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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에서 야설을 주웠다-9화 (9/66)

9

서서히 진해지는 나무 향.

그리고 꿉꿉한 고서의 냄새로 가득 찬 도서관 내부.

부드러운 향기들 너머, 앞장서 걷고 있는 백야의 은은한 체향이 흐릿하게 코끝을 스쳤다.

의식하면 안 되는데.

차라리 샤워할 때 시원하게 딸이라도 쳐서 성욕을 좀 누그러뜨리는 게 옳았을까.

언제나처럼 손질하지 않아 이곳저곳이 부스스하게 떠오른 백야의 새하얀 머리카락.

솔직히 말해 개털같이 생겨먹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높다란 창문에서 이슬비처럼 쏟아지는 햇빛이 환상적이다.

그 밑으로 이틀 전 혼자서 한참이나 청소했던 탓에 익숙해져 버린 정경이 시선에 박혔다.

탁 트인 중심을 기준으로 여러 갈래로 펼쳐진 수많은 책장들.

같은 색끼리 한데 모여 정갈함을 뽐내는 형형색색의 띠지까지.

다행히 도서관은 아직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채 깔끔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이 넓은 부지 안에 학생 수는 나를 제외하면 고작 4명뿐이다.

누군가가 미친 듯이 서책을 어질러놓지 않는 이상, 졸업 전까지 저번과 같은 풍경은 다시 볼 수 없으리라.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도서관을 방치해놓은 사서는 아카데미 교장의 충격적인 비밀이라도 인질로 잡고 있는 게 확실했다.

실없는 생각으로 잡념을 좀 떨쳐낸 나는 백야의 뒤를 따라 1층 중앙에 마련된 조그마한 사각형 책상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기 앉아요."

"넵."

반대쪽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이는 것으로 지시를 내린 백야.

대화라고 부르기도 힘든 짧은 의사소통 이후 오묘한 분위기가 우리 사이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

그러니까,

어색하다.

심각하게.

생각해보니 아카데미에서의 한 달간 백야와 이렇게 단둘이 된 적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우리 곁엔 카엔이 함께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런 대꾸가 없어도 오늘 점심이 어쨌니, 내가 그녀들의 발끝이라도 따라잡으려면 수련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느니, 온갖 잡소리를 해대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카엔이란 윤활제 없이 백야와 단 둘이 마주앉아 있으려니 숨이 콱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미치겠네.'

성교육은 언제 시작하나요…로 대화를 시작해볼까?

…아니. 이건 진짜 아닌 것 같다.

아침식사는 맛있게 하셨나요?

안 된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고개를 움직이는 것으로 대답하곤 또 대화가 단절될 게 분명했다.

혹시 글씨 쓰는 모습 좀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집어치우자. 미친놈으로 볼 게 뻔했다.

선택지가 하나씩 사라져간다.

그래. 내가 먼저 입을 여는 것보단 백야가 말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지.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책상 밑에서 꼼지락 꼼지락 손을 움직이는 게 전부였다.

검지와 검지가 서로 툭, 툭, 맞닿을 때마다 1시간이란 제한시간이 차츰 줄어가기 시작했다.

"……."

"……."

사그라들 기미 없이 점점 짙어지는 어색함.

바깥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가 또렷이 들려올 무렵.

먼저 얼음을 깬 것은 백야였다.

"루크."

"예. 백야 님."

오랫동안 입 다물고 있었던지라 목소리가 갈라졌다.

백야는 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이야기를 계속했다.

"솔직히 말할게요."

"…?"

"고민이에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평소 습관대로 팔짱을 낀 채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리는 백야.

벚꽃을 닮은 예쁜 색깔이, 희고 긴 손가락 밑에 짓눌려 새하얗게 번져나갔다.

성교육에 순서라도 있다는 뜻일까.

나야 물론 동네 아이들과 함께 자지, 보지, 섹스 순으로 배웠지만, 고귀하신 귀족님들의 성교육엔 체계적인 순서라도 있는 모양이다.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 되지 않는 말이었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대신 조심스러운 질문으로 대체하자 백야의 고개가 반대쪽으로 살포시 기울었다.

"남의 입에 추잡한 걸 들이미는 남자가 어느 정도의 상식을 갖고 있을지 가늠이 안 되어서요."

백야는 언제나의 딱딱한 목소리로 이유를 말해주었다.

나로서는 조금 억울한 상황이었다.

솔직히 말해 펠라치오 정도는 충분히 정상적인 성교의 범주에 들지 않나.

이름 모를 귀족이 쓴 야설 노트 안엔 펠라치오따윈 가볍게 짓밟는 별의별 가학적인 플레이들이 잔뜩 적혀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눈앞의 백야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펠라치오조차 용납하지 못하는 걸 보니, 기껏해야 핸드잡정도가 백야에게 있어 '정상적'의 마지노선이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그조차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르고.

여자가 왜 남자의 자지를 붙잡아 마찰시키냐며 질색할 가능성도 충분했다.

사실 성 지식이 부족한 건 오히려 백야 쪽인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삼키며 죄인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남성기는 여자에게 핥게 하려고 있는 것이 아니다, 부터 시작해야 좋을까요? 아니면 성기가 왜 있는가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한숨을 섞으며 얼음장 같은 목소리를 뱉어오는 백야.

어째 날 같은 성인이 아니라, 어린아이나 섹스를 막 배운 원숭이 쯤으로 보는 듯하다.

내게 이럴 자격이 없는 건 알고 있지만.

묘하게 기분 나빴다.

"루크. 정액의 의미는 알고 있나요?"

"…알고 있습니다."

"여자가 아이를 갖는 과정이라든가, 피임에 대해서는요?"

모를리가 있나.

억지로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해도 자꾸만 야설에 적혀있던 몇몇 구절이 떠올랐다.

분명 이성을 잃은 내게 짐승처럼 덮쳐지길 원해서 집요하게 내 신경을 건드렸다고 했던가.

…신경 끄자.

그러기로 결심했으니까.

나는 끊임없이 눈앞에서 일어나는 우연들을 외면하며, 백야에게 건넬 말을 조심스레 골라보았다.

하지만.

"그 정도는 생략하셔도 괜찮습니다."

결과물은 이다지도 볼품없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감정이다.

기분이 나빠서.

자존심이 상해서.

남이 들으면 코웃음 칠 이유.

그러나 충동적인 행동은 대게 이런 감정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잦았다.

"생략? 자신감은 참 좋네요."

"……."

"어젯밤 아무것도 모르는 연인의 혀에다 온갖 더러운 걸 쏟아내셨을 텐데…. 생략해도 좋다니, 보기 좋아요."

눈을 가늘게 뜬 채 내 얼굴을 지그시 노려보는 백야.

이젠 고저 없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비아냥거림이 느껴질 정도다.

기이한 일이었다.

지금껏 봐온 백야가 이토록 감정적인 말을 뱉는 사람이었나.

나는 단순한 착각이라 치부하곤 입을 꾹 다물었다.

"됐어요. 당신의 말을 들어보려 했던 내가 바보 멍청이지. 시간도 없으니 빨리 시작하죠."

"그럼 혹시…."

"처음부터 해야죠. 남녀가 알아야 할 성의 기초."

큼, 큼, 목을 가다듬더니 의자에 등을 꾹 붙이며 입을 여는 백야.

"우선, 정자와 난자가 무엇인지부터 설명하겠어요."

곧 백야의 담담한 목소리가 도서관을 가득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

남성이란 무엇인가.

여성이란 무엇인가.

생식기의 구조.

구태여 알아본 적도, 알고 싶지도 않은 정보의 바다가 나를 덮쳤다.

재미있으라고 시작한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무척이나 재미없었다.

조금만 긴장을 놓으면 졸아버릴 것 같다.

점차 백야와 눈을 맞추고 있는 것조차 고역이 되어갔다.

어젯밤 오랫동안 깨어있었던 것도 이 피로의 원인 중 하나이리라.

앞에서 옆으로.

옆에서 밑으로.

휘청거리던 시선이 잠시 백야의 부드러워 보이는 젖가슴에 맞닿았다가 책상위로 부자연스럽게 내려간다.

다행히 들키지 않았는지 그녀는 여전히 연인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또박또박 설명하고 있었다.

"거듭 말하지만, 연인은 서로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해요."

"……예."

"존중이 무슨 의미인진 알죠? 당신처럼 연인에게 이상한 취향을 들이밀면 안 된다는 뜻이에요."

나랑 카엔은 그런 사이가 아닌데.

어젯밤 내 실수로 인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듯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섹스 파트너에 가까울 것이다.

뭐, 백야에게 사실을 밝혀봤자 좋은 말을 듣긴 어려울 듯하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한 나는 물끄러미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9시 30분.

도서관에 도착한 것은 대략 9시 즈음이다.

이 지루한 시간도 30분만 더 버티면 도망칠 수 있다.

버틴 만큼만 더 버티자.

"다음으로 이야기할 건 남녀의 성교에 관해서인데……."

말끝을 흐리는 백야.

"이건 이렇게 말로만 설명할 게 아니라 글과 함께 설명하는 게 좋겠네요."

그녀는 주변을 휙, 휙, 둘러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사서가 언제나 손톱을 다듬고 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잠시간의 뒤적거림.

이후 백야는 손에 펜 한 자루와 노트 한 권을 들고 책상으로 돌아왔다.

머릿속에 백야의 필체를 볼 수 있는 기회란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이어진 탓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새하얗게 표백된다.

"성교. 했나요?"

가깝다.

서로의 어깨가 꾹 닿아올 만큼 가깝다.

백야가 아까처럼 건너편에 앉은 게 아니라, 바로 옆 자리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루크?"

지척까지 다가온 핏빛의 시선.

애써 외면하고 있던 백야의 달큰한 체향이 부드러운 나무향을 전부 지워나갔다.

자극적으로.

나만 바라보라는 듯이.

다른데에 눈 돌리지 말라는 듯이.

덕분에 잠이 확 달아났다.

"말이 어려웠나? 그러니까, 카엔이랑 섹스했어요?"

"안, 안 했습니다."

"…다행이네요. 피임은커녕 어디에 넣어야 하는지도 잘 모를 것 같은데."

백야는 언제나와 같은 무심한 시선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가 노트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사각사각, 기분 좋은 소리를 따라 종이 위에 유려한 필체의 글씨가 하나씩 새겨지기 시작한다.

항상 검을 휘두르는 모습만 보아왔는데, 펜을 쥔 백야를 코앞에서 보고 있으려니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성교라는건 어제의 당신처럼 단지 기분 좋아지기 위해 하는 게 아니에요.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교류. 당신과는 크게 상관없지만, 가문의 세력을 키운다는 의미도 있죠."

여자아이에게 성기를 핥게 하면 마음의 교류가 있겠어요? 라고 덧붙이는 백야.

그녀는 종이 한쪽에 '그런 건 앞으로 지양할 것' 이라고 끄적여놓았다.

재빠르게 날려썼음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필체였다.

"루크.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제대로 된 성교 방법을 알고 있긴 한가요?"

"알고 있습니다."

원숭이로 여기는듯한 말투가 착각이 아니었나 보다.

다큰 성인이 아니라 아무 남자애나 붙잡아 물어보아도 섹스가 뭔지는 대강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럼 여기에 써봐요."

콕, 팔뚝을 찔러오는 뾰족한 물체.

방금까지 백야가 쥐고 있던 펜이었다.

"쓰다뇨?"

"과정.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나는지."

어려울건 없지.

조심스레 펜을 건네받은 나는 노트 위에 섹스의 과정을 적어나갔다.

막상 말로 풀어쓰려니 적당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고민이 되었지만, 그래도 전부 쓰는 데엔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까?"

내가 선택한 것은 낱말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야설처럼 세세하고 끈적하게 썻다간 서로 얼굴 붉히는 상황이 나올 수도 있잖은가.

애무.

삽입.

운동.

사정.

피임이 필요한 경우 중간 단계에서 실행.

이거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겠지.

백야가 좀 더 세밀한 설명을 요구할 떈 대충 말로 설명해주면 그만이다.

"으음…."

과제를 검사하듯 물끄러미 노트를 바라보는 백야.

그녀의 시선이 어느 부분에서 넘어가지 않고 깜빡거림을 반복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렇게 어려운 말을 쓴 기억은 없는데.

'운동' 이란 단어가 생각보다 애매한 뉘앙스라 그런건가.

"루크."

"네."

"이상한 게 껴있어요."

"그, 제가 운동을 무슨 뜻으로 썻냐면…."

휙, 나를 향해 뻗어져 오는 노트.

"'애무' 가 뭐죠?"

백야의 손가락은 가장 첫 단어를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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