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에서 야설을 주웠다-1화 (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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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새벽.

이제서야 하루 일과가 거의 끝났다.

"푸우…."

먼지가 잔뜩 들러붙은 마스크를 벗어 던진 나는 피로가 가득 쌓인 눈으로 주변을 힘겹게 둘러보았다.

'역사' 라 적힌 책장부터 시작해, '마도학' 이라 적힌 책장을 지나, 마지막으론 중앙에 놓여있는 가지각색 형태의 책상들까지.

"이 정도면…."

처음 보았을 때 폭풍 마법이 휩쓸고 간 듯 온갖 서책으로 난장판이 되어있던 도서관은, 장장 9시간의 대청소 끝에 완벽에 가깝게 정리되어 내 시야에 비치고 있었다.

고작 너 혼자뿐이니 돈 아깝다며 꺼버린 마력등.

유독 평소보다 어두운 달빛.

거기에 장시간 청소하느라 쌓인 피곤함까지 세 가지 악재가 겹쳐 꼼꼼히 확인할 순 없었으나, 이 정도면 충분히 정리한 게 아닐까 싶다.

적당히 보이는 곳만 청소한 게 아니라, 사람의 눈길이 쉬이 닿지 않는 곳의 먼지까지 온몸을 비틀어가며 확실하게 제거했으니 말이다.

뿌듯함은 잠시였다.

곧장 뒤따르는 것은 의문.

도대체 사서는 평소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이 새낀 월급도 꼬박꼬박 받으면서 나오는 거 아닌가?

하급 귀족도 귀족이랍시고, 청소같이 격 떨어지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시위 중인 건가?

그럼 도대체 하는 게 뭐야?

─콜록!

마른기침을 뱉어낸 나는 챙겨왔던 청소도구들을 주섬주섬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그래도 힘든 것들은 전부 끝냈으니, 마지막 일 하나만 빨리 끝내고 곧장 침대에 푹 파묻힐 생각이었다.

…내일도 일정을 소화하려면 기껏해야 2시간 정도가 고작이겠지만.

"씨발."

가져온 마른걸레를 겹겹이 쌓던 와중, 나지막한 욕설 한 마디가 막을 새도 없이 튀어나왔다.

2시간.

이걸 누구 코에 붙이라고.

'열람실 청소만 떠맡지 않았더라면 그나마 2시 즈음엔 자러 갈 수 있었을 텐데.'

참다참다 훅 치밀어오르는 짜증에 이가 갈렸다.

도서관 청소 자체는 수업료를 메꾸기 위해 자력으로 한 일이긴 하다만, 열람실 청소까지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그 썅년이 뭐랬더라.

어차피 청소하러 온 거 4층의 열람실도 청소해달라고 했었나.

'개 같은 년.'

…뭐, 짜증은 짜증이고.

그녀의 행동을 아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이곳 여자들에게 나는 학생이 아니라,  '잡부 1' 정도쯤으로 여겨질 테니 말이다.

지식 앞에선 모두가 평등?

웃기는 소리.

귀족 출신인 그녀로선 평민인 날 하대하는게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었다.

감히 평민주제에 귀족에게 앙심을 품는게 잘못된 행동일테고.

천한 신분을 가진 나로선, 이렇게 들리지 않는 곳에서 씩씩 거리는것이 최대한의 반항이었다.

"하."

미간을 꾹꾹 짓누르며 잠을 깨운 나는 반쯤 마른 대걸레와 함께 나무로 된 나선 계단을 밟아 올랐다.

목적지는 최상층인 4층.

사서가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떠넘겼던 열람실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어디서 봤더라……."

르페아스 도서관에서 가장 높은 곳.

그곳에 다다르자 퀴퀴한 고서 냄새가 배어있는 다른 층과 달리, 산뜻하고도 향기로운 과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청소는 내팽겨치고 이런 것 정도만 사서가 관리하고 있는 걸까?

뭐, 내 알 바는 아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아까 봐두었던 원탁으로 향했다.

조금전까지만해도 머리가 아파져 오는 마법 수식들로 가득했던 그곳엔, 단 하나의 책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제목은 없다.

책을 쉽게 분류하기 위해 달아놓은 띠지마저 없다.

그러니 도서관의 책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시말해, 분실물.

열람실을 이용하는 학생들 중 누군가의 분실물이다.

"귀찮게."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면 그나마 이거 하나가 전부라 다행이었다.

분실물이 있으면 아무 종이에나 주인의 이름을 또박또박 써 붙인 뒤, 분실물과 함께 1층 로비에 있는 사서 책상에 가져다 놓으라고 했었으니 말이다.

하마터면 많이 귀찮아질 뻔했지.

의자에 몸을 맡긴 나는 이젠 잘 뜨이지조차 않는 눈으로 열심히 주인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색은 적갈색.

두께로 보아 대충 300페이지쯤 되어 보이는 깔끔한 느낌의 노트였다.

거기에 더해…. 아까 한 번 확인했던 대로, 주인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다.

이것으로 끝.

놀랍게도 눈에 띄는 것은 이게 전부였다.

책의 겉표지엔 이름은 물론이고,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굳이 눈에 띄는 걸 찾아보자면 평범한 노트와 달리 하드커버를 쓰고 있는 게 꼭 소설책을 닮아있다는 것 정도?

물론 책의 제목조차 적혀있지 않으니 진짜 소설책은 아닐 것이다.

발견한 장소가 장소인지라 아마 필기 노트가 아닐까 싶긴 한데….

그렇다고 단정 짓기엔 페이지 수가 좀 많긴 하다.

누군가의 일기장이라도 되는 걸까?

나는 책을 손에 든 채 의자에 한층 더 깊숙이 몸을 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은 좀 쓰지…."

킁킁, 혹시나 싶어 노트의 냄새를 맡아보았으나, 당연하게도 코끝에 스치는 것은 종이 특유의 냄새뿐이었다.

만약 내가 수인이었다면 이 방식으로 주인을 찾을 수도 있었을텐데.

나는 실없는 생각을 마치곤 열람실을 이용할 수 있는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마법에 미친, 마법밖에 모르는 이상한 년이 하나.

날 두들겨패지 않고선 하루를 넘길 수 없는 썅년이 둘.

웃는 낯짝 뒤에 쓰레기 같은 본심을 숨긴 또라이가 셋.

도합 여섯.

'그녀들 중 이 분실물의 주인이라….'

심지어 개중 몇몇은 각자의 사정 때문에 공부를 쉬고 있으니 빼야 한다.

애초에 르페아스 아카데미는 누군가를 나갈 수 없도록 가둬놓는 새장이 아니라, 재능있는 자에게 열린 배움의 요람이었으니.

지금 아카데미에 머무르고 있는 건 총 4명.

그녀들 중 하나.

아니, 생각해보니 간과한게 있었다.

조금전 보았던 열람실 상태로 미루어보아, 이 노트는 누군가가 입학하자마자 잃어버린 물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잠깐 머릿 속에 이름 모를 선배의 물건일 수도 있겠다는 망상이 스쳤다.

"그냥 내용물만 확인해보고 돌아가서 자야겠다."

시큰둥하게 목소리를 뱉은 뒤 피로에 찌든 눈을 양손으로 열심히 비볐다.

고귀하신 귀족님들의 필기 노트에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가 본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고.

그것보다는 만에 하나라도 이게 그녀들 중 누군가의 일기장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그럴 확률은 극도로 낮지만, 프라이드 높고 싸가지없는 년의 부끄러운 사생활을 염탐하며 얻는 재미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겸사겸사 내용에 이름이 적혀 있으면 책의 주인도 확인할 수 있으니 좋다.

'어차피 필기 노트겠지. 굳이 이곳까지 일기장을 가져올리가….'

애초에 그녀들 중 '일기장' 이라는 부드러운 느낌과 어울리는 여인은 한 명도 없었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성노예 조교 일지 같은 게 어울리는 여자들이다.

노예법이 폐지된 국가가 대다수지만, 몇몇 국가는 아직도 남창이 있다고 하니까.

기대를 버린 나는 노트를 펼친 후 곧장 시선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그리곤.

"확실히 귀족이라 글씨는 잘……."

그대로 눈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니. 멈추었다는 표현은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내리다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으니.

페이지 첫 문장을 다시 억지로 머릿속에 구겨 넣은 나는, 그곳부터 다시 천천히 한 글자씩 내용물을 읽어나갔다.

"……?"

그러나 그럴수록 머릿속에 차오르는 건 의문뿐이었다.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게 맞나.

대륙 공용어가 아니라, 마수의 언어라도 되는걸까.

피로에 찌든 머릿속은 논리정연한 생각 대신 의문에 찬 물음표가 한가득 차올랐다.

한 페이지.

두 페이지.

나는 고장 난 것처럼 계속해서 페이지를 넘기다가, 또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첫 줄부터 차근차근 노트를 읽어내렸다.

한 번 더.

한 번 더.

그렇게 첫 페이지의 첫 문장을 10번 즈음 읽어내렸을 무렵.

"……이게 뭐야."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무언가 이상하다.

당연히 노트 안이 백지라서 이상하다는 뜻은 아니다.

글씨는 잔뜩 적혀있었다.

심지어, 살아오며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글씨가.

멍하니 있던 나는 이젠 읽는 것을 포기하고 돈다발을 세듯 페이지를 팔락팔락 넘겨보았다.

놀랍게도 눈에 띄는 페이지마다 활자로 찍어낸 것처럼 깔끔하고도 정갈한 필체의 글씨가 빼곡했다.

그 아름다운 필체로 쓴 문장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만 빼면, 누군가가 열심히 공부한 흔적이라 해도 믿을 정도다.

"……."

그러니까,

'문장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이게…. 무슨……."

페이지를 넘기며 몇 번이고 눈을 비비던 나는, 결국 양손으로 뺨을 두드린 뒤 다시금 노트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눈앞의 풍경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노트 안의 글자는 여전히 이상한 문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쯤이면 이 비현실적인 상황이 현실이라고 받아들여야 할듯하다.

일기장은 아니었다.

필기 노트는 더더욱 아니었다.

가장 가까운 것을 꼽으라면 아마 '소설'일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드디어. 그녀는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입학한 이후로 몇 번이고 루크의 자존심을 짓밟은 끝에, 그가 선을 넘게끔 유도해내고 말았으니.』

『실신할 때까지 억지로 범하겠다는 듯 잔뜩 힘이 실린 손. 그 손에 뒷통수를 짓눌려 베개에 얼굴을 박자, 저도 모르게 허리가 움찔움찔 비틀렸다.』

『매일 아침 열심히 빗어내린 머리카락이 망가지는 것 따윈 아무런 상관없었다.

오히려, 이 정도론 부족했다. 』

『그가 강간당하며 젖는 걸레년이라 모욕적인 언사를 뱉어주었으면 좋겠다.

감히 나를 능멸하느냐며 화를 내면, 닥치라는 듯 새하얀 엉덩이 위에 그의 손자국을 잔뜩 새겨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머리가 베개에 푹 박혀 있어 숨을 헐떡이는 것이 고작이기에.

그에게 진심으로 강간당하기 위해선, 끝까지 싸가지없는 영애를 연기해야 했기에.』

『……개, 새끼…. 두고, 봐……. 죽여버릴, 테니까….』

『웅얼거림에 가까운 목소리가 베개 안에서 사라져갔다.』

『아마 루크의 귀까진 닿을 수 없었겠지. 하지만 딱히 상관 없었다.』

『여자로서 가장 중요한 곳에, 얇은 막 하나 없이 닿아오는 생생하고도 뜨거운 촉감. 이거면 충분했다.』

『그녀는 미칠 듯이 새어나오는 군침을 목 뒤로 열심히 삼켜냈다. 꼴깍,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제 귀에 울릴 정도로.』

『드디어.

그녀는 강간당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뭔 개소리일까.

멍하니 몇 장 더 페이지를 넘겨보던 나는 다시금 표지로 돌아와 이리저리 시선을 옮겼다.

300페이지 즈음 되어보이는 깔끔한 적갈색 노트.

거기엔 누구의 이름도 적혀있지 않았다.

겉표지에도.

그 속에 담긴 소설 안에도.

아.

하나 적혀있긴 했었다.

루크.

다름아닌, 내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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