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야설을 주웠다-2화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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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추악한 음모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예를 들어 이 야설을 완성한 이후, 가만히 있던 나를 작가로 몰아가 내 삶을 완전히 끝장내버릴 음모일지도.

그게 아니라면, 이걸 읽게 된 내 성적 수치심을 건드리려는 신종 괴롭힘일지도 모른다.

한달간 보아온 그녀들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들이었으니까.

─팔락. 팔락.

그렇게 수많은 페이지를 차근차근 넘기기 시작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생각을 하며, 피곤한 눈동자를 억지로 움직였다.

『학……! 극…. 으극……!』

『귀족으로서, 그리고 여자로서 가장 소중한 것들이 그의 손에 완전히 넘어가고 말았다.』

『깨끗한 순결. 고고한 자존심.

그리고 그것들을 모조리 먹어치우고도 부족하다는 듯, 루크는 더욱 깊숙한 곳의 비밀스러운 장소까지 넘보려 하고 있었다.』

『그, 그만……. 히익…?!』

『고작 3분도 채 지나지 않아 꼴사납게 내뱉으려던 항복 선언은, 안쪽을 짓누를 때마다 강제로 튀어나오는 숨소리에 완전히 묻히고 말았다.』

『도대체 왜 여기까지 들어오려 하는 거야.』

『분명 어릴 적 책에서 보았을 땐, 흥분한 여성의 자궁이 밑으로 내려가 귀두에 달라붙는다는 식의 묘사를…….』

─퍽! 퍽! 퍽!!

『헥…?! 헤….?! 헤으……?』

『…아?』

『어디까지, 생각했더라?』

『잘모……? 자, 잘못…….』

『잘못했다고, 사과해서 정복감을 채워주려 했었나?』

『살려달라고, 루크의 가학심을 부추기려 했었나?』

『그것도 아니라면, 잠깐만이라도 숨을 쉴 수 있게 부탁하려 했었나?』

『읍…! 읍…?! 으큭…….』

『침투성이 베개에 숨이 막혀서,

그 와중 상정 외의 극태자지가 자꾸만 자궁을 쿵, 쿵, 짓눌러대서,

억지로 이어가려던 생각이 가느다란 실처럼 손쉽게 끊겨나갔다.』

『그래, 기억났다.』

『자지. 자지 생각.』

『이곳까지 들어와도 되는 걸까.

지금 배꼽 밑을 쿵쿵 찔러대는 것 같은데, 더 이상 들어오게 되면 진짜 끝장나버리는 게 아닐까.』

『이 정도 굵기,

이 정도 속도,

이 정도 길이라면,

분명 몸이 망가지는 고통에 괴로워해야 할 텐데.

어째서 나는 암캐처럼 헐떡이는 것밖에 할 수 없을까.』

피곤함을 억지로 견디면 갑작스레 정신이 말짱해지는 구간이 온다고 하던가.

지금 내 상황이 딱 그랬다.

스산한 풀벌레 소리 대신 새가 지저귀기 시작했는데도, 새벽녘에 청소하던 때와 비교하자면 오히려 지금이 더 버틸만했다.

물론 몇 시간 안에 후폭풍이 밀려올 것은 알고 있다만, 그보다는 지금 당장 피곤하지 않다는 것이 중요했다.

덕분에 하룻밤 새 이 소설의 끝을 보는 데 성공했으니 말이다.

오로지 여자 시점으로 쓰여진 첫경험을 지나, 그 뒤에 쓰여진 것은 양측의 시점이 오가는 조금 더 과격한 플레이들이었다.

그녀의 속셈을 눈치채지 못한 내가 그녀의 목구멍으로 자지를 훑게 한다든가.

다른데는 일절 손대지 않고 젖꼭지만을 집요하게 괴롭힌다든가.

소설 속 내 말을 무시한 벌로, 엉덩이에 붉은 손자국이 몇 개 새겨질 때까지 스팽킹을 하며 섹스한다든가─그녀는 포상이라 여기는 듯했다─

굳이 개발까지 해가는 노력을 들여가며 뒷구멍으로 밤새 즐긴다든가.

이 외에도 이것저것 입에 담기 부끄러운 행위들로 빼곡히 페이지를 채우고 있었다.

이쯤되니 정녕 여자가 쓴 글이 맞나 싶다.

당사자인 나조차 정말 내가 써내린 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그렇기에 나는….

"…어쩌지."

그야말로 좆됐다.

먼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보자.

만일 이 소설 때문에 내가 재판에 회부된다면, '제가 쓴 적 없어요!'라 울부짖어도 배심원의 귀엔 조금도 닿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귀족 영애를 상대로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진짜 타고난 개또라이 새끼구나.

그런 감탄을 등에 업고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미래만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살아나올 방법을 찾기보단, 말도 안 될 정도의 행운을 바라는 것이 조금 더 생존확률이 높아보였다.

"……."

그리고 이번엔 최선의 상황을 가정해보자.

만약 그녀들 중 누군가가 실제로 이런 것을 원했기에 이 야설을 끄적인 것이라면?

그리 생각하니 확실히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이것저것 있었다.

먼저 이 정갈한 필체가 문제다.

만약 내가 쓴 소설로 위장하려 했다면 이렇게 예쁜 필체로 써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토록 아름다운 글씨는 쓸 수 없으니까.

게다가 문장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펴보면, 여기저기서 지웠다가 다시 쓴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쓰면서 고민했다는 흔적이지 않은가. 심지어 야설을 쓰면서.

이 소설의 목적이 내 인생을 끝장내는 것이었다면, 그냥 '온갖 귀족을 강제로 따먹었다. 정말 맛있었다.' 라고만 써넣었어도 문제 삼기엔 충분했을 텐데.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으음…."

마지막으로 마음에 걸리는 것은, 소설 속 소재와 심리묘사였다.

어째서 내게 강간당하는 게 꿈인 귀족이 존재하는 걸까.

어째서 이 글을 쓴 당사자는, 여자가 강간당하고 있는데 행복해한다는 묘사로 채워넣었을까.

어째서.

왜.

재판에 넘긴 나를 조금 더 그럴듯한 변태새끼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병신. 그럴 리가 없지."

한 마디로 망상들을 지워버린 뒤, 철야한 탓에 힘없는 손바닥으로 내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최선의 상황은 생각할 필요 없었다.

내가 걱정해야 할 것은, 오로지 최악의 상황뿐이었다.

누가 작가인지 아무런 힌트조차 없는 적갈색의 노트.

이것과 더 이상 눈싸움해봐야 피곤함만 늘어갈 뿐이다.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자.

여기서 봤던 것은 못 본 걸로 하고.

이 노트는 불길 속에 던져 재로 바꾸어 두는 것이 좋아 보인다.

내가 범인이란 심증은 있어도, 물증은 없으니 끝까지 잡아떼면 그만이다.

정리 끝.

나는 청소용 마스크를 다시 올려 쓴 뒤 바닥에 눌려있던 모양 그대로 굳어버린 대걸레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밖은 이미 해가 반쯤 떠오르고 있었다.

잠을 자긴 글렀으니, 오늘은 낮 동안 조는 것으로 부족한 잠을 메꿔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백야나 카엔이 목검으로 내 몸뚱이를 두드려 패면 손쉽게 일어날 수 있을테니까.

곧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던 나는, 대걸레를 지팡이 삼아 조심스레 열람실을 빠져나갔다.

***

사람이 꼭 깜깜한 어둠 속에서만 편히 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따사로운 햇볕이 기분 좋은 숙면을 취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을 하필이면 오늘에서야 뼈저리게 느껴버리고 말았다.

"으……?"

뺨에서 느껴지는 딱딱하고도 뾰족한 감각.

그것에 몸서리를 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이윽고 조그마한 새의 날갯짓 소리가 점차 멀어져갔다.

지나가던 까마귀가 시체인 줄 알고 내 볼을 쪼아대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고 치기엔 힘이 너무 약했는데.

불쾌함을 담아 손등으로 볼을 비빈 뒤, 아직까지도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이제서야 보이는 선명한 검은색.

그 색채는, 익숙하면서도 은근히 불쾌했다.

"야. 평민. 너 술마셨냐?"

천진난만한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

아직 잠이 덜 깬 나는 노골적으로 표정을 구기며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뒤늦게 든 생각이지만, 햇볕이 강한 덕에 그 핑계를 댈 수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어쩌면 추레한 몰골 탓에 그녀 쪽에서 어느 정도 아량을 베풀어 주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아뇨. 맨정신입니다."

"킁. 확실히 술 냄새는 안 나는데…. 멀쩡한 기숙사 내버려두고 왜 여기서 자고 있어?"

그녀는 톡, 톡, 검지 손가락으로 입술을 긁다가, 내 옆에 놓인 물 양동이로 연보랏빛 시선을 옮겼다.

"아. 청소. 도서관 청소 했나보구나."

처음부터 다 보였을 텐데.

굳이 '청소'라는 말을 입에 담고 싶었던 게 분명했다.

그리곤 꾹 짜증을 삼키는 내 표정을 보며 킥킥 웃어대겠지.

아카데미의 여자들 중 가장 예측이 쉽다는게 그녀의 장점 중 하나였다.

"힘들었겠네. 밤새 걸레질 했나 봐?"

언제나의 일상이기에 아무런 대꾸 없이 몸을 일으켰다.

파르르 떨리는 다리 밑으로 몇 장의 나뭇잎이 살랑살랑 떨어졌다.

도서관을 나온 직후, 갑작스레 머리가 핑 돈 것이 화근이었다.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으니 잠시만 쉴까.

그런 가벼운 생각으로 앉아있던 나무 그늘이었는데, 해의 위치를 보니 아무래도 정오에 가까운 시각까지 곯아떨어졌나 보다.

"그래서, 잘 잤어? 나랑 백야가 직접 널 찾아다닐때까지?"

"…죄송합니다."

그녀는 뒷짐을 진 채 추궁하듯 물었다.

한달간의 경험에 따르면 이럴 땐 일단 고개부터 숙이고 보는 것이 제일이었다.

어차피 그녀는 내 사죄에 진심까지 바라진 않았다.

그냥 내 비굴한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이 삶의 낙인듯했으니.

"잘 잤냐고. 약속도 어기고."

하지만 오늘은 그 비굴함을 조금 더 맛보고 싶은 모양이다.

갑작스런 변덕은 아니었다.

아직까진 충분히 일상의 범위 안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레나스 제국의 북부대공녀 '카엔 폰 단델리온'은 항상 이렇게 사람 속을 뒤집어놓곤 했으니까.

상대하기 귀찮은 여인이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남들에 비해 충분히 양반이었다.

자기 자신을 여왕처럼 대해주기만 하면 곧장 흡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니 말이다.

다른 여자들에 비해 조금은 작은 키.

자칫하면 바닥에 끌릴지도 모를 기다란 검집.

거기에 만족스럽다는 듯 귀와 꼬리를 살랑이며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면, 가끔 그녀가 귀엽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뭐, 됐어. 피곤해 보이니까 봐줄게, 평민. 백야가 어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허리에 닿는 길이의 기다란 묵색 포니테일.

그 뒤로, 잿빛 털이 촘촘히 섞인 늑대꼬리가 즐겁다는 듯 살랑살랑 흔들거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카엔의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말마따나 진짜 화난 건 아닌 듯하니, 대충 고개만 조아리고 있으면 충분할 것 같다.

"남쪽으로 내려오길 잘했네. 백야는 네가 유즈한테 잡혀간걸지도 모른다며 북쪽의 연구동으로 갔는데."

"……."

"설마 우리 평민께서 대련 시간도 잊고 태평하게 낮잠이나 주무시고 계실 줄은…."

"죄송합니다. 청소하는데 너무 오래 걸려버려서."

대련.

고작 며칠 지났다고 또 개처럼 쳐맞는 날이 돌아왔구나.

언제나와 같은 카엔의 비아냥은 한 귀로 흘린 뒤, 곁에 있던 청소도구들을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카엔의 말 하나하나에 일일이 반응했다간 5분이면 끝날 일이 30분씩 늘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철저히 무시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포인트는 카엔의 목소리 톤이다.

그녀의 기분이 점차 가라앉을 때 즈음 적당한 말대꾸를 해주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

쉽게 설명하자면, 대충 어린아이와 놀아주는 거라 생각하면 비슷할 것이다.

솔직히 카엔이랑 대화할 때면 말이 여왕이지, 권력에 심취한 꼬마아이랑 대화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으니까.

"……."

"……."

그렇게 고작 1분쯤 지났을까.

점차 카엔의 목소리가 옅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옅어졌다기보다 아예 안 들린다.

썩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피곤한 탓에 목소리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한데….

지금이라도 잠깐 장난감 노릇을 해주는 게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짐을 챙기던 중, 묘한 위화감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무언가 없다.

뭘 안 들고 왔지?

마른 걸레. 전부 있다.

물 양동이. 헷갈릴 것도 없으니 이건 아니다.

대걸레. 이것도 뭐, 딱히 두고 올 만한 건 없고.

먼지떨이도 제대로 있고, 혹시 몰라 챙겨온 수세미도 있고, 싸구려 마스크 몇 장도 웃옷 주머니에 잘 구겨 넣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팔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한쪽 무릎을 꿇고 잔디 위를 더듬거리던 내 위에서 자그맣게 들려왔다.

─팔락

한번 더.

그제서야 안개라도 낀 듯 흐릿하던 머릿속에 비상등이 켜진다.

"…저, 저기, 평민? 잠깐만…. 이거 뭐야?"

휙, 고개를 올리자 눈썹을 찡그리며 책을 읽는 카엔이 시선에 들어왔다.

펼치고 있는 부분으로 보아, 최소한 150 페이지는 넘어간 부분이다.

그러니까 아마….

소설 속 그녀가 한창 열심히 이라마치오를 연습하고 있는 파트.

"이거…. 네가 쓴 거야?"

꿀꺽, 침을 삼키느라 대답이 늦어졌다.

하지만 이거다, 하고 딱 떠오르는 대답도 없었다.

내 것이 아니라 대답한다면 그 이후엔 어떻게 이어가야 하지?

도서관에서 주운 물건이라 대답하면 카엔이 믿기나 할까?

침묵은 오래될수록 긍정의 힘을 가진다.

지금 무엇이라도 대답해야만 했다.

내 것이 아니라고. 일단은 발뺌부터.

그렇게 지르고 보려던 찰나.

"……변태새끼…."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카엔이 나를 향해 조심스레 노트를 던져주었다.

오물이 튀지 않도록 던지듯이.

아주아주 조심스럽게.

"여태껏 그런 눈으로……."

"…카엔 님, 그게."

"듣기 싫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잠시만, 잠시만 시간을 좀…."

"듣기 싫다고!"

힌 발자국 뒤로 살며시 물러나는 카엔.

적어도 카엔이 쓴 글은 아닌가 보구나.

그런 태평한 생각 뒤로 미칠듯이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지끈지끈한 머릿속이 암흑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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