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입학식 (3)
* * *
입학식이 끝난 뒤, 교실로 돌아가기 전.
“내 제자의 아카데미 선서문 낭독을 보게 될 줄이야.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어. 끌끌.”
씨익, 평소처럼 푸근한 미소를 지은 푸스탄트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강현은 그런 푸스탄트의 모습에 뿌듯함을 느꼈다.
‘현대에서는….’
고아원에서 자랐던 탓에 친구들을 찾아온 다른 집 부모님을 보며 부러워하고는 했는데.
괜스레 들뜨는 기분이었다.
이 세계로 와서 그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겠지.
그런 푸스탄트의 은혜에 감사할 뿐이었다.
자신의 성공을 오히려 본인이 더 기뻐해 주었기에 피가 이어진 친부모 부럽지 않았다.
“죽긴 뭘 죽어. 나보다 먼저 죽을 생각 말라고. 어차피 반신이잖아.”
반신인 푸스탄트는 자신의 수명을 직접 정할 수 있다.
영생을 누리고 싶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니까 최대한 오래 살아주길 바랄 뿐이었다.
막연한 생각일 뿐이지만 푸스탄트를 먼저 떠나보내는 건 분명 슬플 테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 아니겠느냐. 손주 보기 전까진 세상 뜰 생각 없으니 걱정 말거라. 그래서 말인데 며늘아가야. 혹시 좋은 소식은 없느냐?”
“아…, 그, 그건….”
레이는 자신을 향한 갑작스러운 푸스탄트의 질문에 당황해 잠시 말을 더듬었다.
좋은 소식?
마음 같아서는 얼마든지 들려줄 수 있다.
아니 오히려 들려드리고 싶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강현은 아직 아이를 원치 않는데.
최소한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라고 약속한 만큼 어서 시간이 흐르길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애한테 뭘 물어보는 거야. 그런 건 졸업하고 자리 잡고 나서의 일이지.”
하여튼 늙어서 그런지 주책은 여전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그의 주책마저도 반가울 따름이었지만.
“흐음, 그렇구나. 아쉽게 됐어. 그래도… 언젠가는 좋은 소식이 들려오길 기대하마.”
“뭐…, 조금 걸리겠지만. 일단 교실에서 수업하고 와야 하니까 다녀올게.”
“그래, 이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테니 잘 다녀오려무나.”
∴
강현은 곧장 자신이 배정받은 1학년 1반으로 향했다.
현재까지 파악된 바로는 아리아와 벨라가 같은 반.
100명의 입학생들은 20명에 사용인까지 더해져 30~40명씩 5개의 반으로 나누어진다.
남은 17명.
앞으로 약 1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생활해야 하는 같은 반 학생들이었기에 약간의 기대감과 불안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냥 무난하면 좋겠는데.’
괜히 껄끄럽고 성격 더러운 놈들이 같은 반이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들어가자.”
“네.”
강현은 아리아와 함께 반 안으로 들어갔고 사용인의 신분인 레이와 라비가 그들의 뒤를 따랐다.
반에 들어섬과 동시에 강현은 반의 분위기가 극명하게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중안 책상을 기준으로 확연히 차이가 나는 분위기.
오른쪽에는 벨라가 조용히 앉아있으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왼쪽에 모인 학생들은 시끌벅적했다.
“뭐지?”
익숙한 얼굴이 같은 반이라는 기쁨을 느낀 것도 잠시, 강현은 모여있는 학생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마 저 가운데 그들을 끌어모은 무언가가 있겠지.
하지만 학생들에게 둘러싸인 탓에 정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이강현 님이십니까?”
적당히 빈자리에 앉으려 발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단정한 메이드복을 깔끔하게 차례 입은 한 여인이 다가와 강현에게 물었다.
귀여운 인상의 미인.
강현은 곧장 그녀의 가슴팍으로 시선을 옮겼다.
주인을 따라 아카데미에 들어온 학생의 개인 사용인들은 원칙적으로 자신이 소속된 가문을 상징하는 브로치를 착용해야만 했기에 상대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예, 맞습니다.”
이 메이드가 착용한 브로치는 제국민이라면 몰라볼 수가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황실의 브로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올해 아카데미에 입학한 제국의 황녀, 릴리가 같은 반일 거란 사실이.
그럼 다른 학생들이 모인 곳 중앙은 릴리가 앉아있는 거겠지.
“… 황녀님께서 수업이 끝난 뒤 긴밀히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시간을 낼 수 있는지 여쭤보라 명하셨습니다.”
잠시 주변을 살펴본 메이드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학생들의 이목이 이 쪽으로 끌리지 않고 있는지 확인한 거겠지.
하지만 수업이 끝난 후에는 푸스탄트를 만나러 가야 한다.
지난날의 일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식사를 함께하기로 했으니까.
하지만 황녀의 긴밀한 대화를 쉽게 거부할 순 없었다.
이렇게 다른 학생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메이드를 대신 보낸 거면 그만큼 중요한 일일 테니까.
“혹시라도 후에 다른 일정이 있다면 다음으로 미뤄도 괜찮다고 하셨으니 편히 대답해주세요.”
그럼 괜찮겠지.
“음…, 죄송합니다만 수업이 끝난 후에는 힘들 거 같습니다. 스승님이 다시 여행을 떠나시기 전에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던지라.”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밤은 어떠신지요.”
“그것도 황녀님께서 물어보라 명하신 겁니까?”
“예.”
꽤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어지간히 중요한 게 아닌 이상 이렇게 나올 황녀가 아닐 텐데.
주인님, 설마 잊으신 건 아니죠?
머릿속에서부터 엘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긴장한 듯한 목소리는 걱정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당연하지.
엘리스는 강현에게 오늘 밤, 함께 자자고 말했다.
평소에도 동침하지만 굳이 함께 자자고 말한 것은 성교를 의미했고.
그런데 잠깐 이야기만 하고 오는 건 괜찮을 걸. 그렇게 오래 붙들려 있지도 않을 테니까.
긴밀한 대화라고 해봤자 얼마나 걸리겠는가.
내일의 수업이 존재하는 만큼, 취침 시간 전에는 보내줄 거다.
성교는 그 후에 맺어도 충분하다.
음…, 그래요. 대충 보니까 좀 서두르는 것 같던데.
고맙다.
뭘요. 제가 부탁한 건데.
“그럼 8시 내외로 연락드리겠다고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강현은 제국의 황녀인 릴리에게 걸려있던 저주를 해결해준 뒤, 그녀와 연결된 통신 스크롤을 하사 받았다.
서로의 근황을 묻는 사적인 연락이 간간히 있긴 했으나 거의 대부분이 약과 포션, 영약의 구입에 관련된 연락이 주를 이루었다.
“네, 그러면 황녀님께 전달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양손을 배 위로 모은 메이드는 천천히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물러갔다.
강현은 적당히 앞쪽에 위치한 자리를 골라 앉았다.
잠시 벨라의 옆에 앉아볼까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지난번 그녀는 자신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굳이 그러진 않았다.
‘그래도 친해지는 편이 더 좋은데….’
7대 용사의 숨겨진 후손인 칸트루스 자작 가는 현재 강현이 직접 제약한 정력제를 통해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 정력제를 운송, 판매하는 상단은 총관리자는 벨라가 맡고 있다.
또한 아카데미는 원칙 상 학생의 신분으로 모두가 평등함을 추구하고 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졸업하기 전 3년 동안의 이야기일 뿐이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에는 제국이라는 틀 안에서 얽히기 마련.
그런 만큼 온갖 정치와 권모술수가 판을 치는 작은 정치판과 다름이 없다.
강현과 벨라의 앞날은 안 봐도 뻔하다.
그렇기에 서로 협력하길 바랄 따름이지만.
‘조금 천천히 다가가 봐야겠네.’
생각을 정리한 강현은 이제 같은 반 학생들의 얼굴을 살폈다.
‘… 무난하게 흘러가긴 글렀네.’
일단 황녀인 릴리가 같은 반이라는 사실부터가 무난함과는 턱없이 거리가 멀었다.
거기에 더해.
‘펠로스에 추종자들까지…’
절로 한숨이 나오는 조합이었다.
동부에 위치한 글로리아 백작가의 삼남 펠로스.
성격이 포악한 망나니로 소문이 자자했으며 권위의식으로 절여진 그는 귀족이 아닌 사람들을 모두 천하다고 생각하며 하대하는 캐릭터였다.
최근에는 그의 악명이 별로 들리지 않았지만.
어쨌든 게임 속에선 분명 귀족이 아닌 다른 출생의 캐릭터로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경우 저 펠로스 때문에 상당히 고생하게 된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남작가, 자작가의 추종자들까지.
“괜찮겠지.”
정계에 어느 정도 관심을 두고 있는 이상 루이스플 공 작가와 강현의 관계를 모르는 이는 없다.
든든한 뒷배가 있는 만큼 불쾌한 얽힘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길 바랄 뿐이었다.
스르륵.
그 후 조금 더 기간이 흐르고.
교실의 앞문이 열렸다.
교실로 들어온 인물은 브룩 아그니스.
그의 등장과 함께 모여있던 학생들은 즉시 흩어져 자신들의 자리에 착석했다.
“어서 와라, 제군들. 앞으로 1년간 제군들을 담당할 담임교사, 브룩 아그니스다. 내가 누구인지는 이미 다 알고 있을 테니 자기소개는 생력 하도록 하지. 그리고 짧게 말하겠다. 교칙과 오늘의 선서를 잊지 말아라.”
탁.
브룩은 들고 왔던 서류들과 작은 카드들을 교탁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마쳤다.
그의 카리스마에 압도되어서 그런 걸까.
학생들은 사이에는 침묵이 맴돌았고, 그 속에서.
“네, 물론이죠.”
유일하게 릴리가 대답했다.
역시나 저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걸까.
알고 있던 그대로였다.
“흠, 릴리 페론티아 말고는 전부 입이 없나! 대답!”
“예!”
“목소리가 작다!”
“예!!!”
우렁찬 학생들의 목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우자, 이제야 좀 봐줄만하다는 양 짧게 고개를 끄덕인 브룩은 들고 왔던 서류들을 넘겨보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역시 대단하네.
아무리 신분의 틀에서 벗어난 공간이라 할지라도 제국의 황녀인 릴리를 존칭이 아닌 본명으로 부르다니.
강현은 잠시 감탄했다.
“우선 우리 반의 임시 반장을 뽑도록 하겠다. 이강현 학생, 자리에서 일어나도록.”
“예.”
“임시 반장의 선별기준은 성적순이다. 입학시험 성적 1등인 네게 가장 먼저 임시 반장을 맡을지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할 건가?”
“맡은 바 역할에 최선을 다하여 임하겠습니다.”
임시 반장.
이곳은 현대에서 지냈던 학교와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상당히 다르다.
그저 선생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 반장이 아니란 말.
“그럼 이제부터 학생증을 나눠주겠다 호명하는 학생은 앞으로 나와 받아가도록.”
브룩은 학생들을 호명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이름이 불린 학생들은 한 명씩 교탁 앞으로 나가 학생증을 받았다.
강현도 학생증을 받고 자리로 돌아와 학생증을 확인했다.
[이강현]
[1학년 1반]
[검술학과, 마법학과]
[개인 점수: 10000]
[학급 점수: 0]
“간단하게 설명해주겠다. 앞으로 너희들은 여러 가지의 시험과 수업을 통해 개인 점수와 학급 점수를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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