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그래, 맞아. 카엔 님? 그 안에 적힌 글씨 엄청 예뻤었…."
"다, 다가오지 마. 거기 그대로 있어."
카엔은 내가 변명하며 다가서자 한 발자국 더 뒤로 물러나며 손을 휘저었다.
평소 장난기가 가득하던 얼굴엔 실망이란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쯤되니 진짜 내가 커다란 죄를 지었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변태새끼……. 내가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예뻐했다고?
그 소리를 들으니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르침을 주겠답시고 대련 시간만 되면 목검으로 어디 하나 부러질 때까지 패는 게 그녀 나름의 애정 표시였던 걸까.
생각지 못한 뜻밖의 평가였다.
물론 기쁘진 않았다.
"그런 거 좋아해? 막…. 막, 그 더러운 걸…. 입에다가……. 으엑…."
"안 좋아합니다. 애초에 제가 쓴 글이 아니라고요."
사실 좋아하는 편이긴 하다만, 지금 솔직히 대답해봤자 내 명줄만 짧아질 뿐이다.
나는 대충 말뿐인 부정을 하며 카엔에게 적갈색 노트를 내밀었다.
그녀가 던진 뒤 잔디밭에 잠시 구른 탓인지 표지 구석 조그마한 부분이 초록빛으로 옅게 물들어있었다.
"카엔 님. 한 번만 더 읽어보세요. 제가 쓸 수 있는 필체가 아니……."
"읽으라고? 장난해? 여자가 그, 혓바닥으로 남성기를 핥는 걸 나보고 다시 읽으라고?"
표정을 와락 구기며 소리를 지르는 카엔.
혓바닥. 그래도 목구멍은 아니었다.
다행히 이라마치오 연습 바로 직전에 자지 뿌리까지 꼼꼼히 봉사하는 부분을 읽은 모양이다.
아니, 다행이란 표현이 맞긴 할까.
이젠 모르겠다.
어차피 카엔에게 노트의 존재를 들켜버렸으니, 활활 태워서 재로 만드는 것도 의미 없게 되어버렸고….
이렇게 오해를 받게 된 이상 살아남기 위해선 카엔을 설득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나는 노트 아무 페이지나 펼친 뒤 가장 성적인 표현이 적은 곳을 찾아보았다.
카엔에게 보여주어도 딱히 상관 없을 만한 부분이….
그래.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
"보세요. 여기."
"뭐, 뭐, 지금, 뭐하는……."
"그의 손가락이 입안 점막을 제멋대로 휘젓곤 빠져나갔다, 이 문장이요."
"드, 들이대지 마…!"
"아뇨. 보셔야 해요."
"히약…?!"
뒷걸음질 치는 카엔의 눈앞에 억지로 노트를 들이대자, 그녀는 꼬리를 바짝 세운 채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리곤 뻐끔뻐끔 입술을 여닫다가 힘겹게 침을 삼키곤 천천히 연보랏빛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제자리에 얼어붙어 도망가지 않는 지금이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다.
잠시 미간을 꾹꾹 짓누르는 것으로 피곤함을 떨쳐낸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쏟아냈다.
"어때요?"
"어떠냐니, 펴, 평가해달란 뜻이야?"
"아뇨. 글씨요."
"…글씨 평가?"
"필체가 너무 깔끔하잖아요. 장담하건대 평민은 이런 글씨 절대 못 써요."
"……아, 어…. 음…."
"이런 글씨를 쓸 수 있으려면 최소한 귀족은 되어야 할 텐데…."
"끄응…. 그…런가…? 내 글씨는……."
카엔은 얼어있던 자세 그대로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그럼에도 눈동자는 계속해서 좌우로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가끔은 제자리에서 한참을 멈춰 있기도 했지만, 큰 의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카엔의 성지식 수준으론 너무 이상한 걸 봐버려서 뇌가 이해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리나 보다.
"그리고 제가 왜 이걸 밖에 들고 돌아다니겠어요. 만약 이게 제가 쓴 글이라면 졸업하기 전까지 기숙사 책상에 숨겨뒀겠죠."
"……."
대답은 없었다.
나름 논리적인 발언이라 생각했건만, 카엔의 반응은 영 시원찮았다.
여전히 노트 안에 시선을 두고, 곤란하다는 듯 이리저리 눈동자를 옮길 뿐이다.
어쩌지. 더 이상 어떻게 설득할지는 마땅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가뜩이나 안 좋은 머리가 피곤하기까지 하니, 도통 괜찮은 아이디어가 나오질 않았다.
만약 정신이라도 말짱했다면 기가 막힌 변명이 떠올랐을까?
그랬다면 진작에 노트를 태워버렸겠지.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30초가량이 흘렀다.
왠지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애에게 억지로 능욕야설을 읽게 하는 것 같아 배덕감이 스멀스멀 차오를 무렵.
노트의 건너편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변태."
이젠 평민대신 변태라 부르기로 마음먹었나 보다.
그래. 변태든, 쓰레기든, 목숨만 붙여준다면 뭐라 부르든 상관없다.
나는 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한숨을 뱉은 뒤 카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녀는 검은 빛깔의 늑대 귀 한쪽을 꿈틀 움직이더니, 양손으로 눈 앞에 펼쳐진 노트를 꾹 덮어버렸다.
"믿…을게."
"정말요?"
"……네가 쓴 글 아니라고 했으니까, 주인인 내가 믿어야지."
도대체 네가 언제부터 내 주인이었는데.
아니다. 그냥 네가 주인 해라.
사실상 그녀가 내 목숨을 쥐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 어찌 보면 주인이란 말도 썩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거슬리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마지막에 이야기한 '믿어야지' 라는 부분.
보통 저런 말을 할 때는, 네 말을 전혀 믿고 있지 않지만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겠다, 라는 뜻이니 말이다.
어떻게해야 믿어주실 거냐고 덧붙이려던 나는 노트 너머로 드러난 카엔의 얼굴을 보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믿을 테니까, 이제 연무장으로 가자. 이, 이러다 백야랑 엇갈릴 수도 있으니까…."
차마 내 눈과 마주치지 못하고 가슴팍 즈음을 바라보는 시선.
거기에 발갛게 달아오른 뺨은 조금 전 카엔과 다를 바 없었지만, 눈동자에 서린 감정은 조금 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뭐라고 하는 게 좋을까.
무언가 큰 결심을 마친 듯한 상태…. 라고 해야 할까.
노트를 읽은 카엔이 무슨 결심을 했는진 정확히 모르겠다만.
"…알겠습니다."
그것이 부디 나를 믿겠다는 결심이길 바랄 뿐이다.
***
"변태. 너, 나한테 걸려서 다행인 줄 알아."
"…예."
"세른이나 백야같은 애한테 걸렸으면 지금쯤 아카데미가 바빠졌을 거 아냐."
"그렇…겠죠, 네."
"세른은 지금 아카데미에 없고 백야는 북쪽으로 가서 다행이지…. 내가 사람 한 명 살렸네."
"……."
시간이 지나자 평상시처럼 시끄러운 모습으로 돌아온 카엔.
지금껏 그녀와 같이 길을 걸으며 확실해진 것이 하나 있었다.
"또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앞으론 절대 이런 거 기숙사 밖으로 들고 다니면 안 돼?"
"……."
카엔은 지금까지의 내 말을 귓등으로 듣고 치워버린 게 분명했다.
그녀에게 있어 이 야설의 작가는 나로 확정.
머리가 아팠다.
조금만 더 침착하게 말했더라면.
아니면 오히려 훨씬 더 강하게 말했더라면.
그런 후회가 몇 번이고 머릿속을 스쳤으나, 이미 다 지나버린 일이다.
이제는 카엔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않길 기도하는 것 말곤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을 꼽자면 카엔의 발언으로 미루어보아 이 야설 노트는 비밀에 부치려는 것 같다는 점이다.
카엔의 성격상 이 노트를 가지고 아카데미 이곳저곳에 소문을 퍼뜨리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이 노트 하나에 사람의 목숨이 달려있다는 심각성만큼은 잘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쓴 글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고통받아야 하나 싶지만…….
어쩌겠는가.
당장 불태워버리지 않고 나무 그늘 밑에서 쓰러져버린 내 잘못이 컸다.
"백야가 이게 뭐냐고 물어보면 내가 절대 못 보도록 막아줄게."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정도면 뭐,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이라 볼 수 있다.
어쨌든 당장 목숨은 지켜냈으니 말이다.
나는 카엔의 말에 대충 맞장구를 쳐주며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길수록 점차 주변의 풍경이 바뀌어갔다.
남쪽 구역 특유의 하늘을 찌를듯한 거목들은 하나둘 모습을 감춰가고, 그 대신 동물의 발톱 자국 같은 것이 남은 우윳빛의 돌벽이 사방에 펼쳐졌다.
이런 벽을 마주친다면 지금 르페아스 아카데미의 동쪽 구역 초입을 지났다는 뜻이었다.
높은 건물 하나 없이 탁 트인 정경은 볼 때마다 시원했으나, 한편으론 이 주변의 자질구레한 것들이 모조리 검압(劍壓)에 바스러져 사라졌다는 뜻이라 시원함을 넘어 섬뜩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미 졸업하고 떠난 수많은 선배들에 의해서. 그리고 지금은 카엔과 백야의 검에 의해서.
도대체 나는 어디까지 노력해야 이런 검사가 될 수 있을까.
객관적으로 보아, 이번 생 안에 저런 경지의 문턱이라도 닿아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직까지도 옆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카엔의 목소리 뒤에 짙은 한숨을 숨기곤 그대로 동쪽 구역 끄트머리까지 발을 들였다.
그곳엔 이곳저곳 솟아나 있던 돌벽마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거칠게 떨어져 나간 돌벽의 흔적과,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이 시야를 뒤덮었다.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평소엔 딱히 체감되지 않지만, 이곳에만 오면 새삼 르페아스 아카데미가 세계에 몇 없는 공중요새 중 하나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느끼게 된다.
다른 구역은 온갖 건물과 식물로 가득한 탓에, 아카데미에서 지평선 비슷한 것이라도 볼 수 있는 곳은 오직 이곳이 유일했으니 말이다.
그 새파랗고 삐뚤빼뚤한 선을 배경 삼아, 한 여인이 팔짱을 낀 채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백야.
언제 보아도 그렇지만, 이름대로 하얀 것을 좋아하는 여인이었다.
귀찮은 듯 제대로 된 관리 없이 기르기만 한 머리카락도.
그 머리카락을 숨기기엔 한참이나 부족한 꽃무늬의 자그마한 머리 장식도.
동방의 전통 의상과 닮은, 허벅지가 살짝 드러나는 짧은 상하의도.
벨트 하나에 의지해 맞부딪혀 절그럭거리는 두 자루의 기다란 검집도.
그녀는, 백야라는 이름답게 모든 것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얗다는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딱 하나.
고양이를 닮은 눈매 아래, 핏빛에 가깝게 물든 눈동자 한 쌍이 전부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백야의 발 앞에 꽂혀있는 목검 세 자루도 포함해야 할듯하다.
"루크. 왜 늦었죠?"
짧게 끊어지는 부드러운 목소리.
평소처럼 백야의 목소리엔 조금의 감정도 실려있지 않았다.
그녀는 항상 이랬다.
표정이나 목소리에서 알아챌 수 있어야 할 감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들은 오로지 백야의 행동 속에만 녹아있었다.
귀와 꼬리까지 써가며 '나 행복해! 나 심심해!' 시끄럽게 외쳐대는 카엔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처음엔 꽤 불편했지만, 익숙해진 지금은 딱히 아무런 불편도 느끼지 않았다.
몇초마다 기분이 들쑥날쑥 바뀌는 카엔을 상대하다 보니 오히려 이쪽이 비교적 쉽다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습관처럼 그녀의 손가락부터 살펴보았다.
톡, 톡, 팔짱을 낀 채 제 팔을 두드리고 있는 백야.
저 정도면 딱히 긴장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시선도 나랑 내 뒤에 달라붙어 있는 카엔의 얼굴을 무심히 번갈아 바라볼 뿐이고….
솔직히 대련 시간 첫 지각이라 살짝 불안했었는데, 이 정도론 딱히 화나지 않는 모양이다.
"그, 제가 새벽에 도서관 청소를 했었는데."
"…도서관 청소. 계속 말해요."
"도서관이 좀 넓다 보니 청소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그럼 그냥 졸다가 늦었나보네요."
"네?"
"유즈한테 끌려갔을까 봐 걱정한 내가 바보 멍청이지."
백야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땅에 꽂혀있던 목검 중 하나를 천천히 뽑아들었다.
그 행동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었다. 눈 앞에 적이 있기에 베었다, 라는 느낌의 깔끔한 행동.
갑작스레 흉흉한 기세가 느껴지기에 뭐라 반박하려 했으나, 곱씹어보니 오히려 거의 사실이나 다름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청소를 다 끝마친 뒤 귀족을 강간조교하는 야설을 읽다가 졸아서 늦었다는 것보단, 중요한 부분이 살짝 생략된 저 편이 조금 더 괜찮아 보이기도 했고.
곁에 있는 카엔도 삽시간에 싸늘해진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평소의 헤실거리는 표정을 굳히곤 나와 백야의 눈치를 이리저리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루크."
"…예."
"대련 시간이 왜 만들어졌죠?"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질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내가 가장 싫어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나는 훅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참아내곤, 딱딱하게 대답했다.
"…백야 님과 카엔 님이 제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맞아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백야.
하지만 그런 가르침, 맹세컨대 내가 먼저 해달라고 부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네 실력이 형편없으니 가르쳐주겠다며 먼저 다가온 게 그녀들이었다.
그 뒤로 몇 번이나 성녀에게 신세를 졌는지는, 세는 것이 힘들 정도다.
"그런 시간에 학생이 이리 늦어선 안 되죠. 설령 전날 고된 일이 있어 피곤하더라도."
순 억지에 가까운 말이었다.
백야의 주장은 이 대련 시간이 내 요청으로 만들어 졌을 때나 그럴싸한 주장이었다.
맘같아선 지랄 좀 하지 말고 날 내버려두라고 소리 지르고 싶다.
그런 마음을 알기나 할까. 백야는 땅에 박혀있던 목검 한 자루를 내게 던지며 말을 이었다.
"잡아요. 그리고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난이도를 높일 테니 참고해요."
"…예?"
"마력까지 운용할 거에요. 물론 검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도 유지할 거고요."
검을 멈추지 않는다.
말 그대로의 뜻이었다.
아카데미 교수들이 직접 학생을 교육할 때의 공통점은, 그들의 검이 몸에 닿기 직전에 멈춰준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굳이 피를 보지 않고서도 필요한 것들은 모두 가르쳐 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들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
미처 읽어내지 못한 검격이 파고들어 올 땐, 멈추지 않고 그대로 가격한 뒤 고통을 뱉으며 쓰러진 내 몸을 억지로 다시 일으킨다.
이것도 이유는 단순했다.
검사는 검을 무서워해선 안 된다.
그리고 어떻게 해도 다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으면,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하던가?
적어도 죽지 않는 것에 감사하라 말할 땐 나도 모르게 미친년인가, 하고 내뱉었던 적도 있다.
만약 그날 백야나 카엔의 귀에 내 목소리가 닿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글쎄. 모를 일이었다.
"뭐해요? 빨리 끝내고 오늘도 열심히 일하러 가야 하잖아요?"
보통 이쯤이면 뒤에서 콕콕 목검으로 찔러대야 하는데, 조금 전 야설 사건이 있었던 탓인지 평소와 달리 안절부절못하며 상황을 지켜보는 카엔.
그녀와 달리 백야는 언제나처럼 가볍게 목검을 휘두르며 나를 재촉했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나는 얼떨결에 이곳까지 들고 와 버린 대걸레와 물양동이를 저 멀리 내려 두곤, 그 옆에 보이지 않게 야설 노트까지 꼭꼭 숨겨두었다.
이제 대련이 없었던 3일간 쌓인 백야의 스트레스가 풀릴 때까지 맞아준 뒤, 성녀의 치료를 받으면 오늘 일정은 거의 끝이다.
웃기게도, 오늘 하루는 이제야 절반을 겨우 지났는데 제대로 잠을 못 자서 그런지 평소보다 하루가 몇 배는 긴 것 같았다.
다시 제자리에 돌아온 나는 투박한 형태의 목검을 쥐고 백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투쟁심 같은 것은 버린 지 오래다.
그냥 가급적 빨리 이 고문이 끝나길 바랄 뿐이다.
"…자기만 바삐 사는 것처럼 바쁘다 바쁘다 노래를 부르더니 요샌 책을 읽을 여유도 있나 보네요."
왠지 모르게 비아냥거리는 듯한 목소리.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백야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큭…!"
백야가 개화한 마력은 바람.
어설프게 검을 쥔 내 주변으로, 자칫하면 균형을 잃을 정도의 바람이 몰아쳤다.
차갑고, 날카롭다.
조금만 더 예리하게 몸을 죄여오면, 칼날 같은 바람에 베일 것만 같았다.
똑같은 바람속성 마력을 사용하는 카엔과는 정 딴판의 운용 방식이었다.
카엔은 백야처럼 상대방을 바람으로 괴롭히기보단, 자신이 직접 바람에 올라타는 것을 더욱 선호했으니.
순수한 강함의 척도는 제쳐두고, 피식자로서 공포스러움을 논하자면 이쪽이 한 수 위였다.
힘겹게 쥔 검 끝이 바람에 밀려 벌벌 떨렸다.
그 떨림은 손으로. 그리고 몸통으로. 다리로.
병균처럼 온몸 구석구석 전이되어 나를 괴롭혔다.
휘두르기는커녕, 버티는 것조차 버거운 수준의 폭풍이 끊임없이 몰아닥쳤다.
그런 와중에도 밀도 높은 폭풍 탓에 시야가 가려져 있으니, 절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미친년이.
이렇게까지 해버리면 도대체 나보고 어떡하라고.
그런 생각이 스칠 즈음.
왼쪽 위에서 새하얀 빛이 잠시 점등했다.
콰직. 잔인한 소리가 귓가에 스쳤다가 바람에 밀려 어디론가로 사라져간다.
온 힘을 다해 몽둥이로 때리는듯한, 지금껏 느껴봤던 통증 중 가장 커다란 고통이 내 몸을 두드렸다.
뼈가 금가고. 부러지고. 산산이 쪼개져 고기를 찢어발기는 끔찍한 감각.
그 감각이 밑으로 무수히 뻗어 나가곤───
"……!"
나는 귓가에서 맴도는 보글보글 물 끓는 소리에 식은땀을 잔뜩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익숙한 침대.
익숙한 천장.
몇 번이고 보아온 익숙한 공간 속.
조금 자극적인 찻잎의 냄새가 공기 중에 떠돌고 있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일전에 성녀에게 차 이름을 들었었는데, 그쪽에는 워낙 아무런 관심도 없는지라 도통 기억나지 않았다.
"아. 루크. 벌써 일어났어요? 오늘은 어깨가 아주 만신창이던데 좀 괜찮나요?"
"…예. 덕분에."
"다행이네요."
그와 더불어 익숙한 목소리가 곁에서 들려왔다.
다름 아닌 성녀의 목소리였다.
막대한 신성력에 더불어 쓸만한 수준의 마력까지 개화해낸 세기의 천재.
또는, 세기의 행운아.
또는….
"…설마해서 물어보는 건데, 안 건드리셨죠?"
"아파서 자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건드려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저번엔 분명 일종의 치료행위라면서요. 아파서 자는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아. 그랬었나. 그치만 자고 있으면 반응이 없잖아요."
그냥 변태.
혹시나 싶어 바지 속을 살짝 확인한 뒤, 깔끔한 것을 확인하곤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나저나 아예 기절해서 업혀온 건 오늘 처음 본 것 같네요."
"업혀서요?"
"네. 백야 님이 힘 조절을 잘못했다고 그러던데. 혹시 죽은 거 아니냐고 걱정하더라고요."
걱정? 백야가?
카엔을 잘못 말한 거겠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곤, 성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장난삼아 만든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흔들의자.
그 위에서 노을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부신 은발이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조금 전 내 몸을 휘감았던 폭풍과 달리, 이쪽은 바라보기만 해도 졸음이 쏟아질 정도로 평화로웠다.
그녀의 타고난 천성이 느긋하기에 이런 분위기를 풍기는 거겠지.
그렇게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와중이었다.
"…성녀님?"
"네?"
그녀가 흔들의자에 앉아 읽고 있는 책.
낯이 익었다.
"아. 업고 온 사람도 백야 님이었어요."
"아뇨. 그거 말고, 지금 읽고 계신 거 혹시…."
"아하. 이거요? 꽤 읽을만하던데요? 근데 제목이랑 작가를 모르겠네."
후릅, 차를 마시곤 이리저리 표지를 살피는 성녀.
그녀는 아무렴 어떠냐는 듯 다시 책을 펼치곤 흔들의자에 앉아 독서를 이어나갔다.
색은 적갈색.
끄트머리에 살짝 풀잎 색이 배인.
우연찮게도, 내가 도서관에서 발견한 것과 놀라우리만치 흡사한 노트가 그녀의 손에서 팔락팔락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