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야설을 주웠다-28화 (2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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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힌다.

이 방법이 루크에게 먹힌다.

그리고, 곧 루크에게 먹힌다.

"헤헤…."

의도대로 바닥에 짓눌리게 된 카엔은 제 감쪽같은 연기력에 자화자찬을 보내고 있었다.

과정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부끄러운 사랑의 단어를 입에 담지 않고서도 이런 상황까지 도달할 수 있었으니까.

검사가 아니라 극단의 여배우를 맡아도 될만한 세기의 명연기였다고, 카엔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하. 루크는 흥분했을 때 이렇게 난폭하게 변하는구나.'

'이제 어제처럼 억지로 옷을 벗겨 내려 하겠지?'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면 곤란하니까, 대충이나마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는 편이 나을 테고.'

헤실헤실 즐거운 미소를 지은 카엔은 루크의 아랫배를 바라보며 군침을 삼켰다.

침실에서 자궁 입구까지 마구 찍어눌러질 때 그의 모습이 겹쳐 보여 아래쪽이 간질간질하게 달아올랐다.

이미 바지 속에서 푹 젖어버린 팬티가 조금 부끄러웠지만, 어차피 곧 루크의 손에 벗겨질 테니 별 상관없었다.

이제 곧, 아까 가랑이 밑으로 느껴졌던 저 커다란 게 내 몸을…….

"……."

내 몸을….

"……."

내 몸을…?

"……?"

…왜 가만히 있지?

아랫배를 바라보고 있던 카엔의 눈동자가 조금 더 위를 향했다.

그곳에 보이는 것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는 루크의 얼굴이었다.

카엔은 당장 덮쳐도 모자랄 판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루크에게 의문을 느꼈다.

설마 매력이 없나, 그런 생각이 찰나 동안 스쳤지만, 어젠 침대 시트가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몸을 섞었으니 그런 이유는 아니지 싶다.

그런데 지금은 고작 얼굴을 찡그리며 가쁜 숨만 내쉴 뿐이다.

그냥 모조리 쏟아내면 편해질 텐데.

왜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걸까?

'혹시 이 정도론 성에 안 차나…?'

확실히 저번엔 하지 말라고 버럭버럭 성을 냈었으니 말이다.

어제의 경험과 소설의 내용으로 짐작하건대, 루크는 그런 반항하는 여자를 억지로 범하는 취향이 있는 게 기정사실이기도 하고.

좋아. 반항?

어려운 요구는 아니다.

어떻게 해야 루크가 좋아하려나.

잠깐 고민하던 카엔은 먼저 루크에게 짓눌린 손목을 살짝 움직여 보았다.

상당히 헐겁다.

당장 온 힘을 다해 손목을 당겨내면 순식간에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만큼.

첫 경험 때 루크가 손목에 자국이 남을 만큼 꽉 쥐고 있던 것을 떠올려보면, 지금 제압은 어린애 장난 수준이었다.

왜? 라는 의문은 금세 사라졌다.

루크가 카엔의 필체를 알아차리고 말았다는 어려운 추측 대신, 끝나고도 손목이 욱신거리지 않아 오히려 좋다는 생각으로 흘러간 탓이다.

카엔은 평소보다 훨씬 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크를 올려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이래선 반항하는 '척'을 하다가 몰입이 깨질 가능성이 있다.

대신 실패할 가능성이 낮은 다른 방법을 떠올렸다.

목소리다.

정확히는, 단어, 그리고 문장.

루크가 지금 원하고 있을 문장을 만들어 귀에다 속삭여주면, 당장에라도 어제와 같은 열기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고상한 척 꼼수만 쓰려는 그 년들은 루크의 이런 취향을 꿈에도 모르겠지.

아카데미 내에서 오직 자신만이 루크의 진실을 알고 있다는 묘한 우월감이 카엔의 머리를 적셨다.

큼, 큼, 이젠 아예 대놓고 목을 가다듬은 카엔.

이윽고 스스로도 감탄할 정도의 가련한 목소리가 공기 중에 퍼져 나갔다.

"그, 그만…."

연기력 100점.

단어 선택 100점.

목소리 톤 100점.

표정 연기 100점.

이또한 만족스러운 명연기라 생각한 카엔은, 가능한 한 원망스럽다는 눈빛을 지은 채 루크를 노려보았다.

네가 원하던 게 이런 거냐고.

이제 좀 마음에 드냐고.

대놓고 묻고 싶은 마음을 참고 평민에게 덮쳐진 불쌍한 대공녀를 연기했다.

눈빛과 어울리지 않게 씰룩씰룩 올라간 입꼬리만 빼면 꽤나 그럴싸한 연기였긴 했으나.

"…참을 테니까. 잠깐만 날 내버려 둬. 제발."

"……?"

귀엽게 치솟은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는 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바깥에서 들려오는 빗소리가 조금 더 거세졌다.

희미한 마력등 몇 개만 켜진 어두컴컴한 검술 도장.

카엔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이게 뭐람.'

분명히 이대로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섹스하는 흐름 아니었나?

루크가 그런 난폭한 방식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런 걸 원하고 있었을 텐데 도대체 왜 이런 이상한 결과가 튀어나온단 말인가?

이상하다.

기대하던 이벤트가 폭삭 무너져내려 실망한 카엔. 그녀의 시선이 힐끔 반대편 벽을 향했다.

그곳엔 벽에 기대어 앉아 이쪽을 전혀 바라보지 않는 루크가 있었다.

한참이나 루크를 바라보던 카엔의 고개가 갸우뚱 왼쪽으로 기울었다.

'뭐야 도대체?'

지금 이 결과물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아까 루크에게 덮쳐진 채로 느꼈던 그의 숨결은, 하나하나마다 뜨거운 열기로 가득 들어차 있었으니까.

게다가 아랫도리도 괴로워 보일 지경으로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고.

한참을 자극한 끝에 존댓말에서 반말로 바뀐 그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까지 듣지 않았던가?

경험은 적다만, 그래도 루크가 저번과 같은 상태라는 걸 알아보는 데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래.

다 좋았는데.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엔 어제와 다른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제발 진정될때까지 자신을 내버려두라고 말하며, 반대편 벽까지 도망가고 만 것이다.

도대체 뭐하는 놈일까?

저번에 진짜 강간하려 할 땐, 전혀 진정할 생각 없었으면서.

"……."

이유를 모르겠다.

"끄응…."

하지만 해결책은 있다.

아예 저 정도의 사리분별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루크를 흥분시키면 어떻게든 해결되는 일이긴 했다.

과연 그런 상태의 루크를 만들 수 있을지는 의문이긴 하다만, 못할 일은 또 아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보단 낫지.

카엔은 귀를 쫑긋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변태."

몇 달 만에 산책 나간 강아지처럼 포르르 루크 앞으로 다가간 카엔은 아까처럼 그의 허벅지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조금씩 앞으로.

가슴과 가슴이, 고간과 고간이 맞닿을 때까지 루크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직까진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뭐, 예상한 일이다.

"……."

그 일련의 광경을 지켜보던 루크는 뭐라 말하려 하다가 곤란하다는 눈빛만 남긴 채 고개를 홱 돌렸다.

이 또한 예상한 일이었다.

카엔의 얼굴이 점차 루크에게 가까워져 갔다.

"나 키스하고 싶어."

"…방금까지 잔뜩 해봤잖아."

"그래도. 아직 잘 모르겠단 말야."

"뭘."

"달콤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사실 어느 정돈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달라붙은 채 시간을 보내며 행복해지는 그 순간.

그걸 '달콤하다' 라고 일컫는 거겠지.

섹스보다야 좀 덜하다만, 카엔은 그 정신적인 달콤함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한숨을 훅 내쉬며 부정적인 뜻을 내비친 루크.

그러거나 말거나, 카엔은 빈틈을 놓치지 않고 제멋대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키스만 해도 이득.

키스하다가 흥분해서 덮쳐지면 훨씬 더 이득.

카엔의 계산은 무척이나 단순했다.

"으읍…! 읍!"

"안 된다고."

하지만 카엔의 입술은 루크의 손바닥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그것도 입술 바로 앞에서.

고작 손바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닿을 수 없었다.

"읍! 읍!"

아깐 머리카락을 당겨서 혀를 떼어놓더니, 이젠 아예 들러붙지도 말라는 건가?

이건 비록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다.

실패와는 별개로 키스의 효과는 확실한 모양이니까.

키스한다고 해서 딱히 바뀌는 게 없었다면, 저렇게 막으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키스만 성공하면 루크와 뒹굴 수도 있다는 거지?

오기가 생겼다.

"안 돼."

"으읍! 으브븝!"

카엔은 루크의 손을 치우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깍지를 낀 상태로 힘껏 밀어보려 하기도 했고.

귓가에 대고 조금만 더 키스해보면 안 되겠냐고 속삭여 보기도 했다.

하지만 값비싼 보물이라도 되는 양, 루크의 입술은 끝끝내 닿을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저렇게 철벽을 치는 걸까?

'당장 어제만 해도 자기가 훨씬 더 들이댔으면서…!'

차곡차곡 쌓여가던 오기가 짜증으로 모습을 바꾸기까진, 잠깐이면 충분했다.

"왜? 왜 안 되는데?"

"……."

"내가 네 강간을 용서해주는 대신 키스해주기로 한 거잖아!"

앞뒤가 물과 기름처럼 어긋난 말이 도장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잠시 빗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루크는 여전히 손등으로 제 입술을 막은 채 단호하게 받아쳤다.

"난 분명 키스는 안 된다고 했어. 네가 멋대로 입술을 들이댔던 거지."

"……."

화는 전혀 가라앉지 않았으나, 듣고 보니 그렇긴 했다.

"그리고 네가 키스한 탓에 또 실수를 저지를 뻔했고."

"……."

이미 마음껏 저질러 놓고 다 실수랜다.

게다가 그 실수를 또 당하고 싶어서 억지로 키스했던 건데.

카엔은 '그냥 너랑 섹스하고 싶다고!' 라 외칠뻔한 것을 간신히 주워담았다.

공녀로서의 품위를 지켜야 하니까.

네 밑에서 엉망진창으로 망가지는 게 기분 좋았다고는, 섣불리 말할 수 없으니까.

상황이 답답했던 나머지, 카엔은 자기도 모르게 어린아이처럼 볼을 부풀렸다.

"알아들었으면 이제 내 위에서 내려가."

눈치도 없는 놈.

너도 섹스하는 거 엄청 좋아하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들이대면 '강간당하고 싶어하는 건가?' 하고 진작에 덮쳤어야지.

변태.

바보.

멍청이.

하고 싶은 말 몇 마디가 계속 카엔의 목구멍 안에서 빙글빙글 뛰어다녔다.

그러나 결국 뱉을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싫어."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작전을 살짝 잘못 짰나 싶기도 했다.

저번처럼 루크와 계속 붙어있다 보면 알아서 낯뜨거운 상황으로 흘러갈 줄 알았더니, 예상과 달리 이번엔 저번보다 훨씬 저항이 거센 까닭이다.

"안 떨어질 거야."

그래도 소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루크와 잔뜩 키스를 나눈 끝에, '그가 흥분하면 이성을 잃고 덮칠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었으니까.

예컨대, 키워드는 '흥분' 이라는 뜻.

허나 본심을 들키지 않고 루크를 흥분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카엔은 아직까지도 손등으로 입술 위를 가린 루크를 뚫어져라 노려보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 강간당할 뻔했을 땐, 어설픈 혀 놀림으로 루크의 자지를 핥아주고 있었고,

그 뒤 정말 강간당하기 직전엔, 루크의 자지를 절반 가까이 입속에 넣고 쮸웁쮸웁 부끄러운 소리가 날 정도로 열심히 빨고 있었다.

방금 전엔 또 덮쳐질 뻔도 했겠다, 도출되는 결과는 간단명료했다.

최소한 그 정도의 흥분을 안기면 또다시 루크에게 안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으으…."

난이도가 이상했다.

처음엔 포상, 그 뒤엔 '괴로워 보여서' 라는 핑계라도 있었다만,

지금은?

"……."

끝까지 이 마음을 꼭꼭 숨긴 채 안기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변태."

조금씩.

카엔의 마음속에 있던 천칭이 휘청휘청 기울기 시작했다.

한 쪽에 놓여 있는 것은, 딱 한 번 만이라도 더 루크에게 당해보고 싶다는 성욕.

반대쪽에 놓여 있는 것은, 카엔이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것들이다.

귀족으로서의 '프라이드' 라든가.

성에 눈뜨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가문에서 배워온 남녀 관계의 '예절' 이라든가.

루크에게 가벼운 장난을 치며 차곡차곡 쌓아온 '아카데미에서 가장 친한 귀족님' 이란 이미지까지도.

"…평민."

변태라는 말은 잠시 뒤 번복했다.

이젠 자존심마저 내던지려하는 자신이 루크보다 훨씬 더 변태인 것 같아서.

"아니, 루크."

평민이라는 말도 금세 번복하고 말았다.

루크가 자신을 '평민'에게 안기며 행복해하는 변태 귀족이라 생각할까 봐.

"……."

서로의 살을 맞댄 채 흘러가는 침묵.

아까보다 훨씬 거세진 빗소리.

카엔은 키스당하지 않기 위해 입술을 가리고 있던 루크의 손에 살풋 입술을 묻은 뒤 속삭였다.

"……스 하고 싶어."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이렇게까지 말해야 하나 싶었지만, 한편으론 두근두근 흥분하고 있는 자신이 거기 있었다.

정작 흥분해야 하는 사람은 루크인데.

카엔은 떨리는 눈동자로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기다려. 키스 정도는 멀쩡해진 뒤에 할 수…."

"섹스…."

"……."

"섹스… 하고 싶어…."

꼬리를 붕붕 흔들며 중얼거리는 카엔.

생각외로 카엔의 감상은 짧았다.

저질렀다.

오직 그뿐.

무언가 맘 속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해방됐다는 편안함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솔직한 마음을 이야기한 카엔은 물끄러미 루크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결국 마주치고 말았다.

분명 어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눈빛을.

침대 위에서 꽉 끌어안겨 있던 도중, 답답한 제복 겉옷을 벗고 루크의 다리 사이에 쏙 들어가 안겼을 때.

그 때의 루크와 똑같은 눈빛이 코앞에 있었다.

흥분한걸까.

카엔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제처럼 될 거야."

"그러니까…."

모기소리만큼 조그마해지는 목소리.

"또 그렇게 억지로 당해보고 싶다고… 변… 바보야……."

어쩌면 내심 솔직함이란 이름의 부끄러움이, 빗소리에 파묻혀 희미해지길 원한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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