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긴장된다.
어색하다.
거북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딱 이것이라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 속.
먼저 욕조 속에 잠긴 나는 카엔의 다리가 눈앞으로 천천히 내뻗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참방 참방
발 끝이 가볍게 수면을 두드리는 소리.
수면에서 작은 파도가 일렁임과 동시에, 잊고 있던 단어 하나가 머릿속을 스친다.
예쁘다.
빼빼 마른 것도 아니고,
불필요한 지방이 붙은 것도 아닌.
꽉 쥐더라도 탱탱하게 손가락을 밀어낼 것만 같은 아름다운 다리.
엉덩이, 허벅지, 그리고 종아리까지 이어지는 매끄러운 곡선을 훔쳐보던 나는 욕조 속에 더욱 깊게 몸을 묻었다.
"으음…. 음…."
한 번.
두 번.
그런 나를 무시하고 욕조에 앙증맞은 발을 담가서 참방참방 물 온도를 재는 카엔.
곧 그녀는 반대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대야에 냉수를 잔뜩 받아와 욕조에 부어 넣었다.
배 위를 훑는 차갑고도 기분나쁜 감각.
뜨거운 온도가 따끈하게.
따끈한 온도가 따스하게 되어서야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다.
뜨거운 걸 잘 못 견디는구나.
별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하고 있자 욕조 밖으로 철썩, 물이 밀려 나갔다.
"하우으…."
기분 좋은 목소리를 내는 카엔.
그녀의 발.
허벅지.
타올에 감싸진 부드러운 육체.
꼬리가 쏙 삐져나온 탓에 미처 가리지 못한 토실토실한 엉덩이.
마지막으로 물에 젖은 새카만 꼬리가 코끝을 툭, 스치고 지나갔다.
뽀송뽀송한 상태의 꼬리만 만나봐서 몰랐는데, 물에 젖으니 생각보다 단단하다.
마치 기다랗고 튼튼한 손가락 같다고 해야 하나.
왠지 모르게 내 몸에 스멀스멀 달라붙기 시작한 꼬리 다음으로, 카엔의 부드러운 엉덩이가 조심스레 내 몸에 닿았다.
그 탓에 살짝 두툼해진 아랫도리가 카엔의 엉덩이와 내 허벅지 사이에서 꾸욱 짓눌렸다.
기분나쁠법도 한데, 카엔은 전혀 몸을 떼어내려 하지 않았다.
도리어 편한 자세를 찾아보는 척하면서 엉덩이로 꾹, 꾹, 계속해서 내 고간을 짓눌렀다.
명백히 날 자극하는 모양새.
이래도 꾹 참고 있을 거냐고, 어제 키스했을 때부터 제 욕망에 솔직해진 카엔이 참다못해 먼저 몸으로 물어왔다.
"……."
하지만 나는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한 번 관계가 크게 뒤바뀌었다고 해서 원숭이처럼 섹스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인 까닭이다.
본능 레벨에 각인된 평민 마인드가 문제였다.
카엔의 바람대로 그녀의 몸을 가리고 있는 타올을 거칠게 끌어내리려 했다가도, 결국은 애꿎은 물만 꾹 쥐며 욕망을 삼켰다.
차라리 내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욕망에 충실한 모지리 새끼였으면 진작에 박아대고 있었을 텐데.
씨발. 여기까지 와서 그놈의 신분이 뭐라고.
그냥 눈 딱 감고 저 타올만 벗겨 내자.
나한테 강간당하고 싶다고, 제멋대로 해도 된다는 허락도 받았잖아.
한 번 제정신인 채로 저지르고 나면, 나머지는 생각보다 쉬워질지도 몰라.
한 발자국.
딱 한 발자국만 내딛으면 되는데.
"…하아……."
한참의 망설임.
결국 나는 카엔의 몸을 꽈악 끌어안아 주는 것으로 상황을 넘겼다.
그래도 이건 저번에 해본 덕에 딱히 까다롭지 않았다.
카엔의 옆구리에 팔을 집어넣어 배 위에 팔을 휘감은 채 꾸욱, 내 쪽으로 끌어당기기만 하면 되니까.
조금씩 익숙해지자.
언제까지나 유즈의 발정제에 기댈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후…."
나는 말랑하던 카엔의 배에 살짝 힘이 들어갈 정도로 몸을 겹치고 더운 한숨을 내쉬었다.
여리여리한 우윳빛의 목덜미에다가.
날개뼈가 도드라진 등에다가.
덮듯이 숨결을 바른다.
지금의 나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읏…."
처음엔 고작 이것 뿐이냐는 듯 으으, 하고 뾰루퉁한 목소리를 내던 카엔도 조금씩 분위기에 잠기는 목소리를 뱉어왔다.
당장 원하던 것을 얻진 못했지만, 이것도 뭐 그렇게까지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아마 메인 디쉬 전의 에피타이저라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내가 흥분해서 이성을 잃는 게 먼저일지,
카엔을 오나홀처럼 대하는 데에 익숙해지는 게 먼저일지는, 나조차도 잘 모르겠지만.
내 몸을 훑던 꼬리가 꼬물꼬물 위치를 바꾼다.
게다가 일부러 자지를 짓누르던 엉덩이도 어느새 잠잠해진 상황.
"…루크."
"네."
"……아니야…."
뭐라 말하려던 카엔은 곧 순순히 내게 몸을 맡겼다.
"하… 하으…."
따뜻한 물.
그보다 뜨거운 품속에서 기분 좋은 목소리를 내뱉는 카엔.
새삼스레 느끼는 거지만, 몸이 참 작다.
이렇게 내 다리 위에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깨선이 입술에 살포시 닿을 수준이었으니까.
그러고보니 저번 침실에서 폭주했을 땐 분명 이쯤에다가 선명한 이빨 자국을 남겼었는데.
욕실에 퍼진 김 때문인지,
풀어내린 머리카락이 흔적을 가린 탓인지,
어제까지만 해도 살짝 흔적이 남아있던 카엔의 목덜미는 무척이나 깨끗했다.
새하얀 백지.
…지금이라면 저번과 달리 제정신인 채로 내 흔적을 고스란히 새길 수 있다.
부드러운 살결을 입술로 빨아들이면, 누구라도 의심할만한 흔적이 남을 것이고.
이빨로 꾹 짓누르면 아무도 물어볼 수 없는 흔적이 남겠지.
아카데미 밖에선 감히 눈도 못 마주칠 여인에게 내 흔적을 새겨넣는다는 오싹한 상상.
숨결이 구르던 혓바닥 위가 바싹 마르고.
혀 아래가 축축하게 물들었다.
"히우으……."
술이라도 삼킨 듯 점점 멍해져 가는 머릿속.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 카엔의 숨소리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어째 나와 달리 저 혼자 뜨거운 열탕에 몸을 푸욱 담근 것만 같은 숨소리.
동시에 지금껏 움찔거리고만 있던 늑대 귀가 파닥파닥 움직여 얼굴에 물방울이 튀었다.
나는 멍하니 카엔이 몸에 두른 축축한 타올에다 얼굴을 비벼 물기를 닦아냈다.
이미 물에 푹 젖은 타올에 뭐하는 짓인가 싶었지만….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
가만히 있었다.
가만히.
카엔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릴 듯이 가만히.
잠시 후, 나는 고개를 살짝 위로 올리며 숨을 들이켰다.
노곤노곤 풀어진 카엔의 목덜미에서 익숙한 체향이 솟아나왔다.
땀에 젖어 짭조름하다든가, 그런 냄새가 아니다.
달큰하다.
몇 시간이고 계속 카엔을 인형처럼 끌어안고 싶을 만큼.
침대에서도, 검술 도장에서도 맡았던 카엔 특유의 달큰한 체취.
카엔을 끌어안고 있던 팔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간다.
소중히 대해주겠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너는 내 소유물이라는 듯 조금은, 아니, 꽤 많이 억지스러운 포옹이다.
하지만 카엔은 조금도 발버둥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하는 것 같았다.
"……."
기뻐한다라.
참 웃기지 않은가.
다짜고짜 처녀를 가져간 쓰레기 같은 놈이 이렇게 제멋대로 몸을 끌어안고 있는데도.
너는.
"힉…."
너는.
왜.
"자, 잠깐…."
무언가 아슬아슬하게 끊어질 뻔한 느낌.
익숙함을 느낄 새도 잠시, 나는 꼭 껴안고 있던 팔 하나를 올려 카엔의 움푹 파인 쇄골을 훑었다.
그 후 바로 밑. 그녀의 가슴을 가리고 있던 타올에 손끝을 걸쳤다.
잠깐 기다려달라 말하면서도 저항은 조금도 없다.
의도가 빤히 보이니까 신기하게도 즐거움 대신 짜증이라는 감정이 피어올랐다.
보통 반대가 되어야 맞는 것 같은데 말이다.
"후…."
날 자극하려고 굳이 저런 말을 뱉는 거겠지.
강간당하고 싶으니까.
저번처럼 잔뜩 기분 좋아지고 싶으니까.
그러기 위해선 내게 부탁하는 것 말곤 방법이 없으니까.
귀족이 되어서.
평민인 나한테.
따먹어 달라고.
강간해 달라고.
꼬리를.
애교를.
잠시 노트에 적혀있던 문장 몇 줄이 얼핏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가 강간당하며 젖는 걸레년이라 모욕적인 언사를 뱉어주었으면 좋겠다.』
『감히 나를 능멸하느냐며 화를 내면, 닥치라는 듯 새하얀 엉덩이 위에 그의 손자국을 잔뜩 새겨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머리가 베개에 푹 박혀 있어 숨을 헐떡이는 것이 고작이기에.
그에게 진심으로 강간당하기 위해선.』
『끝까지 싸가지없는 영애를 연기해야 했기에.』
카엔.
네가 작가였다면 이렇게 온 몸으로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망가뜨려 주세요.』
라고 말할 게 아니라.
진심을 꼭꼭 숨긴 채.
언제쯤 너한테 강간당할 수 있을까, 하고.
숨죽여 기다리고 있지 않았으려나.
"흐읏……?!"
다소곳이 앉은 카엔을 뒤에서 꽉 껴안은 자세.
그 상태 그대로, 나는 손을 밑으로 힘껏 잡아당겼다.
이제서야 카엔의 양손이 다급하게 내 손목에 달라붙는다.
그리고는, 달라붙은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다.
"꺅…."
어디서 엉키기라도 한 걸까?
타올은 고작 윗가슴이 드러날 정도 내려간 뒤, 더 이상은 안 된다고 저항하듯 움직임을 멈췄다.
이유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카엔의 허리를 너무 바짝 끌어안고 있어서.
아플 법도 한데, 내 품에 꼬옥 끌어안아 진 카엔이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아서.
잠시 카엔의 몸을 살짝 놓아준 나는, 욕조 속에서 그녀의 타올을 완전히 벗겨 냈다.
철퍽.
욕조 밖으로 던져진 타올이, 지금껏 잔뜩 머금은 물을 뱉어내는 소리.
역할이 사라진 내 손은 곧장 욕조 속 카엔의 맨몸을 훑었다.
"힉…."
군살 하나 없이 매끈한 아랫배.
그 중앙에 위치한 앙증맞은 배꼽.
서서히 위로 올라오면 느껴지는 두 개의 부드러운 무게감.
그리 커다랗진 않지만, 한 손에 딱 들어오는 말캉말캉한 살덩이.
나는 그 위험한 과실을 마음대로 짓이겼다.
"읏…. 하아……."
어떻게 만져야 카엔이 좋아할 것이다.
라는 건 머릿속에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냥 젖가슴을 덥석 움켜쥐고.
손가락 사이에 걸리는 젖꼭지를 아무렇게나 꽈악 쥐어짜며.
오싹, 오싹, 어깨를 떠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선.
쿡, 조심스럽게 깨문다.
발정제에 잡아먹혔던 침실에서처럼 난폭하게가 아니라,
이렇게 하는 게 맞냐는 듯이.
뜨거운 몸과 달리 차갑게 식은 어깨선에 입술을 맞추고, 그 위에 더러운 자국을 새긴다.
"……아으…."
알듯 말듯한 숨소리를 내뱉는 카엔.
그녀의 어깨를 살포시 깨물 때 마다 입안 가득 배어 나오고 있던 침이 이빨을 지나 입술 밑으로 고인다.
고이고 고여서, 주르륵, 카엔의 살결을 따라 밑으로 흘러 욕조로 들어가 맑은 물과 하나가 되어 뒤섞인다.
강간이란 과격한 단어를 입에 담았던 카엔이 고작 이 정도 미적지근한 행위에 만족할지는 모르겠다.
그럼 조금 더 거칠게 대해도 괜찮을까.
내 마음대로 욕망을 때려 부어도 괜찮을까.
부서질때까지.
망가질때까지.
고장날때까지.
잠깐의 고민.
이후 나는 이미 탱탱하게 부푼 카엔의 젖꼭지를 두 손가락으로 강하게 비틀었다.
"……!? 햐… 앗……."
역시.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쾌락이라기보단 고통에 가까운 신음 소리다.
저번에 자궁을 쿵, 쿵, 빈틈없이 짓이겨줄 땐 지금보다 훨씬 더 짐승 같은 목소리를 내뱉던데.
아무래도 젖꼭지는 그 정도까지 좋아하는 성감대는 아닌 모양이다.
이런것보단 차라리 오히려….
"읏……."
이렇게.
짐승끼리 교미하듯 목덜미를 잘근잘근 깨물어주는 편이 더 좋은 반응을 보인다.
…수인 아니랄까 봐.
짐승새끼도 아니고.
"하으…… 으으……."
손가락 3개가 간신히 드나들만큼 벌린 입술 안.
이곳저곳 카엔의 어깨에 옅은 흔적을 남길 때마다 물에 젖은 기다란 머리카락이 잔뜩 씹혔다.
바삭바삭하지도 않고, 미역같이 흐물흐물한 것도 아닌 이상한 식감.
몰입하는데 방해되어서 괴롭히던 젖꼭지에서 손을 떼 직접 치우자, 지금껏 가만히 있던 카엔의 손이 나 대신 제 머리카락을 옆으로 당겨주었다.
그리고는.
"루크. 내, 내가 할 테니까…."
"……."
"그, 손은 계속……."
"…미친년."
이라고,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왔다.
뇌리를 거친 말이 아니었다.
작은 목소리도 아니었기에, 분명히 카엔의 귀에 들렸을 것이다.
뻣뻣하게 굳은 몸.
야릇하게 움직이던 꼬리가 멈춘 것이 그 증거다.
다만, 카엔은 끈적하게 젖은 곁눈질을 남긴 뒤 다시 조용히 앞을 바라보았다.
뻣뻣하게 굳은 몸이 유연함을 되찾는다.
움직임을 멈췄던 꼬리가 다시 내 몸을 야릇하게 옭아맨다.
카엔은 제 머리카락을 한 곳으로 치워준 채, 쭉 뻗은 검지 손가락으로 목덜미 오른쪽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
여기를,
깨물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