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니?"
북쪽 구역.
부랴부랴 야크툰 교수의 개인실 청소를 하던 와중,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와 손을 멈췄다.
좋은 일이라.
아무래도 찔리는 게 있었던 나는 코까지 올려 쓰고 있던 마스크를 내리고 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사각, 사각
원소 마법학 교수.
야크툰 폴리네어.
내년이면 불혹의 나이에 들어서는 그녀는, 옆에서 청소하는 중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복이 펼쳐진 종이 위에다 이상한 기호들을 정교하게 그려넣는 중이었다.
아까 듣기론 최근에 연구 중인, 확산에 이용하는 마력의 질을 높이는 회로 중 일부라고 하던데.
검밖에 휘두를 줄 모르는 바보라 설명을 들어도 잘 모르겠다.
"좋은 일이요?"
들어올 때부터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그렇게 티났나?
종이들에서 시선을 돌린 나는 빗자루를 꼭 쥔 채 못 알아들은 척 되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각사각 펜을 놀리며 말을 잇는 그녀.
"아니, 들어올 때부터 심심찮게 콧노래를 부르길래."
야크툰 교수는 조금 전 나눠주었던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 옆에 마련해둔 커피를 홀짝였다.
저렇게까지 몸을 혹사해가며 연구에 매달려야 하나.
검사인 나로선 '마녀'들의 감각에 공감하기 꽤나 어려웠다.
"제가요?"
"어. 네가요. 빗자루 소리까진 상관없는데, 그 이상한 소리는 참아주었으면 해서."
집중 안 돼.
그리 덧붙인 야크툰 교수는 제 할말은 끝났다는 듯 다시 마스크를 올려썻다.
카엔과 이상야릇한 관계가 되었다는 기쁨에 무심코 흥얼거리기라도 한 걸까.
기억에 없는 일이지만, 이렇게 방해된다고 지적을 받을 정도니 신경 쓰는 게 좋을 듯하다.
"예. 교수님. 주의하겠습니다."
"아, 잠깐, 그러고보니… 너…."
탁, 펜을 내려놓은 그녀는 마녀들 특유의 피곤함이란 단어를 빼다 박은 듯한 동공으로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으음…. 됐어. 괜찮겠지."
그리고는 사람 답답하게 하는 화법과 함께 펜을 붙잡는다.
또다시 개인실 안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는 사각사각 종이를 긁는 소리.
'…뭐지.'
혹시 뭔가 들켰나 싶어서 조마조마하던 나는 가슴을 쓸어내린 뒤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
건물 밖으로 걸어나오니 아름답게 불타오르는 노을이 건물 사이로 빛을 흩뿌렸다.
몇 번인가 시끄럽다며 야크툰 교수가 구긴 종이뭉치가 뒤통수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어쨌든 해가 지기 이전에 청소를 끝마쳤으니 다행이었다.
'밤에 가면 눈치보느라 머리가 아프니까….'
유즈와 약속했던 시간은 22시.
별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그 이전까지 연구동에 도착하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하나,
그간의 경험에 따르면 해가 진 이후에 유즈의 연구동을 방문하는 건 조금 더 귀찮고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뭐라 정확히 비유하긴 어려운데.
애시당초 무뚝뚝해서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굉장히 차가워진다고 해야 하나.
안 그래도 피곤함에 절여져 24시간을 보내는 마녀들인데, 그 시간쯤 되면 정신력으로 버텨서 그런 모양이다.
나는 도시 계획 없이 세워진 듯한 골목길을 누비며 북쪽 구역의 최북단으로 걸어갔다.
길 꼬락서니를 보니 여기도 곧 청소하라는 명이 떨어질 것 같다.
간혹 마주치는 교수들에게 꼬박꼬박 허리를 숙이며 도착한 곳은, 5층짜리 건물도 흔한 이곳에서 비교적 아담한 3층짜리의 건물이다.
하지만 이 건물을 혼자서 쓴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다른 건물엔 보통 교수 7~8명이 구역을 나눠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혼자서, 가끔은 레나스 제국의 황녀와 둘이서 쓴다는 게 이상하긴 하나 한편으론 '그럴 수도 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유즈도 그렇고. 황녀도 그렇고.
내까짓게 감히 평가할 수 없는 사람들이니까.
신분 높고 돈 많으면 이런 것까지 되는구나, 하고 대충 받아들여야지.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덕에 반짝반짝 빛나는 대리석을 밟고 안으로 들어섰다.
걸음을 옮길수록 건물 전체에 퍼진 이름 모를 약품냄새가 아릿하게 코끝을 스친다.
이 건물을 들리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땐 맡을 때마다 표정을 찡그린 냄새였으나, 이젠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다.
오늘도 뭘 마셔야 하나?
지금껏 마셔본 것들은 하나같이 맛대가리가 없어서 알약만 먹으면 좋겠는데.
언제나처럼 이상한 색채의 약물이 든 플라스크, 그리고 회로가 새겨진 종이로 가득한 1층에선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은 황녀가 아카데미에 있을 때 사용하는 공간.
그리고 유즈가 내 몸으로 이것저것 실험하는 곳은 2층이다.
혹여 이러다 해가 질까 싶어 빠른 걸음으로 구석에 마련된 비좁은 계단을 올랐다.
그나마 조그마한 창문이 나있던 1층과 달리, 이곳엔 빛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상 이 건물을 독차지한 유즈가 2층 창문 하나하나마다 죄다 암막 커튼을 쳐버린 탓이다.
어차피 실내조명으로 해결되는 일이니,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자연광은 전혀 필요 없다고.
벽면을 따라 일렁이는 푸른 불꽃을 보니 아직까진 유즈가 낮이라 정한 시간이었다.
계단을 거의 다 올랐을 무렵,
벽면을 바라보던 시선을 정면으로 옮겼다.
때에 따라 수평으로 눕힐 수도 있는 커다란 의자.
보글보글 불길한 소리를 내며 끓어오르고 있는 의미불명의 분홍색 시약.
새빨간 잉크가 덧칠된 채 대충 구겨져 바닥을 나뒹구는 수많은 종잇조각들.
그 위에.
"후우……."
잿빛.
군청색.
그리고,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밝게 빛나는 붉은 색.
딱 한 부위만을 제외하곤 칙칙한 색으로만 점칠된 여인.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유즈 베르나'는, 엉망진창 어질러진 풍경과 함께 미간을 짓누르고 있었다.
반대 손 끝엔 평소 글을 읽을 때 쓰던 안경을 꼭 붙잡아 늘어뜨린 채.
"……."
들어올린 팔꿈치보다 더욱 앞까지 튀어나와 자기주장을 하는 젖가슴에선,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유즈 님."
"…왔구나. 앉아."
인사를 건네보려 했으나 언제나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게다가 마치 잠에 취하기 직전처럼 느릿하고 몽롱하기까지.
쭈뼛쭈뼛 의자로 향하자, 피로에 흐트러진 잿빛 머리카락 밑에서 흉흉히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힐끔 나를 향한다.
뭐지. 벌써 실수라도 했나.
고작 세 걸음 걸었을 뿐인데 자연스레 몸가짐이 조심스러워진다.
"루크."
"네. 유즈 님."
"앉기 전에, 시약이랑 알약."
그냥 날 바라봤을 뿐이구나.
유즈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아까 보았던 분홍색 시약이 거기 있었다.
청록색, 황토색이었던 저번과 달리 이번 시약 색은 예쁘긴 한데, 아마 저것도 끔찍한 맛일 것이다.
숨을 참고 먹어도 느껴졌던 끝내주는 뒷맛이 떠올라 절로 표정이 찌푸려졌다.
선반에 다가간 나는 플라스크를 챙기고 근처에 있는 알약 더미에서 약 하나를 꺼내들었다.
"음…."
이 새빨간 알약.
유즈의 말을 빌리자면, 실험 결과를 확실히 하기 위한 약인데.
도대체 정체가 뭘까.
다행히 이번엔 결과가 좋았다지만, 이성을 잃고 본능대로 움직인다는 게 썩 좋은 경험은 아니니 말이다.
지금껏 살아오며 그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 아무래도 이 녀석이 범인 같긴 한데….
의자로 돌아가며 물어볼 타이밍을 재려 했으나, 잠깐 잠이라도 자는 듯 꾹 눈을 감은 채 전혀 눈길을 주지 않는 유즈.
어찌나 가슴이 큰지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니 손을 힘껏 펼쳐도 윗가슴을 다 못 덮을 듯하다.
결국 유즈는 내가 의자에 앉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앉아있던 의자를 느릿느릿 회전시켜 내 쪽을 바라보았다.
"…보고."
"네?"
"이번 주 경과. 보고."
"아."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입술을 움직이려다 그대로 꾹 닫아버렸다.
이번에도 뭐, 별일 없었는데요.
그렇게 대답해도 괜찮을지 고민인 탓이다.
유즈가 명령했던 보고는 총 두 가지.
1. 마력을 운용하는데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변화가 생기면 즉시 보고할 것.
2. 몸도 마찬가지. 변화가 생기면 즉시 보고할 것.
이 중 1번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2번 몸의 변화는 분명 있었으니까.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진 모르겠고.
야한 쪽으로.
"…음."
아마 유즈가 원한 변화는 이게 아닐 테지만.
카엔이랑 그런 관계가 되어버렸단 이야기만 잘라내면, 말하는 것 정도는 딱히 문제가 없을 것 같다.
"하나 있긴 한데…."
조심스레 운을 띄우자 반쯤 감겨있던 유즈의 눈꺼풀이 천천히 위로 올라온다.
덕분에 어둠 속에서도 아름답게 빛나는 불꽃색의 눈동자가 시선에 한 아름 잡힌다.
저또한 사람이 마력을 운용할 때 생기는 변화 중 하나였다.
당장 이 건물 안을 밝히고 있는 푸른 불꽃 또한 그녀의 마법 중 하나였으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입고 있는 하늘하늘한 옷조차 딱딱한 무채색으로 뒤덮인 여인.
그 사이에 박힌 불타오르는 눈동자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떤 변화?"
여전히 낮고 차가운 목소리.
하지만 사뭇 들뜬 듯이 들리는 것은 착각이 아닐 것이다.
"어…. 막 대단한 변화는 아니지만요."
"상관없어. 영향이 있었다는 게 중요해."
"대신 하나만 부탁드릴게요."
"…부탁?"
유즈의 고개가 살짝 기울며 잿빛 머리카락이 뺨을 따라 밑으로 미끄러졌다.
"이 알약. 정확히 무슨 효과인지 알려주세요."
"…알려줬잖아. 그걸 먹어야지 애매모호한 결과가 아니라 확실한 결과가 도출될 거라고."
"그 말 자체가 애매모호하잖아요."
"……."
유즈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괜히 협상을 시도했나.
딱딱하게 경직된 공기 탓에 숨 쉬는 걸 의식해야 할 지경이었다.
"…안 돼."
조그마한 목소리를 내뱉어오는 유즈.
"정확하게는 못 알려 줘."
"어째서죠?"
"무슨 약인지 알게 되면 그것에만 집중하느라 결과에 영향이 갈 테니까."
"…?"
"예를 들어, 수인처럼 꼬리가 돋아나는 약이라고 알려주면 다른 변화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엉덩이만 신경 쓰게 되겠지."
"어…."
"그건 바람직하지 않아."
나는 묘하게 그럴싸한 유즈의 주장에 말문이 막혔다.
게다가… 꼭 유즈를 설득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금 와서 꼭 약의 정체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카엔의 앞에서 문제가 크게 터지긴 했지만, 결국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던가?
누가 일부러 몸으로 유혹하지 않는 이상, 또 그런식으로 흥분하게 될 일은 없을 것이고.
알려주기 싫어하는 것 같은데, 어차피 누가 야설을 썼는지도 알아냈겠다, 그냥 신경쓰지말까.
그렇게 흥미가 식어가던 와중 들려오는 또 다른 제안.
"……뭐, 네 마음도 모르는 게 아니니 이렇게 하자."
유즈는 슬쩍 내 손에 들린 알약과 플라스크를 흘겨보았다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네가 먼저 말해. 그게 내가 의도한 변화가 맞으면 무슨 약인지 조금은 알려줄게."
"조금이요?"
"그래."
꼭 알아내야겠단 결심이 사라지고 나니 그렇게 끌리는 제안은 아니었다.
조금이나마 궁금증을 해소했다는 느낌으로 만족하는 게 좋으려나.
"만약 약의 정체가 엉덩이에서 꼬리가 돋아나는 약이라면, 엉덩이가 간질거리는 약… 정도겠네요."
"아마도. 그렇겠지."
"그 정도라면…."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혹여 문제가 될까 싶어 가장 사무적인 단어들을 골라낸 다음, 또박또박 내뱉었다.
"흥분하게 되면 이성이 뚝 끊어지는 것 같아요. 자제심 같은 게 거의 사라지고…. 예전까진 단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
"남아있는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다고 해야하나? 이게 정확한 비유는 아닐 수도 있지만요."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정답이라는 대답도.
오답이라는 대답도.
눈 앞의 유즈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듯 내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틀렸나요?"
결국 내가 먼저 답을 매겨달라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즈는 내 얼굴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눈.
입술.
다시, 눈.
"…본능."
불길함을 느낀 것은, 그 직후였다.
"이상해."
"네?"
"이상하다고. 그런 결과는 나와선 안 돼. 아예 상정하지 않은 결과니까."
"그럼 그냥 부작용…."
"그럴 리가."
─드르륵
부작용이라는 경우의 수를 단칼에 부정한 유즈는 천천히 의자를 끌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빈틈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듯 목 아래부터 완전히 가려낸 육체 또한, 지척까지 다가온다.
가슴 밑으로 팽팽하게 늘어진 천.
그 탓에 한 손으로는 절대 쥘 수 없을 젖가슴이 부각된다는 건 전혀 모르는지.
부드러워 보이는 몸과 어울리지 않는 딱딱한 표정을 지은 채 내 옆으로 다가오는 유즈.
"재검증."
"네?"
"흥분하면 이성이 끊어진다고 했지?"
"그랬…긴 한데…."
"정확히 어떤 식이지?"
"유, 유즈 님?"
"지금은?"
그녀는,
내 눈 앞에서 직접 제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왜? 너 이거 좋아하지 않아?"
"자, 잠깐, 유즈 님, 그게 무슨…."
신의 축복을 받은 듯 그렇게 묵직함에도 불구하고 예쁜 모양으로 만들어진 가슴이, 그녀의 손아귀 안에서 마구잡이로 모습을 바꿔나갔다.
어떨 때는 양옆에서 꾹 짓누르기도.
어떨 때는 밑에서 위로 꽉 들어 올렸다가 다시 밑으로 내려놓기도 하면서.
어떨 때는 가슴을 한 손으로 꽉 짓이겨 손가락을 묻어가며.
자신이 이렇게나 훌륭한 암컷이라고 가르쳐주듯이.
"좋아하잖아. 내 가슴."
"그…."
"여길 들어올 때마다. 내 눈이 널 보고 있지 않을 때마다. 내가 눈을 감고 있다고 착각할 때마다."
"……."
"만져보고 싶다는 듯이 쳐다봤었잖아."
"……그게…."
"신경 안 써. 수컷들이 뭐 그렇지. 세계수에 있을 때도 다들 그랬으니까."
언제나의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고는.
어떻게든 나를 흥분시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흥분하냐는 듯.
의자를 끌어 내 옆으로 다가온 유즈는 계속해서 제 가슴을 만지작거렸다.
"흐음. 시각적인 자극 정도론 흥분하기 힘든 건가…?"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지.
…여자는 그런 시선에 민감하다더니, 다 알고 있었구나.
망연히 흘러가는 의식 속.
훅, 내뱉어지는 낮은 톤의 목소리가 상념을 부순다.
"자."
한 번 네 마음대로 해보라는 듯 제 젖가슴을 쭉 내밀어 오며, 거치적거리는 머리카락들은 손으로 한데 묶어 뒤로 늘어뜨리는 유즈.
"알아서 끊어. 네 이성."
겨드랑이를 든 채 그리 말하는 그녀는 이것도 실험의 연장선이라는 듯.
언제나처럼 딱딱한 무표정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