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카엔 폰 단델리온.
백야.
유즈 베르나.
성녀.
그리고, 현재 개인 사정 때문에 아카데미에 없는 두 제국의 황녀들.
그 중 하나가 작가.
허나 용의자는 둘.
"……."
머리가 아팠다.
툭, 건드리면 예쁘게 쪼개지기라도 할 듯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먼저, 두 명이 같이 썼을 리는 없다.
내가 전문가 수준의 안목을 가진 건 아니다만, 그 필체가 오직 한 사람의 필체라는 것쯤은 나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두 사람 중 하나는 범인이 아니란 건데.
'아 그렇구나.' 하고 넘길 수 있는 일이라면 다행이겠다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었다.
카엔 폰 단델리온.
내가 이미 그녀를… 잔뜩 강간해버린 탓이다.
카엔이 내 방을 찾아온 날은 흥분한 나머지 강제로 그녀의 머리를 붙잡고 펠라치오를 시키려 들었다.
머리를 땅에 박고 살려달라 빌려 했던 오늘은, 결국 카엔의 입에서 망가진 신음 소리가 새어나올 때까지 그녀를 찍어누르고 말았다.
하나하나가 따지고 보면 극형감.
카엔이 이 사실을 공개한다면, 나는 변명할 기회도 없이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카엔은 너무나도 기뻐했다.
내게 거칠게 애무 당하며.
내게 이름을 반말로 불리며.
내게 억지로 몇 번이고 찍어 눌리며.
어이없을 정도로 행복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오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 여자가 쓴 글이었구나.
생각보다 금방 범인을 찾았다, 라고 생각했는데.
유즈 베르나.
이 여자가 갑작스레 끼어들면서 상황이 꼬였다.
나를 연구동으로 부를 때마다 발정제로 의심되는 약을 꼬박꼬박 먹인 것으로 모자라, 흥분한 척 연기하자마자 나를 루크 '님'이라고 부르다니.
포상이라는 핑계를 대며 스스로 내게 봉사하러 찾아온 카엔.
내 의식이 끊어진 줄 알고 몰래 존댓말을 쓰며 헤실헤실 웃었던 유즈.
뭐지.
도대체.
그렇게 끝맺어지지 않는 침묵 속에 갇혀있길 한참.
몸을 둘러싸고 있던 부유감이 빠르게 사라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자 내 몸이 무언가 푹신푹신한 물체 위에 뉘어져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게다가 얼굴부터 가슴을 지나 왼쪽 허리까지 무언가 가벼운 것이 살포시 올려져 있는 상태.
가볍게 감고 있던 두 눈이 천천히 뜨인다.
동시에 코끝을 스치는 자극적인 찻잎의 향기.
당장 눈앞에 비친 것은, 새하얀 천 쪼가리였다.
"……푸우."
관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헝클어진 숨결을 뱉은 나는 천천히 침구류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연스레 눈앞을 가리고 있던 직사각형 형태의 천 쪼가리도 아래로 부드럽게 떨어져 나간다.
천의 정체는 붕대였다.
왜 저런 걸 몸에 감지 않고 얹어만 놓았나 싶었지만, 어렴풋하게 돌아오기 시작한 기억을 더듬으니 곧장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화르륵,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가슴을 향해 내뿜어졌던 창백의 화염.
그리고 사람의 피부와 불길이 만나면 일어나는 당연한 변화.
…아무래도 교회에 실려왔을 때,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행히 지금 내 몸은 아무런 이상이 없지만, 신성력을 불어넣어야 했을 성녀가 보고 있기엔 꽤나 수위가 높았을 테니까.
쓰레기통에 박힌 셔츠를 보니 대충 어떤 상태였을지 짐작이 갔다.
교회까진 누가 데려온 걸까?
유즈?
아니면 다른 사람이?
머리카락이 멀쩡한 걸 확인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상태가 심각했기에 아침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다행히 아직까진 반짝이는 은하수가 여유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아니지.
혹시 모른다.
침대 위에서 정신을 잃은 채 한나절을 보낸걸 지도.
그럼 또 밀린 일정을 한 번에 처리해야 하나.
나는 무언가 중요한 걸 잊은듯한 감각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마 바지만은 멀쩡하니 다행이었다.
일단은 성녀를 찾는 것이 급선무다.
침대 바로 옆에 마련된 커다란 흔들의자에서도 온기를 찾을 수 없으니, 저택으로 돌아가 주무시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눈에 잘 띄는 곳에 감사 쪽지라도 남긴 뒤 돌아가자.
그렇게 방문을 열고 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하으음….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작가님."
졸음에 잔뜩 취한 하품 소리.
2명이 쓰면 꽉 찰듯한 아담한 나무 탁자 끝에 성녀가 눈을 비비며 앉아있었다.
그것도 노란색의 펑퍼짐하고 귀여운 잠옷 차림인 성녀가.
"……."
병아리를 닮은 것은 둘째 치고.
옷이 참 얇았다.
계속 보고 있기 민망할 만큼.
유즈와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던 탓일까?
이런 상황이 있을 때마다 불쑥 솟구치던 성욕도 지금만큼은 잠잠했다.
"예. 덕분에. 좋은 밤입니다, 성녀님."
"네에…. 이리 와서 차라도 한잔하세요. 몸에 좋아요…."
맘 같아선 빨리 교회를 벗어나 기숙사로 돌아가고 싶으나, 열심히 몸을 간호해준 사람 앞에서 그런 예의 없는 행동을 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평민의 집마냥 소박하게 꾸며진 조그마한 공간.
나는 탁자 맞은편에 앉아 성녀에게 찻잔 하나를 조심스레 건네받았다.
"저는 당연히 저택으로 돌아가셨을 줄 알았는데. 저 때문에 여기 계속 머무르신 건가요?"
"아뇨? 여기가 제 집인데요? 너무 넓으면 걷기 귀찮아서. 집이 이러니 메이드도 두지 않았고요."
"아하…."
"침대에서 제단까지 고작 20걸음 안팎으로 오갈 수 있다니, 전 여기가 너무 좋아요…."
예전에 한 번 여길 청소할 때 왜 침대가 두 개나 있나 했더니.
여러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쓰려고 있는 거였나.
나는 성녀가 건네준 맛없는 차를 한 모금 억지로 들이킨 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이게 귀족 예절 중 하나라던데. 뭐, 성녀가 그런 걸 하나하나 신경 쓰는 사람도 아니니 대충 흉내만 낼 뿐이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입술을 달싹이는 성녀.
"오늘은 대련 날도 아닌데 온몸이 아주 엉망이 되셨더라고요."
"……."
"유즈 님이죠? 지금 아카데미에 그런 마법을 다룰 수 있는 건 유즈 님 뿐이니까. 교수님이 그러셨을 린 없고."
예의상 한 모금만 더 차를 들이켠 나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확실해지는 한 가지.
유즈는 날 태워버린 뒤 다른 사람의 손에 나를 맡긴 모양이다.
그녀가 날 여기까지 데려왔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지만.
조그마한 서운함을 느꼈다.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 쌀쌀맞긴 해도 그렇게 남한테 상처입히실 분은 아닌데."
"음…. 복잡한 사연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대답을 바란 게 아닌데요…."
"피곤해 보이시는데 괜히 어려운 이야기를 나눌 필욘 없잖아요. 그냥 제가 유즈 님께 실수해서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해도 괜찮아요. 대충 짐작은 하고 있으니까."
"…?"
점차 유즈보다는 카엔이 작가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던 와중.
성녀는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뽀득뽀득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결국 루크가 유즈 님을 덮쳤나 보죠, 뭐. 전에 본 야설에 적혀있던 것처럼."
평민이 귀족을 덮쳤나 보죠. 당신이 쓴 야설에 적혀있던 것처럼.
그렇게밖에 들리지 않는 위험천만한 말이 성녀에게서 흘러나왔다.
만약 내가 찻잔을 들고 있었다면 분명 손에서 놓쳐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저 말을 뱉은 게 성녀가 아니라 다른 귀족이었다면 곧장 살려달라 땅바닥에 엎드렸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성녀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평탄했다.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그, 음…."
"맞죠?"
의도가 도대체 뭘까.
이걸로 협박하려는 느낌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보다는 정말 그랬냐고 확인차 물어보는 느낌이 강했다.
일단은 말을 아끼자.
나는 눈앞의 성녀를 따라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이러저러한 정황을 조합해본 뒤에, '아! 유즈 님이 그 야설을 썼구나!' 같은 생각을 품고서."
"……."
"콱! 덮쳤다가 당황한 유즈 님께 화르륵…."
"……."
"아니면 말고요. 고작 추측일 뿐이니까요."
사소한 곳에서 오류가 있긴 하나 대부분은 맞는 말이었다.
어찌 되었건 유즈를 의심하고 확인해보기 위해 덮쳤다는 커다란 흐름은 정확하게 추측해냈으니까.
이걸 사실대로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해도 되려나.
째깍, 째깍, 시곗바늘 흘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휴."
턱을 괸 채 내 얼굴을 올려다보던 성녀는, 자기 뜻을 알아채지 못해 답답하다는 듯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루크가 저번에 저한테 말했었잖아요. 직접 쓴 소설 아니라고. 오해하지 말라고."
"…예."
"그러면 당연히 그 소설, 아니, 야설은 저를 포함해서 아카데미에 있는 귀족들 중 누군가가 썼겠죠. 저는 아니지만."
차마 귀족의 앞에선 직설적으로 꺼낼 수 없었던 말.
귀족들 중 누군가가 범인이다.
그 말이 나 대신 성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일단 확인부터 할게요. 잠깐만 기다려요. 펜이랑 종이 가져다줄 테니까."
성녀는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필기구와 푸른색의 노트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
머뭇머뭇 페이지를 펼쳐보니, 성녀가 가져온 것은 얼음 마법의 공식이 빼곡히 적힌 연습장이었다.
빙결. 전도. 증발. 건조. 압력.
그리고 내 머리론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마법 공식까지.
필체가 섬세하고 유려하긴 하나, 그런 것에 감탄하고 있기엔 눈앞의 공식이 너무나도 괴랄했다.
글이라기보단 그림을 보는 듯한 시선 도중, 끄트머리에 다람쥐 장식이 달린 귀여운 필기구가 시야에 쏙 들어왔다.
"자요. 이걸로 마지막 페이지에다가 한 번 써봐요."
"…뭐라고 쓰면 될까요?"
"음…. 마음 같아선 소설 속에 있었던 문장을 다시 써보라 시켜보고 싶긴 한데."
톡, 톡, 검지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성녀.
"저는 이슈타르 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라고 써봐요."
"이슈타르?"
"제 이름이에요. 10살에 성녀가 된 뒤론 딱히 쓸데도 없지만."
"아…."
"본명을 가르쳐준 남자는 루크가 처음이네요. 아무튼, 써봐요. 얼른."
성녀의 비밀을 하나 알게 되었다, 따위의 감상은 금세 사라졌다.
그 대신 이럴 때도 장난이나 치고 있나, 라는 감상이 뒤를 이었다.
나중에 다쳐서 성녀를 찾아올 때마다 저 문장 하나로 얼마나 나를 놀려먹을지 걱정이다.
그래도 뭐, 차라리 대답하기 곤란한 섹드립을 치는 것보단 이게 나으려나.
성녀가 건네준 펜을 붙잡은 나는 그녀의 노트 가장 뒷부분에 조그맣게 글씨를 써 내리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일부러 악필로 쓴 거 아니냐는 소리를 피하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여서.
─
저, 루크는 이슈타르 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그럼에도 저번에 읽은 야설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수준의 글씨가 노트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어째 이렇게 보니 편지 마지막에 쓰는 서명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이 정도면 괜찮나요?"
"거꾸로 봐도 알겠네요. 글씨 참 못쓴다는 거."
"…좋은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해는 풀 수 있겠네요."
"애초에 오해한 적도 없어요. 루크의 반응이 재밌어서 작가님이라 놀려댄 것뿐인걸요."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 날 중간 즈음부터 성녀의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듣고 반쯤 눈치채지 않았던가.
이 여자 분명히 나를 가지고 놀고 있는 중이라고.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한 나는 필기구와 노트를 성녀에게 돌려주었다.
잠시동안 노트를 펼친 채 내가 쓴 문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성녀.
입꼬리가 헤벌쭉 휘어진 걸 보니, 글씨가 더러워서든, 어떻게 놀려먹을지 생각나서든, 아무튼 간에 즐거우신 모양이다.
"흠, 흠! 좋아요. 글씨를 보니, 루크가 쓴 글이 아니란 건 확실하네요."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죠?"
성녀는 탁, 소리가 나도록 양손으로 책을 덮더니 품에 꼭 끌어안은 채 말했다.
"제가 도와줄까요?"
"도와준다니요?"
"누가 야설을 썼는지 찾고 싶잖아요."
"……."
"이미 유즈 님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는데…. 혹시 모르죠. 부끄러워서 한 번 튕긴걸 지도? 그리고 오히려 이번 일을 핑계로 더 거칠게 따먹히고 싶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구요."
그리 말한 성녀는 아까보다도 더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자신은 그 야설과 전혀 관계없다는 것처럼.
한편으론, 범인을 눈앞에 두고 자꾸만 다른 길로 새는 내가 우스운 것처럼.
"저는 요즘들어 백야 님이 엄~청 수상하던데."
방금까지만 해도 하품을 하고 있던 성녀는, 장난스럽고도 믿음직하지 못한 미소를 입가에 걸친 채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