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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야설을 주웠다-13화 (13/66)

13

"여기서 뭐 해?"

갑작스레 등 뒤에서 나타난 카엔.

그녀를 눈앞에 둔 내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들이 마구 뒤엉켜 지나갔다.

이런 시간에 네가 왜 여기 있느냐.

당장 땅에 이마를 쳐박고 죄송하다고 빌어야 하나?

아무런 소리도 안 났는데, 어떻게 내 뒤에 서 있을 수 있었던 걸까.

지금 입고 있는 제복 중간에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는 부분이 있다고 알려주는 게 좋으려나.

그렇게 폭죽처럼 이리저리 튀어 오르던 잡념들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카엔의 허리춤에 걸린 새카만 검집.

그 끄트머리에 검자루가 제대로 붙어있는 것을 본 순간이었다.

지금 다른 건 그리 중요치 않다.

사지 멀쩡히 걸어나가고 싶다면 일단 어젯밤 일부터 사과하고 목숨을 구걸하는 게 정답일 것이다.

마침 발밑엔 조그마한 돌멩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

지금은 내 발 맞은편으로 앙증맞게 생긴 발 두 개가 시선 끄트머리에 나란히 튀어나와 있었다.

갑갑해보이는 남색 제복 안에 감춰진 카엔의 아담한 가슴까지도, 귀엽게 생긴 부츠와 함께 내 시선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다.

땅에 닿아있던 시선을 조금 올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눈동자를 옆으로 데굴데굴 굴리며 딴청을 피우는 카엔의 모습.

얘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카엔 님?"

"……."

"카엔 님."

대답이 없기에 한 번 더 불러보았으나 반응은 똑같았다.

나까짓게 카엔에게 대답 좀 하라고 보챌 수도 없으니 살짝 답답했다.

잠깐 땅에 머리 좀 박게 뒤로 가보라고 말하는 건 더더욱 할 수 없었고.

일단은 그냥 살짝 뒤로 가볼까.

카엔의 눈치를 보던 내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으나, 땅에 남은 흐릿한 발자국 위를 조그마한 발 하나가 덮는다.

새카맣고 윤기나는 부츠에 둘러싸진 조그마한 발.

주인이 누구인진, 굳이 올려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카엔의 발이다.

덕분에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면 먼 오묘한 거리가 우리 사이에 만들어졌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대로 카엔의 머리를 마구마구 쓰다듬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

물론 실제로 행동에 옮길 생각은 쥐꼬리만큼도 없지만.

아무튼 그 정도 거리였다.

이래선 도게자는 힘들 것 같고.

아무리 그래도 고개는 숙여야겠지.

후, 숨을 내뱉고 고개를 숙이려던 찰나, 갑작스레 카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 청소라도 하고 있었어? 주변이 꽤나 깔끔해졌네?"

피로에 젖은 눈빛으로 억지로 주변을 흘겨보던 카엔은 결국 천천히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속눈썹에 스칠 정도로 긴 앞머리에 카엔의 연보라빛 눈동자가 살포시 가려진다.

조금은 탁한 빛의, 그런 눈동자.

"네. 사실 어제 해야 했을 일인데, 사정이 있었다 보니."

"어제? 왜? 너 평소에 그런 거 잘 안 미루……."

말 끝을 흐리는 카엔.

카엔은 그대로 눈을 깜빡인 후, 한 바퀴 핑그르르 시선을 돌렸다.

동시에 날 가리키던 손가락이 차츰 굽어들고 있는 걸 보니,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대강 추측이 되었다.

아무래도 어젯밤 벌어졌던 일을 떠올리느라 말문이 턱 막힌 모양이다.

내 자지를 정성스레 핥다가, 결국엔 억지로 입안에 쑤셔 넣어질 뻔 했던 어젯밤 말이다.

"무,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보네."

"네?"

하지만 카엔에게서 돌아오는 것은 어딘가 이상한 대답이었다.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그렇잖아. 네가 열심히 일한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어젠 몸 상태가 안 좋기라도 했나 봐?"

"…네?"

진짜 모를 리는 없을 텐데.

"아니면 피곤해서 자느라 못했나?"

"……아."

카엔의 이상한 결론에 고개를 갸웃이던 나는 그제서야 그녀가 왜 내 앞을 막아섰는지 대강이나마 눈치챌 수 있었다.

사과받기 싫어서였다.

더 정확히는, 그냥 어제 일 자체를 통째로 지워버리고 싶어서.

사과받게 되면 어젯밤 있었던 사건을 인정하는 꼴이나 다름없으니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가자고.

평소처럼 지내고 싶다고.

카엔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하긴, 귀족씩이나 되어 내게 그런 꼴을 당하다니 억만금을 주어서라도 지우고 싶은 과거일 것이다.

아예 나를 없애는 것으로 완벽히 사건을 묻을 수도 있지만, 카엔이 그 방법을 선택하지 않은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네. 그저께 밤새 도서관 청소를 했더니 너무 졸려서요."

"그… 랬구나. 하하…."

어색하게 웃는 카엔.

그녀의 입술 위로 한층 더 어색한 미소가 삐뚤빼뚤 그려진다.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거짓말엔 영 재능 없는 여자였다.

"그럼, 카엔 님."

"어, 어?"

"먼저 가봐도 괜찮을까요? 청소해야 할 곳이 좀 많아서요."

나는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실 남은 곳은 카엔의 저택 앞이 전부였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아무리 카엔이 관대히 넘어가 주겠다고 해도 그녀와 예전처럼 지낼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녀와 내가 단둘이 마주하게 된다면, 어젯밤의 기억이 책갈피처럼 따라다닐 것이다.

나는 괜찮다 하더라도 카엔에겐 무척이나 짜증 나는 기억일 테니까.

앞으로 카엔이 있는 곳은 최대한 피해 다니는 게 좋겠지.

"벌써? 많이 바빠?"

"네. 이 뒤엔 야크툰 교수 님의 개인실 정리도 하러 가야 하고, 유즈 님의 연구실에도 들려야 해서요."

"그러고 보니 무슨 실험을 한다고 했었지."

"남성이 어떻게 마력을 다룰 수 있는가. 뭐 대충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저도 잘 모르겠네요."

최대한 평소처럼 이야기를 나눠보려 했으나, 아니나 다를까 예상한 대로 묘한 어색함이 묻어나왔다.

일단은 저 카엔의 목소리부터가 문제다.

언제나 느껴지던 장난스러움, 그리고 짓궂음은 모두 수면 아래로 숨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주치기만 하면 이리저리 들러붙어서 귀찮긴 했어도 싫어하는 것 까진 아니었는데.

내 손으로 망가뜨린 관계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어?"

자연스레 쓴웃음을 지은 나와 달리, 카엔은 왠지 모르게 '큰일 났다!'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평소엔 작별 인사를 하며 고개만 까닥이곤 했으나 오늘은 허리까지 깊숙이 구부렸다.

나름 어젯밤 일에 대한 사과를 담아서.

끝맺음은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으니 말이다.

하지만 카엔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지척까지 다가와 있던 두 개의 앙증맞은 발 또한, 끝까지 제자리에 박혀있었다.

그러다가 툭, 튀어나오는 조그마한 목소리.

"벼, 변태."

"네. 카엔 님."

"정말 그렇게 바빠? 30분 정도도 안 돼?"

천천히 고개를 든 나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30분.

그 동안 백야처럼 올바른 성에 대해 잔소리라도 할 생각일까?

아니야.

없는 일로 하려던 것 같은데 굳이 그러진 않겠지.

그렇다면 왜 30분이란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짚이는 곳은 딱히 없었기에 결국 카엔에게 이유를 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그거야 당연히……."

"……?"

"네가…."

"……."

"네가 먼저……. 네가, 먼저……."

카엔은 같은 말만 반복하며 한참을 뜸 들였다.

나를 올려다보았다가, 시선을 피했다가, 아랫입술을 짓씹으면서.

잠시 뒤.

"내 몸 맘대로 만졌잖아……. 나쁜 새끼야…."

끓는 찻주전자처럼 픽 새어나오는 목소리가 우리 사이에 울려 퍼졌다.

****

"절대 들어 오지 마. 30분간. 키아라 네가 생각하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날 테니까, 관심 가지지 말고, 다과도 준비하지 마. 그렇게 다 안다는 듯이 싱글벙글 웃지도 말고. 1층에서 가만히 기다려. 가만히. 제발."

2층에 있는 방까지 나를 끌고 들어온 카엔은 메이드에게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내곤 문을 닫았다.

밖에서 보았을 때도 그리 커다란 저택은 아니라 생각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안쪽도 마찬가지였다.

뭐라고 해야 좋을까. 별장 같은 느낌?

별장을 가져본 적은 없다만,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을 듯하다.

현관부터 계단, 복도에 이르기까지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는 동안 잠깐 머무를 용도의 집이란 느낌이 무척이나 강했다.

귀족들은 다들 벽면에 초상화나 가훈 같은 걸 잔뜩 매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평범했다.

생각보다는.

카엔의 방 또한 크게 다른 것은 없었다.

살짝 채도가 낮은 하얀색의 벽지에 둘러싸인 커다란 공간.

그 한구석엔 사람 세 명 정도는 거뜬히 재울 수 있을만한 침대가 하나 놓여있었다.

"후우…. 이 정도면 괜찮겠지…. 진짜 들어오기만 해 봐."

책상이니, 전신 거울이니, 이런저런 가구들이 예쁘게 배치되어 있긴 했으나 내 신경은 오로지 침대로 향했다.

진짜 하는 건가?

저택 입구에서 카엔에게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귀가 의심될 지경이다.

"변태. 여기 앉아."

카엔은 먼저 침대에 걸터앉은 채 자기 옆자리를 톡, 톡, 두드렸다.

청소하느라 몸 이곳저곳 먼지나 모래가 묻어있을 텐데 딱히 괘념치 않아 하는 모습이었다.

어차피 메이드가 알아서 할 테니 그런가 보다.

떨떠름하게 문 앞에 서 있던 나는 살며시 카엔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조금 더 들어가. 이러면 자리가 없잖아."

"그게, 진짜 하실 겁니까?"

"어. 할 거야. 아니면 뭐, 법의 심판이라도 받고 싶어?"

"…아뇨."

"넌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이걸로 어제 일을 용서받으면 너도 좋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오금이 침대 모서리에 맞닿을 정도로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아까 카엔을 마주쳤을 때만 해도 어젯밤에 있었던 일을 없는 셈 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지금 눈앞의 카엔은 오히려 그걸 들먹이며 나를 협박하고 있었다.

곱게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를 재판장으로 보내버리겠단 식으로.

잠깐 동안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나로서는 알 방법이 없었다.

"다리를 좀 더 벌려 봐."

"팔도 벌려. 어깨너비로."

"허리는 직각. 필요하면 앞으로 조금 기울여도 괜찮아."

내 옆에 딱 붙은 채 이것저것 지시하는 카엔.

그녀의 요청을 하나하나 수용하다 보니, 조금 이상한 자세가 되고 말았다.

이걸 벽에 붙은 채로 했다면 운동 자세 중 하나랑 비슷했을 것 같은데.

침대에 앉아서 이러고 있자니 카엔의 의도가 대체 뭔지 궁금해질 뿐이었다.

"카엔 님. 하나만 여쭈어봐도 괜찮을까요?"

"뭐가 궁금한데?"

"아까 저택 앞에서 그러셨잖아요. 제가 먼저 잘못을 저질렀으니, 카엔 님도 마음대로 제 몸을 다루겠다고."

"그랬지."

"그…. 정말 이것만 하면 끝나는 건지 궁금해서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굳이 침실까지 나를 끌고 왔을 때 실낱같은 기대를 품긴 했었다.

카엔이 작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어젯밤을 계기로 그런 쪽 취향에 눈을 뜬 게 아닐까.

한 번 더 내게 강제로 당해보고 싶어서 이러는게 아닐까.

하지만 지금 내 자세로 미루어보아, 아쉽게도 그런 뜻으로 날 부른 건 아닌듯했다.

"아직 남았어. 기다려 봐. 심호흡 좀 하고."

어째 저건 내 방을 찾아와 펠라치오 하기 전에 심호흡했던 모습과 비슷한 것 같은데.

도대체 뭘 하려는 건지….

"후…. 좋아. 시작할게."

카엔은 그리 말한 직후 내 옆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문도 잠시. 곧바로 내 앞에 서더니 뒤로 핑글 돌아 꼬리를 살랑거린다.

밑에서 올려다본 탓일까.

비교적 조그마한 키와 달리 카엔의 골반만은 다른 여자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이 자세 그대로 손만 뻗으면 저 골반을 꽉 쥘 수 있다.

누군가의 야설에 나온 표현을 빌리자면, 짐승이 교배하듯 퍽, 퍽, 찍어 누를 수도 있겠지.

목숨이 두 개가 아닌 이상 그런 짓은 절대 저지를 수 없겠지만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카엔의 잿빛 꼬리가 내 시야를 훅, 가리고 말았다.

코끝에 스치는 은은하고도 고소한 냄새.

동시에 허벅지 사이에 닿는 부드럽고도 따뜻한 감촉.

분명히 사람의 신체였다.

"저, 카엔 님?"

"기다려. 뭐부터 명령해야 할지 고민 중이니까. 30분을 알차게 쓰려면…."

"그게, 꼬리 때문에 앞이 안 보여서요."

"……아. 미안. 꽉 쥐는 게 아니면 감각이 거의 없다 보니."

내 얼굴에 부드럽게 꼬리를 비비던 카엔은 곧장 왼쪽으로 꼬리를 치워주었다.

그러자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곱게 묶어내린 기다란 포니테일.

이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인 새카만 늑대 귀.

뽀얀 색깔이 매력적인 목덜미.

그것과 대비되는 짙은 남색의 제복.

"일단 머리부터 한 번 쓰다듬어 볼래?"

"예?"

"쓰다듬으라고. 내 머리."

그리 말한 카엔은 옆으로 치운 꼬리를 써서 내 허리를 부드럽게 옭아맸다.

뒤로 도망갈 수 없도록.

자연스레 카엔의 엉덩이와 내 고간이 바짝 맞붙었다.

그녀의 엉덩이에 잠시 바짝 힘이 들어갔으나, 찰나일 뿐이었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척 꾹 짓눌러오는 건 내 착각일까.

자칫 잘못하면 대형 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카엔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빨리해. 다음 것도 하나하나 해봐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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