천히 걷던 카엔은 보폭을 맞춰 걷는 루크를 올려다보며 다시 물었다.

"너 말고 아카데미에 있는 사람은 여자뿐이잖아."

"그렇죠."

"그러면 작가도 여자일거고. 성녀라든가, 유즈라든가, 백야, 이리스, 세른…."

"네. 아마도."

"그걸 도대체 왜 찾는데?"

"왜… 라뇨? 카엔 님이랑 있을 때도 그랬잖아요."

"그랬다니, 도대체 뭘?"

"카엔 님이 작가였냐고. 그래서 저를 못살게 굴었냐고. 그렇게 물어봤었잖아요."

열심히 과거를 더듬어 볼 필요조차 없었다.

기숙사를 찾아간 날.

침실에서 처녀를 잃은 날.

그날 모두 카엔 당신이 작가였냐며 이해 못 할 말을 뱉으며 손을 뻗어왔으니까.

그토록 난폭하게 끝마쳤던 첫 경험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그…. 꼭 찾아야 해?"

질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있는데 이제 굳이 찾을 필요 없지 않냐는 주장에 가까웠다.

야설 작가를 밝혀냈을 때 일어날 필연적인 일 또한, 예민해진 카엔의 신경을 툭, 툭, 건드렸다.

분명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몸을 섞으려 들 게 뻔했으니까.

직접 그런 야설을 쓴 만큼, 작가도 당하는 취향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고.

'이건 거의 대놓고 바람피우겠다는 뜻 아니야?'

물론 엄밀히 따지면 연인 관계가 된 것은 아니었다.

섹스파트너, 혹은 섹스프렌드.

딱 그 정도 위치가 전부인 것은 카엔도 잘 알고 있었다.

더 이상의 깊은 관계를 맺기엔 서로의 신분 차이가 극심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하지만, 하지만…!

'안 돼. 절대 안 돼.'

루크를 다른 년한테 뺏겨?

심지어 직접 유혹한 게 아니라, 음침하게 뒤에서 야한 소설이나 싸지르는 년한테?

그 꼴은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 봐.

카엔의 시선이 루크를 향했다.

하지만 루크는 곧장 대답하지 않고 어떤 대답을 내뱉어야 할지 조심스레 고르고 있었다.

진짜 대놓고 다른 여자랑 잘 생각인가 보다.

그것도 방금 질펀하게 쾌락을 나눈 여자 옆에서.

조그마한 주먹을 꼭 쥔 카엔은 바로 옆에 보이는 옆구리를 콱 때리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냈다.

아무리 화가 나도 허리를 다치면… 안 되니까.

"예. 찾을 겁니다."

결국 때렸다.

조금의 힘 조절조차 없이.

둔탁한 소리가 예닐곱 번쯤 들렸을까.

카엔의 주먹을 막아선 루크가 변명하듯 내뱉었다.

"그, 카엔 님.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진 알겠는데…."

"알아? 안다는 놈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와? 너 덜 맞았어. 손 치워."

"찾는다고 해서 그런 관계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헛소리하지 마. 나한테 작가냐고 말하면서 강간했던 놈이, 그런 관계가 안 될 거라고? 장난해?"

퍽, 퍽, 옆구리를 막은 루크의 손바닥에서 주먹질 소리가 몇 번 더 울려퍼졌다.

그와 동시에 꼭 깨물어진 카엔의 입술이 잠시 벌려졌다가 꾹 다물렸다.

그게 널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할 소리냐, 라는 말을 삼키고.

내가 다 받아줄 테니 다른 여자는 보지 마, 라는 말도 삼켰다.

짐을 지게 하기 싫었다.

아카데미에선 이렇게 발을 맞춰 걷고 있어도, 결국 루크는 평민이니까.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의미 없는 말에도 숨은 뜻이 있을지 몇 번이나 고민할 테니까.

언젠가 졸업한 뒤엔 이런 거리에서 바라볼 수 없을 테니까.

"전 그냥, 사과. 사과만 받을 생각입니다."

"…사과?"

뚝, 애증이 담긴 주먹질을 멈추는 카엔.

"저를 주인공으로 쓴 야설이잖아요. 심지어 귀족을 강간하는."

"……."

"만약 카엔 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걸렸으면 그대로 목숨이 달아날 수도 있었을 텐데…."

"……."

"예를 들어 백야 님이라든가, 세른 님한테 걸렸으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지도 모르고요."

"……."

카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교적 유순한 편인 백야는 몰라도, 세른에게 노트를 걸렸다면 변명할 새도 없이 즉시 목이 검날에 찢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변명이 어떻게든 지금 상황만 넘기려는 조악한 술수로밖에 보이지 않는 건 왜일까.

하고 싶은 말 수백 가지를 품속에 꾹 눌러담은 카엔은 툭, 루크의 손바닥 위에 주먹을 올려두며 말했다.

"…진짜?"

"…네."

한 박자 늦은 대답.

눈을 꾹 감았다가 뜬 카엔은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동쪽 구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루크를 믿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루크가 야설 작가를 찾기 전에….

자신이 먼저 찾아내면 되니까.

아랫입술을 씹으며 걷던 카엔은, 홧김에 몇 번 더 루크에게 주먹을 날리고 나서야 동쪽 구역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오늘도 같이… 아. 음음."

백야.

저 검밖에 모르는 애는 범인이 아니겠지.

그런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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