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서쪽 구역으로 향하는 오솔길.
그 속엔 흥분이 사그라든 후, 뒤늦게 찾아온 자괴감에 몸부림치는 내가 있었다.
"병신."
야한짓을 한 것도 아니고,
백야의 어깨를 더듬더듬 만져주었을 뿐인데,
고작 그것 가지고 자지를 빳빳하게 세우는.
"개병신."
그 말 그대로.
나는 개병신이다.
냉수라도 엉망진창 뒤집어쓰고 싶었다.
이 간질거리는 악몽에서 깰 때까지.
아니면 차라리 그냥 콱 얼어 뒤져 버릴 때까지.
"진짜 하루 날잡고 온종일 딸이나 쳐야 되나…."
생각보다 꽤 진지한 고민이었다.
도서관에서 야설을 줍게 된 이후로, 여자만 마주치면 '혹시 작가인가?' 라는 생각부터 하고 있으니 말이다.
매일 3~4번씩 빼주다가 입학한 이후로 일주일에 1번 수준까지 줄었으니 성욕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나 싶다.
"차라리 그냥 빨리 범인이 나오기라도 하던가. 도대체 누가 쓴 거야."
일단 카엔은 절대 아니다.
백야도 아마 아닌 것 같다.
성녀… 는 그냥 아닐 것 같고.
유즈도 마법 연구 말곤 아무 관심 없어 보이던데.
그렇다면 지금 사정이 있어서 아카데미에 없는 사람 중 하나가 범인일까?
세른이라든가…. 아니면 이리스, 또…….
"…후."
됐어. 시발.
머리아파.
처음 그 야설을 찾았을 때처럼 곧장 신경끄고 졸업이나 생각하면 되는 일인데.
괜히 귀족 머리채 한번 잡아당겨 보겠다는 로망에 시간을 쓸데없이 허비해버렸다.
생각해보면 내 입장에선 꽤나 답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사실 내 반응이 궁금해서 쓴 책이다?
그렇다면 지금 아주 잘 반응해주고 있으니, 그녀로서 지금보다 즐거울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든 나와 엮이고 싶다?
그렇다면 진작에 주인이 먼저 내게 와서 자신이 쓴 야설이라 밝혔을 게 분명하다.
제 이름이 적힌 개목걸이 같은 것이라도 같이 들고 와서 말이다.
멍멍 야옹야옹 짖고 네발로 기면서 내 신발을 열심히 핥아댔겠지.
순순히 복종하는 건 재미 없다. 어떻게든 야설 안에 나온 대로 '강제로' 당해보고 싶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눈치채기 전까지 시치미를 뚝 떼고 있을 게 뻔하다.
결국 내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야설을 쓴 당사자와 침대 위에서 뒹굴고 싶다 해도,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곤 아카데미 여자들을 상대로 이것저것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뿐이란 뜻이다.
어떻게 내가 먼저 귀족들에게 손을 대겠어.
카엔에겐 살짝 손을 대긴 했지만, 아무튼.
무슨 목적이든 간에 성격 더러운 년이 작가인 건 맞는 것 같다.
혹시 모르지. 지금껏 아무런 힌트 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나를 열받게 하기 위한 작전일지도.
거기까지 의식이 흘러가니 괜한 짜증이 치솟아 발 앞에 걸리는 조약돌을 툭, 툭, 걷어찼다.
"몰라. 간절하면 그쪽에서 먼저 찾아오겠지."
때려치우자.
고개를 붕붕 흔들어 남은 잡념들을 떨쳐낸 나는 나뭇잎 가득한 오솔길의 끄트머리를 벗어나 서쪽 구역 초입에 들어섰다.
***
북쪽을 학회,
동쪽을 공터,
남쪽을 숲이라 비유하면,
서쪽은 도시라는 느낌이 강하다.
정확히는 '유령'도시라 덧붙여야겠지만 말이다.
아직 서쪽 구역 초입을 밟았을 뿐인데, 벌써부터 저 멀리 커다란 저택 몇 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싯푸른 청금색(靑金色)을 바탕으로 하늘을 향해 뻗은 뾰족한 지붕이 포인트인 저택은, 카엔의 저택.
비교적 수수한 분위기의 평탄하고 가로로 긴 동양풍의 저택은, 백야의 저택이다.
그 밖에도 이것저것 저마다의 특색을 뽐내는 저택이 많았지만, 저것들 전부의 주인이 누군지 까진 알지 못했다.
그냥 서쪽 구역을 청소하다가 집주인과 마주친 기억이 있는 몇몇 개의 저택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저 중엔 이미 졸업한 선배의 저택도 섞여 있는데 (전선에 투입되느라 바쁜 선배들의 집이 이에 해당했다) 전부 외우는 놈이 이상한 사람이지 않겠는가.
일단 오늘은 카엔을 좀 피하고 싶으니 넓고 쭉 뻗은 대로 대신 옆으로 난 좁다란 샛길로 향했다.
매도 먼저 맞아야 낫다는 걸 알고 있지만, 지금 당장 카엔에게 혼나러 가면 진검에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길고 구불구불한 샛길을 빠져나와 곧바로 보이는 것은 새하얀 외벽으로 지어진 2층 저택이다.
그것도 조금 오래된, 몇 년도 더 전에 철거했어야 할 것처럼 생긴 낡은 저택이었다.
누구의 저택인진 관심 없었다.
주변의 공작가 따님이나 황족 출신의 웅장한 저택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아마 남작가에서 백작가 즈음 선배가 쓰던 저택이 아닐까 싶다.
나는 자연스레 대문으로 다가가 문고리를 붙잡았다.
"오늘도 실례 좀 하겠습니다."
대답은 없다.
아무도 듣지 않는 인사 이후, 나는 내 키의 2배쯤 되어 보이는 대문을 슬쩍 열어젖혔다.
이 버려진 저택의 특이한 점은 다른 곳과 달리 대문이 잠겨있지 않다는 것이다.
잠겨있지 않은 건 대문뿐, 더 이상 저택 안으로 들어갈 순 없었지만 내겐 그걸로도 충분했다.
서쪽 구역 전용 청소도구함으로 써먹기에 이만한 곳이 또 없었기 때문이다.
잡초가 무성히 자라난 정원.
그 위를 성큼성큼 밟아 정원 한구석에 놓인 커다란 창고로 향했다.
─끼긱, 긱
거칠거칠한 나무 면끼리 쓸리는 소리.
관리하지 않은 탓에 뻑뻑한 문을 억지로 잡아 열곤, 그 안에 있는 물건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빗자루 2개, 봉투 3개, 쓰레받기는…. 아니다. 이번엔 빗자루랑 넉가래를 써볼까."
잠깐의 고민 이후 주섬주섬 도구들을 챙긴 뒤 저택 밖에다가 던져놓았다.
"어디 보자…."
이정도면 충분하겠지.
대강 필요한 것들을 꺼내놓은 나는 저택 밖으로 걸어나와 오늘 청소해야 할 곳을 바라보았다.
유령도시.
그 말대로 잘 닦인 대로 위엔 벌레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신 가로수에서 떨어져 썩어가는 나뭇잎이 잔뜩이다.
아직 청소해야 할 수준까진 아닌 것 같다만, 까라면 까야지 어쩔 수 있나.
그냥 빨리 끝내자.
마력을 써서.
기껏 마력이란 재능을 꽃피워서 한다는 게 청소라 생각하면 가끔 우울해지기도 했지만, 너무 많이 느낀 감정이다 보니 무뎌질 대로 무뎌져서 버틸만했다.
"후우."
질끈,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힘을 빼기 시작했다.
한 단계씩. 차근차근.
마력의 근원을 '개화'시키는 것부터 시작해 단계를 높여나갔다.
그녀들에겐 이런 사전 준비 같은 건 필요 없지만, 뱁새가 섣불리 황새를 따라했다간 뒤지는 법이다.
심장에서 시작된 차가운 줄기가 몸을 타고 전신에 퍼진다.
기분 나쁜 감각.
하, 가벼운 숨결을 내뱉으니 가늘게 뜬 눈 사이로 황금색의 입자가 일렁이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을 타고 사라졌다.
별개의 이야기긴 하다만, 다른 건 다 그렇다 쳐도 색깔이 내 취향이 아니라 슬펐다.
불의 마력을 타고나 진홍빛 입자가 입에서 뿜어져 나왔으면 얼마나 멋있었을까.
어린애같은 투정을 부린 뒤, 조금이나마 개화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황금빛.
잿빛.
초록빛.
대지.
바위.
그리고 꽃.
내가 밟고 선 아카데미 곳곳에 퍼진 '땅'의 마력이 시선에 잡혔다.
마력을 개화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세상 곳곳에 퍼진 마력을 직접 눈으로 보고, 빌려 쓸 수 있는 최소 조건.
마력을 개화한 사람을 신에게 선택받았다고 비유하는 것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티끌만한 점이 콕콕 박혀있는 하늘.
그 밑으로 시선을 내려 광활한 대로를 눈에 담았다.
당연하게도 땅의 마력이 한가득이었다.
정확한 공정까진 잘 모른다만, 이 대로를 만들 때 엄청난 양의 흙이 들어갔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로를 재료로 써버리면 원상복구 시키기 힘드니 건드리면 안 될 테고.
대신, 언제나 쓰던 그걸 써야겠지.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청소도구함용 저택의 정원을 시선에 두었다.
잡초가 무성히 자라난 정원.
그게 꼭 관리를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다.
땅의 마력을 다루는 나로선, 잡초만큼 마력을 뽑아 쓰기 편한 게 없기 때문이다.
딱히 아깝지도 않고.
이 정도로 뽑아 쓰면 말라 비틀어져 죽나 싶어도 어느 날 보면 끈질기게 살아남아 있는데다가.
고작 내 수준의 조그마한 마력을 운용하는 데에 있어 저만큼 걸맞는 재료는 없었던 까닭이다.
게다가 내가 서쪽 구역에 올 일은 청소 말곤 없으니까.
저렇게 대량으로 쓸 마력이 항상 있어주면, 빵빵하게 채워둔 저금통마냥 언제나 든든한 것이다.
"생성."
짧은 영창.
그 직후 잡초의 싱그러운 색이 나를 향해 이리저리 뻗어나오기 시작했다.
이걸 얼마나 흘리지 않느냐도 마법사가 지녀야 할 능력 중 하나지만, 뭐, 나는 검사니까.
알뜰살뜰 모으는 것보다는 터트려버리듯 발산하는 편이 익숙한지라, 그런 세심한 컨트롤은 불가능하다.
이제 고민할 시간이다.
오늘은 무슨 이미지를 쓰는 게 좋으려나.
"으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기껏해야 3초.
다른 좋은 아이디어도 없고, 역시 이것밖에 없다.
슬슬 집중력이 떨어져가던 찰나, 나는 언제나 쓰던 이미지를 떠올려 현실에 구현하기 시작했다.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냥 내 손을 본떠 만든 모조품이었다.
적당히 공중에 떠다닐 수 있고, 적당히 세밀한 조작이 가능한 손 1쌍.
처음 쓸 땐 감각이고 뭐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물체를 잡는 것조차 버거웠지만,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로 가장 많이 다루어본 소환물이 바로 이것이었기에 이젠 내 손의 95%쯤 되는 느낌으로 다룰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해졌다.
아쉬운 것은 전투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 정도?
애당초 내 마력량이 너무나 빈약해서, 누군가가 이걸 주먹으로 때리기라도 한다면 곧장 형태를 잃고 사라져버릴테니 말이다.
그래도 내 잡부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다.
전투 능력은…. 내가 알아서 해야지.
일단은 청소부터다.
나는 공중에 둥실 떠오른 손들에게 빗자루와 넉가래를 하나씩 쥐여주곤, 셔츠 팔뚝을 걷어붙였다.
***
2시간쯤 지났을 무렵.
14번째 쓰레기봉투를 묶어낸 나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새 청소 실력이 오른 모양이다.
솔직히 말해 3시간 정도는 가볍게 쓸 줄 알았는데….
벌써 끝나갈 기미가 보여 당황스럽다.
진짜 이러다간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마수의 머리통을 으깨는 게 아니라, 어디 청소 업체라도 차리게 되는 게 아닐까?
농담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불안한 상상 와중, 아직 근처에 나뭇잎이 잔뜩 남은 저택 하나가 눈에 밟혔다.
"……."
싯푸른 청금색의 벽면.
다름 아닌 카엔의 저택이었다.
곤란하다.
카엔에게 나쁜 짓을 저지른 지 고작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 저길 갔다가 카엔을 마주치면 그 순간 고깃덩어리가 될 것 같은데.
그렇다고 저기만 청소 안 할 수도 없고.
고민은 잠시였다.
일단은 정보 수집이 먼저다.
나는 발소리를 죽인 채 담벼락 가까이 다가가 저택의 유리창부터 살펴보았다.
어디쯤 카엔의 방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집에 없는 걸까?
하긴, 이 시간이면 보통 교수 두세 명정도 끼고 수련하고 있을때긴 했다.
나같은 평민이나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수련할 시간이 부족한거고.
이걸 어째야 좋을까.
만약 내가 수준 높은 검사였다면 집 안의 인기척이라도 느껴보려 했을텐…….
"야. 변태."
"으아아악!"
바로 귓가에서 들려오는 갑작스러운 목소리.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휙, 돌아보았다.
"여기서 뭐해?"
멍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올려다보는 흑발의 늑대 수인.
언제나의 제복을 조금 흐트러지게 입은 카엔 폰 단델리온이, 밤을 샌 듯 피곤한 시선으로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