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야설을 주웠다-8화 (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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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아침. 루크와 함께 도착한 도서관은 언제나처럼 온갖 서책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처음 이곳을 들렸을 때도 느낀 거지만, 아무래도 이곳의 사서는 책을 정리할 생각이 전혀 없나 보다.』

『마주칠 때마다 사서다운 일은커녕 손톱이나 다듬고 있던데. 정리해야 할 양이 너무 많아서 포기해버린 건가.』

『별 볼 일 없는 나라의 남작가 출신 주제에 아직까지도 사서직에서 해고되지 않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무미건조한 안부인사. 이후 사서에겐 잠깐 할 일이 있으니 잠시만 자리를 비켜달라 부탁했다. 딱 1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덧붙이면서.』

『예상한 대로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는 뻔했다. 나와 조그마한 연줄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가문에 크나큰 이득일 테니.』

『과연 그녀는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인 걸까?』

『종종걸음으로 걸어나가는 사서의 뒷모습을 보며 쿵쾅쿵쾅 뛰는 심장 소리를 죽이려 애썼다.』

오늘도 제대로 자긴 글렀다.

새벽 1시.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여기까지 읽어내린 나는 시선을 돌려 방금 주워온 편지를 바라보았다.

편지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조그마한 종이 한 장.

누가 쓴 글인지 분명하지 않은 야설과 달리, 이 편지의 주인은 백야가 확실했다.

그렇다는 것은 편지에 글씨를 쓴 사람도 백야라는 뜻.

백야가 제안한 성교육은 일단 제쳐두더라도, 필체를 비교해보는 데에 있어 지금만큼 좋은 기회는 없다.

일단은 하나씩 용의자를 줄여나가야 야설을 쓴 범인을 잡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재빨리 문을 고친 뒤 이 둘의 필체를 한 번 비교해보았지만…….

"…어쩌지."

대조를 시작한 지 어언 2시간째.

슬프게도 딱 잘라 말하기 힘든 애매모호한 결과가 튀어나왔다.

둘 다 잘 썼다.

내 부족한 표현력으론 이게 한계다.

그냥 잘 썼다.

하지만 똑같은 필체라 보기엔 미묘하게 달랐다.

노트 안의 필체는 자칫하면 넋을 놓고 글씨를 음미할 만큼 아름답다고 표현해도 부족했으나,

손에 쥔 편지에 쓰인 필체는 아슬아슬하게 그 경지까진 닿지 못했다.

조그마한 종이 안에 글씨를 구겨 넣느라 그렇게 되었다 생각하면 같은 필체인 것 같기도 하고.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긴 한데, 그럴듯한 이유가 있다 보니 오히려 혼란이 가중된다.

하긴, 내가 전문가도 아니고 어떻게 구분해.

"으음……."

머리 아프니 일단 필체는 비슷하다고 치자.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하필 백야가 오늘 처음 내게 미안한 감정을 가질 확률.

그런 백야가 늦은 시간에 내 방문 앞에다 자필로 쓴 편지를 가져다 놓을 확률.

그리고 그 편지 안에 쓰인 내용이….

"하필이면 야설 안에 있는 플레이와 비슷할 확률…."

이 확률을 다 뚫는 게 가능한 일인가?

차라리 내가 마력으로 다른 여자들을 압도할 확률이 더 현실성 있는 확률일 것 같은데.

나는 편지를 책상 위에 내려두고 다시 소설 속으로 시선을 옮겼다.

『쿵. 사서가 나가며 새하얀 햇빛이 쏟아지던 도서관 정문이 큰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제 이곳엔 나와 루크 둘 뿐.』

『그 사실을 되뇌니,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오싹한 감각이 등골을 쓸어내린다.』

『떨지 말고 말하자. 지금 이 상황 자체가 귀찮고 짜증 난다는 듯 찌푸린 미간은 필수다.』

『루크에게있어 최고의 먹잇감이 되자.』

『8명은 족히 앉을만한 커다란 책상 앞. 나는 천천히 몸을 돌리며 말했다.』

『하아……. 내가 살다 살다 너한테 성교육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찌릿, 올려다보는 시선. 그러면서도 팔짱을 껴 가슴골을 슬쩍 강조하는 건 잊지 않았다.』

『첫 경험 때 마구 쥐어짜이며 당했던 걸로 미루어보아, 루크가 좋아하는 부위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잊어선 안 되는 중요한 포인트다.』

『네가 한 번 실수했다고 해서 인생을 끝내고 싶진 않아. 그러니 잘 들어. 더 이상의 기회는 안 줄 거야.』

『…….』

『섹스는 고작 기분 좋아지려고 하는 게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아름답고도 숭고한 행위야.』

『예상대로 루크의 새카만 눈동자가 잠시 내 가슴골에 떨어졌다가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그 시선은 포식자를 닮아있었다. 발정난 암컷을 마음껏 짓밟는 포식자.』

『며칠 전 처녀를 잃었을 때가 문득 떠올랐다. 그날 자궁을 몇 번이고 짓눌리며 연속으로 실신해버린 기억 탓에 아랫배가 욱신거린다.』

『하나하나 세보진 않았지만…. 아마 오늘까지 그 기억만으로 수십 번은 자위했을 것이다.』

『닳고 닳을 때까지. 루크라는 두 글자만 떠올리면 그 난폭한 피스톤질만 떠오를 때까지.』

『하지만 이제 그거론 부족하다.』

『오늘은, 새로운 기억을 받아가고 싶었다.』

도서관에서의 성교육.

편지에 적혀있던 것과 비슷한 것이 야설 안에도 적혀 있었다.

우연일까. 의도된 상황일까.

몇 장 더 노트를 넘겨보다, 어느 순간부터 작가의 욕망이 그득하게 담긴 천박한 문장뿐이라 덮어버리고 말았다.

"이걸 어쩐다."

나는 피로에 찌든 눈을 비비며 고민에 빠졌다.

백야에게서 단 한 번이라도 그렇고 그런 낌새를 느낀 적 있었던가?

단언컨대 없다.

평소 어디 있는 건지 길에서 마주친 적도 거의 없고, 대련이 끝난 뒤 그녀와 잡담을 나눠본 적도 없다.

그간 봐온 백야는 오로지 날 두들겨 패는 데에만 혈안이었다.

그런 그녀가 야설 작가?

"……아니겠지."

카엔때와 마찬가지다.

수상쩍은 부분이 있더라도, 그것이 작가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그냥 우연의 일치일 뿐.

짜여진 각본이 아니다.

이번엔 절대 실수하지 말자.

노트를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 봉인한 나는 힘없이 침대에 드러누웠다.

***

1. 도서관으로 가 백야에게 성교육을 받는다.

2. 점심시간 전까지 어떻게든 짬을 내 개인적인 수련 시간을 가진다.

3. 서쪽 구역의 중앙 가도를 재빠르게 청소한다.

4. 야크툰 교수의 개인실을 청소한 뒤, 유즈를 찾아가 일과를 끝낸다.

완벽한 하루 계획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바쁘긴 하겠다만, 하나하나 단추를 예쁘게 꿰어가다 보면 오늘 하루는 별 탈 없이 끝마칠 수 있을 것 같다.

갑작스레 카엔과 마주치는 것만 피하자.

사죄가 늦어지는 것도 문제이긴 하나 지금 그녀의 눈에 띄어봐야 좋은 꼴은 못 볼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완연한 아침인데도 어둡고 칙칙한 중앙 구역을 떠나 남쪽 구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점점 밝아지는 햇빛.

높은 경사의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를 때마다, 칙칙한 색의 돌계단 위에 이끼가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미끄러졌다간 어디 하나 부러지는 것으로 끝나진 않을 것이다.

주의를 기울이며 올라가자 언제나 보던 초록빛의 가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짹. 짹. 어디선가 들려오는 경쾌한 새소리.

족히 100M는 될법한 하늘을 찌르는 거목. 그리고 사이사이 짧은 잡초가 솟아나온 돌길.

옆에 놓인 낡아빠진 표지판에는 '남쪽 구역'이라 적힌 채 생기를 잃어가고 있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탁 트인 시야를 채워오는 맑은 초록색은 참 예쁘다만, 한편으론 여름이 되면 벌레가 많이 꼬일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공중요새라 괜찮으려나. 금방 잊어버릴 작은 호기심을 품고 안쪽으로 걸어나갔다.

"후우……."

르페아스 도서관에 도착하기까진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른 구역에 눌러사는 학생들을 배려하기 위함인지, 비교적 남쪽 구역 내의 다른 건물들에 비해 중앙 구역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제 아침 픽 쓰러져 잠들었던 나무그늘을 한 번 흘겨본 뒤 도서관 문을 열었다.

책장으로 이루어진 짧은 길 너머, 선객 하나가 사서의 앞에 서 있었다.

허리춤에 살랑살랑 닿아오는 아름다운 백발.

그 옆으로 드러난 순백색의 기다란 검집 두 자루.

이렇게 보니 도서관이란 장소와 꽤나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었다.

"백야 님."

"아."

짧게 새어나오는 목소리.

백야는 사서와 이야기하던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려 내 쪽을 바라보았다.

"루크. 이번엔 안 늦었네요."

"이번엔, 이라뇨. 저번 대련 시간에 늦은 게 첫 지각이지 않습니까. 지금껏 시간 약속은 잘 지켰다고 생각하는데…."

"한 번도 늦은 적 없다, 가 아니게 되었잖아요."

묘하게 반박하기 어려운 말에 내 입술이 꾹 다물렸다.

어차피 반박할 수 있는 말을 찾았더라도 내뱉지 않았을 테니 별 차이는 없었다.

"그래서, 괜찮나요?"

다시금 사서 쪽을 바라보며 말하는 백야.

"물론이죠! 어차피 전 할 일도 없고 이 시간에 도서관을 찾을 사람도 없으니, 원하시는 만큼 이야기하시다 돌아가셔도 돼요!"

"마음만 받을게요. 1시간이면 충분해요."

1시간.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대화에 눈살이 살포시 찌푸려졌다.

아니. 정확히는 '읽은 적' 있는 대화였다.

깊게 생각할 필요 없었다.

새벽에 읽었던 야설에 나온 상황과 굉장히 흡사했으니 말이다.

'…우연이겠지.'

카엔에게 저지른 실수를 되뇌이며, 이상한 생각은 모조리 지워냈다.

그나마 카엔은 어르고 달래서 화를 풀 가능성이라도 있을망정, 백야에게 찍혔다간 그대로 끝이다.

조심하자.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백야의 뒤에 다소곳이 기립했다.

"으읏…! 그러면 전 아침이라도 먹고 와야겠네요. 요새 늦잠자느라 아침 먹은 기억이 별로 없어서…."

"별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니, 대충 시간 맞춰 돌아오셔도 괜찮아요."

"아녜요! 백야 님 부탁인데 그럴 순 없죠. 한 시간 정확하게 기다렸다가 돌아올게요!"

"…그러세요."

사서의 과한 반응에 질린다는 듯 떨떠름하게 대답하는 백야.

이쯤 되니 백야를 위해서라기보다, 사서 자기 자신이 도서관 안에 있기 싫어하는 것 같아 보이는 건 내 착각일까?

잠시 뒤. 사서는 어디 피크닉이라도 나가는 것처럼 신 난 표정으로 도서관을 떠났다.

열람실 청소까지 떠맡았던 내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는 게 은근히 짜증 났지만, 귀족 둘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낼 정도로 눈치 없진 않았다.

쿵. 사서가 나가며 새하얀 햇빛이 쏟아지던 도서관 정문이 큰소리를 내며 닫혔다.

"루크."

언제나처럼 딱딱한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자연스레 백야와 시선이 맞닿는다.

핏빛의 시선이었다.

땅바닥에 거칠게 휘갈겨진 끔찍한 핏빛이 아니라, 얼음 속에 갇힌 핏방울처럼 아름답고도 황홀한 핏빛.

마음에 드는 남자를 인정사정없이 착정한다면 모를까…….

그 안에 피학적인 욕망이 가득할 거란 생각은,

"예. 백야 님."

"따라와요. 각자 일정이 있을 테니 빨리 끝내는 게 좋잖아요."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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