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 반말 (2)
* * *
푸근함이 느껴지는 해 질 녘의 노을의 황색의 빛이 창문 사이로 들어왔다.
하지만 아멜리아의 숙소는 푸근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침울한 분위기 속,
“어머니는 저를 낳으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아멜리아가 운을 뗐다.
“대단하신 분이었어요. 용맹하고 지혜로운 모험가셨죠. 신분은 평민이셨지만 아버님과 결혼까지 하셨죠.”
아멜리아의 어머니, 아우로라 루이스플 이 세계 버전의 신데렐라처럼 마치 동화책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이야기였다.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게 슬프진 않았어요. 저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으니까. 그런데 아버님께선 저를 바라보실 때마다 슬픈 표정을 짓곤 하셨죠. 아주 어렸을 때였지만 알 수 있었어요.”
“그렇군요.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 네,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도 서먹한 관계예요. 식사 시간에만 잠깐 대화하는 정도로.”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떨리지 않는다.
유능하고 냉철한 공 작가의 공녀라는 평소의 모습처럼 차분한 목소리.
그녀의 부끄러움조차 짓눌러버린 감정이 그녀의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단 증거이리라.
“그래도 오라버니가 계셔주셔서 괜찮았어요. 어린 시절 기억이라 잘 기억나지 않지만 상냥하신 분이셔서 잘 챙겨주시고 자주 놀아주셨거든요. 그때의 기억은… 그래, 따듯한 기억이었어요.”
“그러던 도중에 아델 교수님께서 가출하셨고요.”
“맞아요. 오라버니께서 가출하시고 나서…, 너무 외롭더라고요. 아버님께서는 가문의 일로 바쁘시고 저에게 신경 써주실 틈도 없으셨어요. 어쩌면 어머님을 죽이고 태어난 제가 미워서 그런 걸 지도 모르겠지만요.”
“… 그건 아닐 겁니다.”
강현은 게임에서 봤기에 알고 있다.
아멜리아는 브라함에게 있어 아내를 죽이고 태어난 자신이 아닌, 사랑하는 아내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브라함도 결국엔 사람.
아멜리아를 볼 때마다 세상을 떠난 아루로라의 생각 때문에 아멜리아를 멀리 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어린 아멜리아에게 큰 죄를 저질렀단 사실을 자각하고 있다.
그로 인해 지금까지 아멜리아와 서먹한 관계가 유지 중인 거겠지.
“…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랬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말 그대로의 사실 었으나, 그걸 말해줄 순 없었다.
그건 부녀끼리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으니까.
“어쨌든, 저는 외로움을 이겨내고 싶어서 친구를 만들어보려 했어요. 근데… 사람들은 아멜리아가 아닌 돈과 명예, 무력을 지닌 공작가의 공녀를 원했어요. 제가 이뤄낸 것이 아닌 공작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만으로 얻은 것들.”
“… 그래서 제게 물었던 거였군요.”
“강현 님은 다르단 걸 알고 싶었지만 그래도 강현 님의 입으로 듣고 싶었어요. 다들 가면을 쓰고 진심을 원하지 않았었으니까.”
마음이 통한 진실된 관계가 아닌 이해득실을 위한 계산적인 관계.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는 어린 아멜리아.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가 와닿았다.
“누구한테 털어놔도 적당히 이해한 척하기만 했어요. 아마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하고들 계셨겠지만.”
“뭐…, 그렇겠죠.”
안 봐도 뻔하다.
모든 걸 가진 것처럼 보이는 아멜리아의 외로움을 누가 이해해주겠는가.
“강현 씨는 이해해주실 수 있나요?”
“… 저도 부모 없이 살아와 푸스탄트를 만나고 처음 가족이 생겼기에 어느 정도 이해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전부 이해할 수 있다고 할 순 없습니다.”
강현은 솔직하게 답하기를 선택했다.
어릴 적부터 부모 없이 고아원에서 자라나 많이 놀림받기도 하고 다른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하지만 외로움보단 비곤함과 부족함이 가장 괴로웠다.
그렇기에 적어도 부유한 아멜리아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그렇죠.”
“죄송합니다.”
“아뇨, 전혀 죄송하실 거 없어요. 저는 그렇게 솔직하게 말씀해주시는 게 가장 기쁜 걸요.”
아멜리아가 강현의 허리에 둘렀던 팔에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고마운 사람이다.
그저 적당히 대답하는 것이 아닌 깊게 생각하고 솔직하게 대답해주는 강현이.
“히엘은 옛날에 저보고 아예 대놓고 배부른 소리라고 말했었죠.”
“그, 그렇습니까?”
배짱도 좋네, 강현은 살짝 감탄했다.
“후후, 그래서 제 기사로 선택하고 지금까지 함께해온 거예요. 저는… 누구보다 가식적이지만 가식적인 사람이 싫거든요.”
“저는 뭐…, 말씀드렸던 그대로입니다. 아멜리아 님의 집안과 신분은 아멜리아 님의 일부분이라 해도 그걸 노리고 접근한 건 아니죠.”
“저도 알아요, 고백하기도 전에 차여버렸었잖아요.”
“아하하….”
그랬을 때도 있었지.
벌써 8년 전 얘기였나.
“강현 님이 처음이었어요. 저를 귀찮다는 듯이 바라본 사람은.”
“… 예? 음…, 공작령 성 앞 도시에서 처음 만났을 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잠시 기억을 짚어본 강현이 물었다.
당시 자신과 푸스탄트에게 숙식을 제공해준 마을 사람들을 위해 의료 봉사를 하던 중, 아멜리아와 처음 만났다.
그때를 빼고 나면 그녀를 귀찮게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거 같은데.
“맞아요. 그때 첫눈에 반했죠.”
“귀찮게 봤다는 이유 때문입니까?”
“오직 그것뿐만은 아니지만 가장 큰 이유였죠.”
너무 잘생긴 외모 때문이라고 하면 너무 속물 같아 보일까 봐 아멜리아는 말을 아꼈다.
“그렇군요….”
제대로 얻어걸렸다.
이게 착하게 살아오며 선 카르마를 쌓아 행운을 올린 덕일까.
귀찮게 봤다는 이유로 아름답고 멋진 연인을 얻었다.
이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스스로의 힘이었지만.
“뭐…, 어쨌든 그런 일든이 지나고 독해지기로 했어요. 제 스스로가 가치를 지닌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왔고 지금에 이르렀죠.”
“고생 많으셨습니다.”
“네, 엄청 고생했죠. 그래도 후회하지 않아요. 스스로 잘 해왔다고 자부하고 있고 앞으로도 열심히 독하게 살 거예요.”
“분명 잘 해내실 겁니다. 지금까지 누구보다 잘 해오셨으니까.”
“물론이죠. 제가 누구인데, 후후.”
아멜리아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본래의 아멜리아.
멋지다 못해 근사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말해주시니 너무 기뻐요.”
“흐흐, 다행입니다. 어느새 괜찮아지신 거 같군요.”
침울해 보였던 아멜리아가 어느새 멀쩡해져 있었다.
“네에…. 다 말하고 나니까 엄청 편하네요.”
“저라도 괜찮다면 언제든지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사실 오라버니께서 가출하신 뒤에 자유롭게 사시는 이야기를 들으니 왠지 부러워져서 혼란스러웠는데…, 전혀 부러울 게 없더라고요.”
“그렇습니까, 왜요?”
“강현 씨가 제 옆에 계셔 주시잖아요.”
외로웠다.
외로움을 외면해왔다.
공작령 밖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아델의 이야기는 외면의 방법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심란했다.
지금까지 잘못해온 건가 싶고 여태껏 단 한 번도 한 적 없던 후회를 해버릴까 봐.
하지만 그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강현을 만났고 이제 외로워하지 않아도 되기에, 괜찮다.
“키스… 해주실래요…?”
“물론이죠.”
강현과 아멜리아가 입을 맞췄다.
∴
예상했던 것처럼 아멜리아를 위로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마음속의 이야기를 편하게 꺼내며 생각을 정리했고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릴 수 있었겠지.
강현은 그저 그녀가 안겨있을 곳이 될 수 있었음에 만족하기로 했다.
“헤헤…, 드,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포옹과 키스가 끝나고 약간의 거리를 벌리고 나란히 앉은 아멜리아가 말했다.
“다시 부끄럼쟁이가 되셨습니다.”
“그, 그러게요. 어서 고쳐야 할 텐데.”
분명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만 해도 제대로 말할 수 있었지만 다시 목소리가 떨리고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제 개인적인 욕심이지만 저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만 보여주는 아멜리아 님의 귀여운 모습이 너무 좋단 말이죠.”
“읏…, 그, 그런가요오…. 그, 그래도 좀 바보 같아 보일 텐데.”
귀엽다는 말에 숨을 삼키며 대답했다.
“누가 바보가 아니라 그저 귀여울 뿐입니다. 누가 아멜리아 님보고 바보라고 하겠습니까.”
제국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는 아멜리아다.
지금처럼 귀엽고 어설픈 모습을 보인다 해도 그녀가 진짜 바보가 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오…, 저는 귀여움과는 좀 거리가 있잖아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세상에서 아멜리아 님이 제일 귀여우신데.”
귀여움으로 따지자면 아멜리아는 강현이 평생 동안 봐온 사람들 중에서 단연 1등이다.
“귀엽다는 말 보단… 아름답단 말이 듣고 싶답니다…. 저는 숙녀라고요….”
“당연히 아름다우시죠. 아멜리아 님의 외모를 누가 모릅니까. 아름다우시면서 귀여우십니다.”
“후훗…, 그, 그래요.”
강현에 말에 아멜리아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콧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멜리아의 방에 찾아온 목표가 끝났으니.
“그럼 저는 슬슬 일어나 보겠습니다. 언제든 필요할 때면 편히 불러주십시오.”
슬슬 일어나야 할 때임을 깨달은 강현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버, 벌써 가시려고요…?”
“네, 이제 얘기도 끝났으니 돌아가 볼까 합니다. 그…, 아니면 조금 더 있다 갈까요?”
보내기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여서 물어보자 아멜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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