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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야설을 주웠다-22화 (2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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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 님.

루크 님이라.

"……."

방금 들었던 목소리를 몇 번 더 되새긴 나는 순식간에 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나 지금 그렇게 피곤한가?'

그렇게 잘못된 추론은 아니었다.

아침에는 백야와의 어린이용 성교육 교실.

낮에는 카엔과의 어른용 성교육 교실을 질펀하게 열지 않았던가.

이래저래 신경 쓸 것도 많고, 땀도 잔뜩 흘린 탓에 온몸에 피로가 누적된 모양이다.

게다가 어젯밤 백야의 필체와 야설의 필체를 대조하느라 잠을 푹 자지 못한 것도 원인 중 하나이리라.

그러지 않고서야 저런 단어가 귀에 들어올 리….

"루크, 님…."

없는데.

"루크 님…. 루크 님…."

나는 대답도, 연기도, 둘 다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유즈 님. 그, 꼭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요?

─도려내는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눈에 그런 새카만 액체를 들이붓는다는 것 자체가…… 끄아아악!!

─입 다물어.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위험해. 아마도.

─끄윽…. 끅…….

─유즈 님. 더 이상은 뱃속에 안 들어갈 것 같은데요….

─참아. 내 계산이 맞으면 아직 한참은 더 마셔야 해.

─하지만, 이게 참는다고 참아지는 게…….

─참을 수 있는 데까지는 참….

─……우웨엑….

─유즈 님. 그건 진짜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유즈 님…? 저 갑자기 소리가 안 들리는데….

─유즈 님.

─유즈 님.

─유즈 님.

"…루크 님……. 헤헤…."

내게 가슴을 쥐어짜이고 있는 유즈는 제 가슴 위에 양손을 다소곳이 올린 채 같은 말을 반복했다.

루크 님, 이라고. 의미불명의 수식어를 내 이름 뒤에 붙이고는 고개를 푹 숙인다.

뒤이어 들려오는 조그마한 웃음소리.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천진난만한 웃음소리였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흥분하게 되었을 땐 이성을 놓는다고 했지, 기억을 잃는다고는 덧붙이지 않았다.

생생하지 않을 뿐, 어떤 행위를 저질렀는지 단편적인 흔적은 남아있던 탓이다.

나보다 훨씬 똑똑한 여자인 유즈가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그런데도 저렇게 이상한 짓을 저지른다는 뜻은….

"……."

결국 자연스레 머릿속에서 한 가지 말도 안 되는 결론이 튀어나왔다.

내가 너무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같은 병신같은 결론은 아니다.

그것보다 몇 배는 더 병신같다.

'사실 유즈가 모든 일을 꾸미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라는 결론이다.

실제로 유즈의 필체를 본 적은 없으나, 신분도 높고 하루 종일 무언가를 쓰고 있으니 훌륭한 필체를 가졌을 가능성이 높다.

야설에 쓰여있던 대로 거칠게 강간당하고 싶어서 날 괴롭혔다는 것도, 온갖 약물을 쓰던 그녀라면 충분히 충족하고도 남는다.

여기에 만약 그녀가 항상 주던 새빨간 알약이 '발정제' 였다면?

그 안에 흥분했을 때의 기억을 잃게 되는 물질도 포함되어 있었다면?

내 상태를 착각한 유즈가 모든 기억을 잃게 될 거라 생각하고 섣부르게 본심을 드러낸 거라면….

"루크 님. 아파요…."

그러면,

안 되는데.

'…카엔은 그러면 대체….'

이상하다.

만약 유즈가 작가라면, 침대에 코를 박은 채 마구 강간당한 카엔은 진작에 날 죽여버리려고 해야 하지 않나?

아니야.

그보다 더 이전부터 짚어야 한다.

카엔의 저택 앞에서 우연히 그녀를 마주쳤을 때, 그 귀여운 주먹으로 내 몸을 퍽, 퍽, 두들겨 패기라도 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침실로 나를 끌어들여 만신창이로 강간해달라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대기나 했지.

직접 내 방에 찾아와 펠라치오까지 해주고, 결국 실신할 때까지 섹스해버린 그녀가 작가라는 게 훨씬 설득력 있긴 한데.

"……."

"……루크… 님?"

그렇게 되면.

유즈, 너는.

도대체 뭐야.

"루크…?"

무언가 이상한 걸 느낀 나는 얼떨결에 유즈의 가슴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빼버리고 말았다.

이런 극상의 가슴을 마음대로 쥐고 있다는 정복감 보다, 도대체 무슨 상황에 휘말린 거지, 하는 당황스러움이 더 컸기 때문이다.

쥐어짜이고 있던 가슴에서 내 손이 떨어지자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서서히 들어올리는 유즈.

그녀 본인도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눈치챘다는 듯, 숨이 막힐 정도로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루크."

10분같은 10초를 보낸 후.

겨우 마주한 유즈의 얼굴은 조금 전과 다를 바 없었다.

하얗게 보일 정도로 이글거리는 홍염의 눈동자.

홍조 하나 띄우지 않은 매끄러운 뺨까지.

유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내 눈을 뚫어져라 노려보기 시작했다.

"……."

"……."

침이 바싹 마를 정도로 어색한 침묵.

그녀가 먼저 입을 열 생각은 없는 듯했다.

"유즈 님."

"……."

"왜 그러셨어요?"

혹시 모르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도.

"뭘?"

하지만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유즈.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시간을 벌어 변명거리를 떠올리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저한테 존댓말 쓰셨잖아요."

"내가?"

"……네."

"착각하지 마. 그런 적 없어."

하지만 적당한 답을 찾아내지 못한 모양이다.

시치미를 떼다니.

변명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변명을 고른 것이다.

"루크 님, 이라면서요."

"잘못 들었나 보지."

"아뇨.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 잘못 들었을 리가 없죠."

"……."

찰나동안 옆으로 향한 유즈의 눈동자가 황급히 나를 향했다.

이 대화에서 승기를 잡기 위해선, 기세에서 지면 안 된다고 판단한 듯하다.

생각보다 뻔뻔한 여자였다.

"루크, 님?"

"예."

"내가? 너한테?"

"예."

다시 한 번 시간을 벌기 위해 말꼬리를 잡는 유즈.

그래봤자 대단한 변명을 떠올리기엔 한참이나 부족한 시간이다.

그렇게 의미 없는 시간을 흘려보낸 뒤, 유즈의 입에서 차악의 변명이 튀어나왔다.

"기억 안 나."

"……."

"무엇보다, 내가 너한테 그럴 이유가 없잖아."

논쟁 자체를 회피해버리는, 상대방보다 자신이 유리할 때만큼은 무적에 가까운 변명이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골랐을 때나 차악이지, 그녀로서는 지금 고를 수 있는 것 중에서 최선의 변명이 아니었나 싶다.

"이깟 가슴 좀 만지게 해줬다고 우쭐해진 모양인데, 말조심해. 다음엔 너그럽게 봐주지 않을 테니까."

주도권을 잡았다 싶으니 어떻게든 이 대화를 끝맺으려는 게 자연스레 느껴졌다.

어이없다는 듯 내뱉는 저 한숨에서도, 어쩐지 안도감이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 아니리라.

쥐어짜이느라 구겨졌던 옷을 대충 가다듬은 유즈는 드르륵, 의자를 물려 제 책상 가까이로 다가갔다.

자신이 불리한 대화는 이것으로 끝.

이제 다시 평소와 같은 실험체 1과 마녀의 관계로 돌아가자는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

그래선, 안 된다.

"유즈 님."

"……왜. 또."

뭐라도 좋으니 하나라도 얻어가는 게 있어야 했다.

유즈의 필체.

유즈의 진심.

유즈의 욕망.

아니면, 약의 정체라도.

"발정제, 인가요?"

도박수를 던졌다.

테이블에 잠시 올려두었던 약을 곧장 입안에 털어 넣은 나는, 끔찍한 맛의 시약까지 목 뒤로 넘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엔 쓴맛에 혀를 내두를 뿐 아무렇지도 않았던 약이, 발정제라고 확신한 채 먹으니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무슨무슨 효과라고 어려운 이름이 있었던 것 같은데.

몰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루크. 적당히 해."

"발정제냐고요."

책상 가까이 의자를 물렸다는 것은 다시 말해 도망칠 공간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유즈의 코앞까지 다가간 나는 그녀를 향해 불쑥 상체를 들이밀었다.

"기분 나빠…."

의자 손잡이는 이미 내게 제압된 상태.

나를 노려보던 유즈는 결국 불결하다는 듯 내게서 살짝 몸을 피했다.

아까 가슴을 쥐어짜고 있을 땐 그 느낌을 잊지 않으려 집중하느라 몰랐는데.

유즈의 목덜미에선 부드러운 라벤더 향이 피어올랐다.

"…3초. 그 안에 떨어지지 않으면 태워버릴 거야."

"해보던가."

버릇없는 반말.

직후, 잠깐동안 유즈의 숨이 멎는다.

당연히 유즈의 정체를 야설 작가라 확신한 것은 아니다.

카엔은 이미 강간까지 해버린 상태.

유즈는 아직 심증만 남아있을 뿐이니까.

하지만 그녀가 내게 존댓말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흥분한 줄 알고.

기억을 잃을 줄 알고.

내 이름에 '님' 자를 붙여가며 헤실거렸단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유즈가 제대로 된 변명을 내뱉지 않는 한.

내가 마음대로 착각해버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실험 자체가 '기억을 잃을 정도로 흥분시키는 방법'을 찾기 위한 실험… 이라고.

남성과 마력 간의 상관관계 같은 건, 모조리 핑계일지도 모른다.

"하나."

유즈의 입술이 떨어진 순간, 나는 곧장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었다.

생각보다 차가운 감각.

의자와 그녀의 몸이 겹친 공간엔 지금껏 흠뻑 배인 살내음이 가득했으나, 신기하게도 전혀 역겹지 않았다.

향긋하고도.

야릇했다.

비슷한 향을 최근에 맡아본 적 있었다.

다름 아닌, 침대에 엎드린 채 실신한 카엔의 목덜미와 꼬리에 내가 교미의 흔적을 잔뜩 남겨줄 때였다.

"…둘."

내 가슴을 살포시 밀어내며 속삭이는 유즈.

그녀의 손을 콱 붙잡아 떨쳐버린 나는, 아까보다도 힘껏 유즈의 젖가슴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고통. 쾌락.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아프면 아픈 거고, 기분 좋으면 기분 좋겠지.

유즈가 어떨지는 생각하지 않은 채, 내 기분이 좋아지는 것만 떠올렸다.

방금까지 떳떳한 척 내 몸을 밀어내려던 여인을 강제로 추행하는 맛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달콤했다.

끄트머리의,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한 돌기를 집요하게 꼬집으며 잡아당겼다.

어찌나 큰 젖가슴인지 목덜미에 코를 박은 채로 하자니 자세가 잘 나오지 않았지만, 밑을 향해 잡아당기니 그나마 손을 움직일만한 공간이 나왔다.

반대 손으론 가슴을 꽉 쥐어짜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맨살을 만지기 위해 몸 이곳저곳을 더듬어나갔다.

필요하다면 옷을 찢어버릴 생각도 있었다.

그만하라는 듯 유즈의 손이 내 손목을 붙잡았으나, 그뿐이었다.

나는 내 손목에 유즈의 손을 팔찌처럼 단 채, 허리춤까지 손을 내렸다.

"……셋."

유즈가 약속한 시간.

3초라기엔 10초 가까이 걸린 것 같지만,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그러기엔 내 입이 너무 바빴던 탓이다.

마녀답게 여리여리한 어깨를 이빨로 콱 물어보기도 하고.

젖꼭지를 쥐어짜이며 흠칫 거리는 유즈의 귀까지 올라가 입 안에 가득 씹히는 머리카락과 함께 타액을 묻혀주기도 하고.

옷 위로 유즈의 젖꼭지를 씹어대기 위해, 군청색의 옷 위에 그보다 더욱 진한 침 자국을 남기며 밑으로 얼굴을 내린 탓이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흥분했나.

잘 모르겠다.

"……셋, 이라고…."

아까보다 훨씬 더 흐릿해진 목소리가 성욕에 불을 지폈다.

슬슬 바지 속이 답답할 지경이다.

해도 되나.

해버릴까.

하자.

입술이 유즈의 윗가슴에 닿고.

허리춤까지 다다랐던 손이 결국 그녀의 맨살을 거칠게 훑기 시작했을 무렵.

─화르륵

짧고 섬뜩한 소리와 함께 눈 앞이 캄캄하게 암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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