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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야설을 주웠다-34화 (3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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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봄.

그럼에도 훅, 들이마신 새벽 공기는 유달리 차가웠다.

아마 어제 한나절 내린 비가 원인일 것이다.

목도리는 조금 유난 떠는 것 같아 하지 않았지만, 차가운 공기가 거칠게 목구멍을 쑤시니 서랍 구석에 처박아둔 목도리 생각이 절로 났다.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기숙사 구석에 붙은 창고로 향했다.

어두컴컴하긴 하나, 물건의 위치는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 별 상관없었다.

창고를 뒤적거린 나는 금세 끝이 가장 뾰족한 삽 하나를 들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진흙이 잔뜩 묻어 있는 것까진 미처 확인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이게 왜 이 꼴이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정황상 아무래도 저번에 비가 왔을 때 쓰고 난 뒤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돌처럼 굳은 진흙을 벗겨 내기 위해 기숙사 주변에 굴러다니는 진짜 돌을 들고 삽을 내려쳤다.

다행히 삽은 금방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여기저기 녹이 슬고, 색깔도 바랜 모습을 원래 모습이라 하기엔 삽에게 좀 미안하지만 어쩌겠는가.

피 칠갑을 한 검 대신 붉은 삽을 어깨에 들쳐멘 나는 더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남쪽을 향해 움직였다.

오늘의 계획은 이렇다.

배수로 점검.

두드려 맞기.

성녀에게 유즈를 유혹한 결과를 듣기.

오늘은 카엔, 백야와 약속이 있는 날.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카엔, 백야에게 흠씬 두드려 맞는 날이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오전 중에 배수로 점검을 모두 끝내버릴 생각이었다.

비록 아카데미가 짜증 날 정도로 넓긴 하나, 배수로에 커다란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면 아마 오전 내에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마땅한 작전명을 못 붙여서 그렇지, 유혹도 그리 틀린 표현은 아니지 싶다.

성녀나, 유즈나, 둘 다 감히 먼저 말을 꺼내기 힘든 수준의 여인들이니까.

압도적인 미모는 생판 남의 호감을 얻는 데 있어 가장 훌륭한 무기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몸에 걸친 재킷을 조금 더 단단히 여민 나는 남쪽 구역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

친구.

친구란 무엇인가?

그 간단하고도 곤란한 질문에, 유즈는 이렇게 답했다.

무언가를 같이 즐길 수 있는 사람.

서로 눈치 보지 않고 가볍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

같이 있으면 편안한 사람.

…이라고.

척추를 따라 전율이 흐른다거나, 감탄사와 함께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명대답은 아니었다.

잠깐의 시간만 준다면, 어린아이도 내뱉을 수 있는 쉽고 간단한 대답이다.

유즈는 딱 그 정도만 바라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내뱉을만한 대답만큼만.

누군가와 같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밤새 나누어보고 싶다.

높은 담장 밖에서 시끄럽게 뛰놀던 아이들처럼, 제 감정을 목소리에 고스란히 담아내 보고 싶다.

그런 유치한 욕망을 속에 꾹 담고 살게 된 건, 4살이 되던 해의 어느 날이었다.

새하얀 눈이 느릿느릿 창문 밑으로 떨어지는 날이었다.

혼자서는 절대 다 먹을 수 없는 커다란 6단 딸기 케이크가 눈앞에 놓여있던 날이었다.

예쁜 포장에 감싸진 선물 상자 몇 개가 주위를 굴러다니고 있던 날이었다.

그리고,

해맑게 웃던 유즈의 품 손에 '어린아이도 쉽게 배우는 세계수 법률 사전' 이란 책이 꼬옥 주어진 날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생일이 아니었을까 싶다.

****

새장은 무척이나 답답했다.

그런 어린 감상을 지닌 채 몇 달이 지나고.

20평이 조금 넘는 새장은, 그리 답답한 공간까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날아오르는 법을 깨닫진 못했지만, 딱히 커다란 걱정이 들진 않았다.

이렇게 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면 마음껏 훨훨 날 수 있을 테니까.

지금은 잠시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창 밖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인 유즈는, 밖에 나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책을 펼쳤다.

10살이 되던 해.

어린 아이도 쉽게 배우는 세계수 법률 사전은, 어느새 법학개론이란 책이 되어 있었다.

아.

잘못 말했다.

여러 가지의 책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법학개론.

형사소송법 개론.

법철학.

민법 입문.

판례해설.

행정법.

기타 등등.

유즈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밤을 새웠다.

비어있던 공책 수십 권을 빽빽한 글씨로 채워나갔다.

아버지께 대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격려를 받았다.

어린 마음에 솔직하게 기뻐했다.

하지만 예쁜 미소를 지을 수는 없었다.

천성이 그런 탓이라고, 부모님은 껄껄 웃으며 머리를 연신 쓰다듬어 주셨다.

'열심히 공부했으니 곧 친구도 많이 생길 거야.'

이유도, 결론도, 오류투성이인 문장이 아버지의 입에서 새어나왔으나, 10살의 유즈는 아무것도 짚어내지 못했다.

그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15살이 되던 해.

확실히 최근 들어 시력이 조금 나빠졌다.

20평을 살짝 넘는 새장을 둘러보기엔 아무 문제도 없었으나, 물끄러미 창 밖을 내다볼 때면 불편함이 느껴지곤 했다.

자유로이 흘러가던 구름이 하얗게만 보였다.

분명 새카만 그림자 같은 게 군데군데 보여야 하는데.

그저 하얗고 순수하게만 보여서 흥미를 잃었다.

고개를 돌리고 자리에 앉으려던 순간, 담장 너머 멀찍이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공부하는데 방해되기 딱 좋은 소음이다.

시끄러워서 창문을 닫았다.

잠시 뒤, 제 행동에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유즈는 다시 창문을 살짝 열곤 저 멀리 보이는 높다란 담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어느새 멎어있었다.

조용해서, 창문을 닫았다.

사각, 사각, 펜을 놀리는 소리만이 새장 안에서 차갑게 울려 퍼졌다.

최근 들어 부모님에게서 '공부는 잘되고 있느냐' 란 질문을 받는 빈도가 늘어났다.

그 때마다 최근에 읽은 판례 몇 개를 조목조목 읊어주면 약속한 듯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셨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또래 아이들 중엔 따라올 사람이 없겠다면서, 너도 아버지를 따라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라는 어머니의 말이 뒤따랐다.

다른 애들은 공부를 얼마나 하는진 모르겠지마는, 어쨌든 칭찬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였을까?

오후 4시 즈음 담벼락 근처에서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게 된 것은.

날이 더워져서 그런가?

문득 머릿속을 스친 의문은 산사태처럼 쏟아지는 피로에 파묻혀 자취를 감췄다.

24시간을 깨어있고, 6시간을 자는 버릇이 생겼다.

오른손 중지에 지워지지 않는 딱딱한 굳은살이 박혔다.

펜을 쥐는 방법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 같지만, 바꿀 생각은 없었다.

대단한 사람이 된 뒤에, 친구를 잔뜩 사귀어야지.

그런 바보 같은…. 아니. 그런 어린 생각은 그때까지만 해도 유즈의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15살이었으니까.

어릴 적부터 만들어놓은 잘못된 생각을 뜯어고치기엔, 아직 너무나도 귀여운 나이였다.

19살이 되던 해.

우연히, 유즈는 마력을 개화했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신의 선택을 받아서.

술에 거나하게 취하신 아버지는 현관에서 부끄럽게 넘어지신 뒤에도 여전히 웃고 계셨다.

큰 행운이 따랐으니 법조인보다 더욱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거라면서.

베르나 가문의 자랑이 될 수 있겠다면서.

오늘 밤 술자리에서 마주친 귀족 전원에게 제 딸이 마력을 개화했다고 신나게 자랑하고 다니신 모양이다.

아마 15살의 유즈라면 그렇구나, 하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9살의 유즈는 그러지 못했다.

'눈에 띈다.' 의 의미를 어느 정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이제 곧 여기저기 축하를 가장한 친목질에 불려 나가게 되는 수순이 자연스레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아마 15살의 유즈라면 친구를 잔뜩 사귈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해 눈을 빛내며 기뻐했겠지.

하지만 19살의 유즈는 그런 것보다 '현실적인' 걱정이 먼저였다.

과연 일평생 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해온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까?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다.

망신.

베르나 가문이란 이름에 먹칠을 할 게 뻔하다.

그렇다고해서 입을 열지 않고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나쁜 소문이 퍼질 가능성도 있었다.

아예 집에 콕 틀어박힌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부모님의 행복한 웃음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유즈는 웃지 않았다.

이 또한 천성이라고, 부모님은 멋대로 착각하곤 유즈의 가녀린 어깨를 토닥여주셨다.

굳게 잠겨있던 새장의 자물쇠가 사라졌다.

문이 열리고,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마치 머리 위에 부담스러운 황금빛 왕관이 얹어진 기분이었다.

당장에라도 치워버리고 싶지만, 그러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이제부터 '마녀'라는 꼬리는 언제든 '유즈 베르나'라는 이름 뒤에 달라붙을 테니까.

저 사람도, 저 사람도.

다들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착각에 휩싸여 유즈의 호흡이 살짝 불규칙해졌다.

대인기피증.

책에서 한 번 즈음 읽어 본 단어다.

생각보다 성가시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다시 저택을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

유즈는 최대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며 새장 밖으로 비틀비틀 걸어나왔다.

재즈라고 했었나.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음악.

처음 보는 생소한 춤동작.

게다가 옆에선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가문을 들먹이며 유즈에게 말을 걸어왔다.

수컷, 암컷, 가릴 것 없이 가슴을 바라보는 시선이 무척이나 기분 나빴다.

남들에 비해 조금 크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이런 노골적인 시선은 처음이었던 까닭이다.

어쩌지.

들어온 지 고작 1분도 안 됐는데.

진심으로.

토할 것 같았다.

…안 되겠어. 돌아갈래.

의식은 거기까지 이어졌다.

새는 날개를 움직이지 않았다.

틀렸다.

새는 날개를 움직이지 못했다.

반은 맞는 말이다.

새는 새장에 갇힌 탓에 날개를 움직이는 법을 몰랐다.

이제서야 정확하다.

안녕하세요, 이 한 마디조차 그토록 어렵다는 걸 19살이 되어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바보같이.

친구?

나 같은게 과연 친구를 만들 수 있을까?

첫 사교계를 엉망으로 끝마친 새는, 스스로 새장을 닫고 들어가 직접 날개를 잘라냈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회로의 작성, 마력의 분배, 식의 응용, 4차원 좌표.

생소한 지식이 차곡차곡 머리에 쌓여 마법의 뿌리가 되어주었다.

하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니었다.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였다.

어차피 저택 밖으로 나가봤자 이상한 취급을 받을 테니까.

20살이 되던 해.

아니, 정확히는 20살이 되던 해 직전.

우물쭈물 말을 고르던 어머니께 아카데미 준비는 잘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들었다.

막연하게 '마력을 개화했으니까 당연히 르페아스에 입학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왔으니,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종족의 학생들과 함께 살아야 할 텐데 정말 괜찮겠냐는 질문이 뒤를 이었다.

최근 10년간 마력을 개화한 엘프는 너밖에 없다고 덧붙이시면서.

불편하면 언제든지 세계수로 돌아와 쉬어도 좋다는 말을 들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유즈는 지금도 그 때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첫 사교계에서 1분도 채 버티지 못하고 도망친 딸이 걱정하지 말라고 호언장담하다니.

과연 어머니가 그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하지만 그땐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올해 르페아스 아카데미의 입학생은 총 7명이 전부란 소식.

그리고, 르페아스에선 모두가 마력을 다룰 수 있으니 자신만 특별 취급당하지 않으리란 예상.

이 두 개를 섞으면 대인기피증도 피할 수 있고, 여러 명이 유즈에게 거머리처럼 들러붙는 참극도 피할 수 있다.

즉, 공부만 한다면 조용히 졸업할 수 있는 것이다.

교수와 독대하는 것 정돈 별문제 없을 테고.

이미 입학하기 전부터 이런저런 초급 이론은 거의 다 마스터한 상태니까.

다른 사람들과 엮이지 말고 최대한 조용히 졸업만 하자.

그렇게 '내게 친구는 사치야' 상태로 르페아스 아카데미에 입학한 유즈는,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이상한 여자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이리스 반 유크라시아.

화려한 황금빛의 머리카락을 어깨 즈음까지 기른 소녀.

─유즈. 저, 유즈랑 친구가 되고 싶어요.

직설적인 말이었으나 유즈는 이리스의 말을 이해하는데 한참이나 걸렸다.

그야 그럴게, 유즈는 이리스와 만난지 고작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까.

유즈는 멍하니 이리스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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