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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야설을 주웠다-35화 (35/66)

35

조용하다.

창문을 스치는 건조한 바람에, 햇볕에 젖은 도서관 커튼이 이따금식 흩날렸다.

펼치고 있던 책이 들뜬 듯이 팔락인다.

거슬리진 않지만, 바람이 부는구나, 라고 어렴풋이 느껴질 정도로.

그 너머 화려한 외모와 햇볕을 배경 삼아 부드럽게 미소 짓는 이리스가 앉아있었다.

한폭의 그림같이.

자연스럽다기보단, 만들어진 것 같다는 느낌.

어깨에 살랑살랑 닿는 단발머리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이리스는, 그래.

아름다운.

아름다운 가면을 쓰고 있었다.

"싫어."

"네? 왜요?"

"그야, 서로 아는 거라곤 이름뿐…. 이잖아요."

어색한 존댓말이 말끝에 따라붙었다.

손윗사람도 아니고 또래에게 존댓말을 쓴 기억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야기를 나눠본 경험 자체도 거의 없지만, 아무튼 그랬다.

하지만 이리스는 아무런 생각도 없어 보였다.

미소만 생글생글 짓고 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예쁘긴 한데, 묘하게 기분 나빴다.

갑작스레 조용해진 탓에 무슨 말이라도 뒤에 덧붙이려고 하던 유즈는, 이리스의 입술이 달싹이는 걸 보곤 숨을 삼켰다.

"이름. 그거면 충분하지 않아요?"

"…글쎄."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친구라는 단어에 깐깐한 기준을 두고 있는 건 아니었다만, 아무리 그래도 고작 옆에서 책 좀 읽었을 뿐인데 친구가 되자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책 중간에 황갈빛 나뭇잎 책갈피를 끼운 유즈는 즉석에서 친구의 기준을 몇 가지 세워보았다.

최소한 이름을 알아야 하고.

최소한 서로의 성격이 불편하지 않아야 하고.

최소한 일주일은 얼굴을 보아야 했다.

아직 친구라고 부르기엔 한참이나 부족하지만, 일단 이 정도면 면접 통과라고 할 수 있겠다.

조심스레 이리스에게 하나씩 자신의 생각을 알려주자, 그녀의 입꼬리가 조금 더 가파르게 휘었다.

비웃음.

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어째 털을 잔뜩 세우고 가르릉대는 길고양이를 마주한듯한 입매였다.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입매.

어쩐지 기분이 더 나빠졌다.

"유즈 님."

"네."

"혹시 친구 사귀어 본 적 없나요?"

정곡이었다.

더욱 더 기분이 나빠졌지만, 부끄러움이 그것을 추월하는 데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눈을 조금 가늘게 뜨는 것으로 제 기분을 표현한 유즈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는 이리스에게 툭, 말을 던졌다.

"…없……."

"아. 같은 엘프 종족 친구요. 엘프가 저 같은 다른 종족이랑 거리를 두는 것 정돈 알고 있으니까요."

"……."

"없나보구나."

침묵은 길어야 1초 남짓이었다.

하지만 이리스가 제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기까진 1초면 충분했다.

이젠 기분 나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한 나라의 황녀씩이나 되어서 갑자기 친구가 되고 싶다느니, 그리고는 친구 사귀어 본 적 없냐고 아픈 기억을 쑤시질 않나.

저게 도대체 무슨 예의범절인지 모르겠다.

인간들끼리 대화를 나눌 땐 저 정도까진 농담으로 치부하는 모양이다.

엘프인 유즈에겐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냥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드르륵, 의자를 뒤로 물리자 이리스의 웃음기 가득한 붉은색 눈동자가 유즈의 움직임을 따라다녔다.

"어디 가요?"

"왜."

"궁금해서 그렇죠. 전 아직 유즈 베르나란 사람을 잘 모르니까요."

"아까 나랑 친구가 되고 싶다며."

"네. 이제부터 알아가고 싶다는 거죠."

"순서가 틀렸어.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로 친구가 되고 싶다니… 말이 돼?"

바보냐고 물으려던 목소리는 목구멍 어딘가에서 끊어냈다.

예의 없는 사람을 대하며 똑같이 예의 없어지면 결국 같은 사람이 되는 거라 생각하면서.

문득 말 끝에서 어색한 존댓말이 떨어졌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여전히 이리스는 아무런 생각도 없어 보였다.

"저는,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

"유즈랑 친해지고 싶어요. 이유는 딱히 없고요."

"……."

"유즈는 누군가와 친해지는데 꼭 무슨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나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어떤 이유가 있어야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말이다.

그냥 이리스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잘못된 생각을 고집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았더라, 하는 생각이 마침표를 찍었다.

어릴 적의 기억이 잠깐 머리를 스쳤다.

유쾌하진 않았다.

그런 기분을 겉으로 티 낼 만큼 어리지도 않았다.

딱딱한 표정을 조금 더 굳힌 유즈는 책을 들고 사서를 찾아갔다.

사서는 입학한 날 보았던 것처럼 책상에 엎드려 꿈나라를 헤매고 있었다.

****

"유즈, 도서관은 너무 답답하지 않아요?"

평생 받아보지 못한 어색한 관심이 시작된 지 2일 차.

노트에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이던 이리스가 말을 꺼냈다.

맞은 편에 앉아있는 까닭에 노트가 거꾸로 되어 있어 무얼 쓰고 있는 건진 잘 모르겠다.

딱히 관심도 없고.

"글쎄."

"여기서는 기껏해야 남의 지식을 습득하는 게 전부잖아요."

"글쎄. 잘 모르겠으니, 책에 집중하게 조용해 주면 안 될까?"

"오. 그러면 저도 유즈의 친구가 될 수 있나요?"

"글쎄."

"으음…."

원소의 이해.

43페이지. 4번째 줄.

원소끼리의 우열은 가위바위보 같은 단순한 것이 아니다…

…라는 구절을 읽고 있던 유즈는 힐끔 고개를 들어 이리스를 바라보았다.

눈 앞에서 조그맣고 하얀 손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시선을 억지로 빼앗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목이 참 얇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제 말은, 이런 곳보다 조금 더 좋은 시설이 필요하지 않냐는 이야기에요."

이리스는 턱을 괴듯 내민 손등에 입술 끝을 묻은 채 히죽거리고 있었다.

장난스럽고도, 아름다운 모습.

하지만 어쩐지 '잘 만들어진 작품' 같다는 느낌은 끝까지 지울 수 없었다.

딱 떠오르는 말은 없지만, 여배우 같다고 해야 할까.

어떻게 웃어야 가장 아름다운 웃음을 지을 수 있는지.

어떤 목소리를 내뱉어야 가장 사람을 잘 설득시킬 수 있는지.

황궁에서 평생 배워왔거나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몸에 체득한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

후자라면 그냥 그러려니 별생각 들지 않겠지만.

전자 쪽은 조금 신경 쓰였다.

"조금 더 좋은 시설이라…."

"관심 있어요?"

"또 친구가 될 수 있느냐고 물어보려고 그러지?"

"그건 물론이고, 유즈한테 선물을 주고 싶으니까요."

"선물?"

"연구동이요. 슬슬 필요하지 않아요?"

유즈는 스르륵 책을 향해 내려가던 시선을 다시 이리스에게 고정시켰다.

연구동.

막연히 필요하다 생각하고 있긴 했다.

다만, 아카데미에 요청하면 금방 한 자리를 내어주는 구조였기에 서두르지 않았던 것뿐인데.

이리스가 말하는,

'황녀'가 말하는 연구동은 그런 마녀 여럿이 한꺼번에 쓰는 복작복작한 연구동이 아닌 것 같았다.

유즈의 미세한 표정변화를 눈치챈 듯이 이리스는 의자를 책상 가까이 붙였다.

"필요하죠?"

"글쎄."

"필요한가 봐요?"

"…글쎄."

먹이를 문 이리스의 집요함에 혀가 꼬인다.

하는 수 없이 유즈는 조금 전부터 관심 밖이던 책을 덮고 이리스에게 집중했다.

책갈피를 끼우지 못한 게 뒤늦게 생각났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연구동이라고 해봤자, 다 거기서 거기일 테니까."

네가 준비한 연구동 건물도 대충 그 정도겠지, 라는 뜻을 말 뒤에 숨겼다.

황녀가 준비한 건물은 조금 다르려나? 라는 뜻을 그 속에 쑤셔넣었다.

하지만 그 정도 진의쯤은 다 파악하고 있다는 듯, 미소를 잃지 않고 말을 받는 이리스.

"3층 건물이에요. 사용하는 사람은 저랑 유즈 단둘 뿐."

"……."

"이제 조금 관심이 생기나요?"

자연스레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계산이 흘러갔다.

한 층에 교수를 포함해 세네 명씩 들어가는 열악한 시설의 건물.

당장 써야 하는데 남아나질 않는 플라스크.

회로를 작성하느라 집중해야 하는 와중에 쓰레기 같은 냄새의 시약을 만드는 누군가.

쓰려고 가져왔더니 어느새 누군가가 몰래 훔쳐가 보이지 않는 연금재.

어쩌면 그것 이상의 무례한 사람과 같은 건물을 사용하게 될지도 모른다.

"…딱히 꼭 필요하진 않지만…."

"……."

"있으면, 뭐…."

"그럼 말 나온 김에 지금 보러 갈래요?"

톡, 톡, 노트를 두드리던 유즈는 결국 고개를 살풋 끄덕였다.

****

팔을 쭉 뻗으면 간신히 닿을만한 거리.

그것은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고.

어느새 기지개를 쭉 펴면 무심코 닿을만한 거리가 되었다.

달이 높게 뜬 밤.

유즈는 슬슬 졸리다며 어깨에 들러붙는 이리스를 책상으로 옮겨두곤 공부를 계속했다.

이리스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며, 자연스레 예전보다 하루가 조금 더 빠듯해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다른 불평등 사회에서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것은 오직 시간뿐이었으니까.

허투루 보낼 시간이 없었다.

아직 연구동이 익숙지 않았기에 오늘도 도서관을 찾은 유즈는 주변에 수북한 책을 쌓아놓은 채 읽고 쓰기를 반복했다.

어차피 주변엔 정리되지 않은 책이 한가득이었다.

조금 산만하긴 했지만, 너무 심하면 나중에 사서가 알아서 치우겠지 싶다.

"아웅…."

그렇게 뿌리가 되어줄 지식을 차곡차곡 쌓아가던 와중.

옆에서 쿨쿨 졸고 있던 이리스에게서, 나지막한 잠꼬대가 새어나왔다.

"유즈…."

"……."

이걸로 총 다섯 번째?

아니. 여섯 번째인 것 같기도 하다.

가끔 이리스는 이렇게 꿈속에서 유즈를 찾곤 했다.

애절한 목소리가 마치 '어릴 적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중' 이라 농담을 해도 진짠가…? 하고 고민을 할 정도로.

"유즈으……."

친구.

아직 제대로 된 확답을 주지 못해서 자꾸 저러는 모양이다.

우리는 친구일까?

솔직히 유즈는 이리스와 일주일 가까이 붙어 다녔으니 이제 그녀와 거의 친구나 마찬가지인 상태라 생각했다.

다만, 친구라 확실히 못 박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껏 철벽을 치고 있던 자신이 먼저 선뜻 '우리 이제 오늘부터 친구야!' 라고 닭살 돋는 말을 하는 건 꽤 까다로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이리스가 들이대는 구도였으니, 마지막엔 자신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게 아닐까 고민하는 유즈.

어쩌지.

친구가 잔뜩 있었으면, 하고 망상하던 귀여운 시절도 있었지만, 막상 실제로 이런 일이 닥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굳이 오늘부터 저흰 친구사이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아도 친구가 되는 방법.

좋은 방법이 없을까.

일필휘지로 글씨를 채우던 손이 굳은 채 어언 10분.

툭, 툭, 펜 끝으로 노트를 두드리던 유즈는 이리스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한 번도 관심 가진 적 없던 책장 사이로 들어갔다.

혹시 그런 책도 있을까 싶어서.

설마 그런 책이 아카데미 도서관에 있진 않겠지란 마음을 담아서.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나하나 손끝에 걸리는 제목을 훑어가며.

"아."

잠시 후 유즈는 책 하나를 뽑아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책의 제목은 『친구 만드는 법』 이다.

밑에 조그맣게 쓰인 '너도 할 수 있어!' 가 조금 열받았지만,

일단은 1페이지부터 차근차근 읽어보기로 했다.

****

아쉽게도 '아무 말 없이 친구가 되는 법' 같은 기적 같은 해결책은 책에 쓰여있지 않았다.

대신 그 안엔 제대로 된 친구가 되기 위해 가지고 있어야 할 지식들이 이것저것 쓰여져 있었다.

처음엔 긴가민가했지만, 이리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몇 분간 고민한 부드러운 말을 건네면 이리스도 곧장 부드러운 말로 받아준다든가. 그런 식.

책에 쓰여있던 '친구다운 대화'가 이루어지자, 유즈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가 되었다.

아마도.

첫 친구.

가끔 유즈의 머릿속에 '나는 이리스에게 몇 번째 친구일까?' 라는 생각이 피어오르기도 했지만, 굳이 의식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몇 번째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면서.

그런 건 친구를 처음 사귄 사람만 신경 쓰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이리스는 갑작스레 일이 생겼다며,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다른 제국의 황녀 하나와 함께 잠시 아카데미에서 모습을 감췄다.

혼자가 되었다.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

며칠간은 딱히 아무렇지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가까운 사람이 크게 다친 것도 아니며, 친구가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잠시 자리를 비운 게 고작인 이야기다.

두 달 정도면 해결될 거라고 했었나?

길면 세 달?

그래봤자 100일도 안 된다.

친구 하나 없이 살아온 7,000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리스와 함께 쓰던 연구동이 2배로 넓어졌다.

굳이 1층의 시설을 건드릴 필욘 없었으나, 어째서인지 가끔 1층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며칠간은.

딱히 아무렇지 않았다.

****

처음부터 없었더라면 이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있었던 것이 사라지는 것은 상실감을 낳았다.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서는.

그 안을 새로운 것으로 담는 방법밖에 없었다.

****

이리스가 사라진 지 3일째.

입학한 시점으로 따지면, 입학한 지 일주일 즈음이 되는 날.

유즈는 남에게 절대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계획 하나를 세웠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새 친구 만들기 프로젝트.'

고작 이리스 하나 사라졌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건, 아마 그녀가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기 때문이리라.

유즈는 새롭게 친구를 여럿 만들면 이 싱숭생숭한 마음도 곧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성장통.

그 말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으음…."

백야. 카엔. 성녀. 루크.

현재 아카데미에 있는 4명.

4명 전부와 동시에 친해지기는 어렵다.

소심하고, 음침하고, 내성적이고, 부정적인 귀찮은 성격을 지녔으니까.

자기 객관화정돈 진작에 마친 유즈는, 두 번째 친구로 적합한 대상도 이미 정해놓았다.

이 중 갑자기 자리를 비울 이유도 없고,

사이가 조금 틀어지더라도 신분을 앞세워 억지로 원래대로 돌릴 수도 있으며,

갖은 핑계를 대어 자주 만날 수 있는데다가.

유즈 자신이 첫 친구가 될 확률이 높은 사람.

루크.

그와 친해지기 위해, 유즈는 루크를 연구동으로 불렀다.

핑계는 남성이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이유를 탐구하기 위해서.

진실은 루크가 기억을 잃고 본성만 남았을 때,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그렇게, 루크와 뗄래야 뗄 수 없는 친구 사이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서.

****

해가 뜰 시간에 딱 맞춰 눈을 뜬 게 얼마만이었더라.

비틀비틀 몸을 일으킨 유즈는 부스스한 머릿결을 가다듬으며 침실을 벗어났다.

지끈지끈한 머리.

찌뿌드드한 허리.

욱신욱신한 어깨까지.

어째 성한 곳이 없었다.

게다가 자면서 뒤척인 탓에 잠옷 여기저기가 영 불편했다. 특히나 가슴 부분이.

딱히 보는 눈도 없고, 저택을 돌아다니는 사람도 메이드 뿐이니 유즈는 쇄골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이리저리 움직였다.

"후아…."

가슴쪽에 이상하게 접혀들어갔던 천이 풀려나니 한결 낫다.

조금 더 커다란 잠옷을 입을 걸 그랬나 싶지만, 아무래도 그건 가슴 끝에서 천이 떨어져 뚱뚱해 보이다 보니 손이 가지 않았다.

가슴을 좀 작게 만들 방법은 없을까.

옷 속에서 손을 움직이며 자연스레 배 위에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가 말랑말랑하게 흔들리고 있던 무렵.

1층으로 내려가던 유즈는 현관 앞에서 메이드가 누군가를 상대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이 이른 시간에 우편이 왔을 리도 없다.

왜 저러고 있는 걸까. 잠옷차림으로 사뿐사뿐 현관으로 다가간 유즈는 메이드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아! 마침 안에 계셨네요."

"……?"

그곳엔 의외의 인물이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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