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겜 속 중간보스와 히로인들이 내게 집착함-118화 (118/148)

〈 118화 〉 입학식 (1)

* * *

이처럼 좋은 날이 또 있을까.

우천이 예상되었던 3월 2일의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으며 그 사이를 순백의 구름들이 수놓고 있었다.

내리쬐는 햇볕은 딱 좋게 따듯했으며 불어오는 바람은 볼을 잠시 간지럽힌 후, 약간의 시원함을 남겨둔 채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생명이 시작되는 계절, 봄.

화단을 장식한 밝은 색의 꽃들을 바라보며 강현은 생각했다.

‘1주일 말리고 곱게 빻은 다음에 물에 끓이면 감기약으로 딱인데, 저건 소독에 좋고.’

길거리에 자라난 공짜 재료들을 그냥 보고 지나칠 수 없는 게, 약제사의 종특이었다.

강현 또한 마찬가지.

원래였다면 챙길 수 있는 대로 챙겨갈 거다.

강현은 이런 식으로 채집해둔 재료들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아왔으니.

그래, 원래라면.

아카데미의 화단과 입학실 날이 아니었다면 그랬겠지.

“아가씨, 뭔가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너무 긴장하신 건 아니시죠?”

옆에서부터 아멜리아의 호위 기사이자 소드마스터인 히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하죠, 걱정하지 말아요. 히엘.”

아멜리아는 여유로운 말투로 말했다.

수석의 자리는 아쉽게 놓쳐버렸으나 차석으로 입학한 만큼 학생 대표로서 선서를 하게 된다.

그 정도쯤이야, 아멜리아에겐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강현과 단 둘이 무대에 올라야 하는 탓에 실수할 것이 걱정이긴 했지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다른 학생분 들게 멋진 모습 보여주시길.”

“네, 고마워요.”

히엘 또한 그 부분을 걱정하고 한 말이었으나, 자신의 주인이 당연하다고 한 만큼 더 이상 걱정 할 필요는 없으리라.

“흠흠, 레이?”

아멜리아와 히엘의 대화를 지켜본 강현은 레이를 불렀다.

긴장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랑하는 연인의 응원을 듣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다.

고작 입학생 선서문을 읽을 뿐이지만.

“강현 씨면 분명 잘하실 텐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멋지고 근사한 강현이기에 무조건 잘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당연히 강현을 응원할 생각이 있긴 했으나 다른 여학생들이 강현에게 치근덕 거리면 어떡할 지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신경이 다른 곳에 쏠려 있었다.

“하하….”

강현은 조금 부끄러웠던 탓에 멋쩍게 웃었다.

그럼에도 항상 레이가 자신에게 보내주는 절대적인 신뢰는 기쁘고 고마울 뿐이었고.

“잘하고 오세요.”

“응, 고맙다.”

레이는 평소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10분 정도 뒤에 올라가야 하는데 준비됐나?”

입학식이 한창 진행 중인 무대 뒤편.

검술 시험 때와는 달리,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아그니스 공작가의 장남.

브룩 아그니스가 다가와 물었다.

“네.”

“네.”

아멜리아와 함께 대답한 강현은 살짝 감탄했다.

2M가 넘는 거구에다가 엄청난 근육을 자랑하는 브룩인 만큼 정장의 핏을 살리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가 입은 정장은 그의 탄탄한 몸을 더욱 세련되어 보이게 만들어줬다.

어디 실력 좋은 재단사라도 알고 있는 걸까.

다음에 기회가 되면 물어봐야지.

“음, 선서의 내용은?”

“다 외워왔습니다.”

“그래,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말이라도 더듬으면 꽤 쪽팔릴 테니 말이야.”

하하하!

브룩은 체구와 얼굴에 잘 어울리는 호쾌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적당한 농담.

강현과 아멜리아는 작게 웃음으로써 그의 조언에 대답해주었다.

“그리고 이건 사담이다만…, 루이스플 공작각하께서는 잘 계신가?”

“예. 최근, 아그니스 공작가와 협업 중인 북서 해양 개발 건으로 꽤 즐거워 보이셨습니다.”

“그렇군.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나까지 기쁘군. 다음에 한번 찾아뵙겠다고 안부 전해주도록.”

“네. 분명 아버님께서 기뻐하실 거랍니다.”

그리고 짧게 진행된 귀족 간의 대화.

서로를 신경 쓰고 있는 것이 선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래, 그리고 이강현.”

“예.”

“손님께서 찾아오셨다.”

“손님…, 말입니까?”

“그래. 입학식의 축사를 시작하기 전 너와 만나고 싶다고 하시더군.”

강현은 손님의 정체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제국 최고이자, 훗날 제국을 이끌 학생들이 모이는 아카데미의 입학식인 만큼 축사를 맡은 인물 또한 절대 평범할 리가 없다.

또한 지금까지의 아카데미 축사는 보통 황족, 공작가의 가주들, 육각성의 장로들이 맡아왔고.

그런 인물이 굳이 자신을 찾아온다라….

‘황녀? 록스?’

강현은 곧장 제국의 황녀이자 황위 계승권 1순위의 릴리 페론티아와 승리와 전투의 신, 베가를 섬기는 베가교의 교주이자 육각성의 장로 중 하나인 록스 라우티를 떠올렸다.

축사를 맡을 정도의 인물들 중, 강현과 연이 있는 사람은 그 둘이 전부였으니.

루이스플 공작가의 가주, 브라함 또한 가능성은 있었지만 아멜리아에게 따로 축사와 관련되어 들은 이야기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요한도 가능성 있는데?’

현시점, 제국의 유일한 검성이자 제국 제일 검.

요한이 찾아왔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에게 들은 것이 없다 해도, 그의 성격 상 깜짝 놀라게 해주겠답시고 비밀로 했을 가능성도 있었으니.

일단 들어봐야 알겠지.

“누구십니까?”

“음, 마침 너의 뒤에 오셨군.”

“예…?!”

브룩에 말에 강현은 당황했다.

소드마스터이자 6 위계 마법사인 자신이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등 뒤를 잡혔다고?

제 아무리 브룩… 아니, 요한 정도의 실력자라 해도 그건 불가능하다.

강현은 곧장 뒤를 돌아보았고.

쿡.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이 볼을 찔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길게 늘어진 순백의 수염.

“끌끌,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느냐, 강현아.”

들려오는 나긋나긋하고 푸근한 목소리.

반가우면서도 미운 얼굴이었다.

“할… 아니, 스승님?”

푸스탄트였다.

평소처럼 부르려 했던 강현은 곧장 브룩의 시선을 의식하고 존칭을 사용했다.

당황한 것 치고는 꽤나 빠른 대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 네 스승이다. 브룩.”

“예, 푸스탄트님.”

“잠시 제자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데, 선서문 낭독까진 얼마나 남았느냐.”

푸스탄트의 연분(??) 그 누구와 맺어져 있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예의 바르게 말하는 브룩의 모습을 보는 건 강현에게 있어서 꽤나 생소한 일이었다.

게임 속에서도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

“지금 진행 중인 제국 찬가가 끝나면 바드들의 공연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그 후에 신입생 선서가 시작되니 앞으로 10분 정도는 여유롭습니다.”

“그래, 고맙구나.”

브룩에게 말한 뒤, 푸스탄트는 강현에게 시선을 보냈다.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를 따라나섰다.

“잠깐 다녀올게.”

푸스탄트의 텔레포트.

도착한 곳은 푸르른 숲속이었다.

“오랜만이네, 할배.”

강현의 말에는 불만스러운 기색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었다.

푸스탄트가 입학식에 오고, 2년이 넘는 시간 만에 재회한 것은 당연히 기쁜 일이었지만 마지막 답장을 받은 지 대충 반년이나 지났으니.

“그동안 잘 지냈어?”

그래도 결국 강현에게 있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자 소중한 사람이다.

불만스러운 감정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다만, 답장이 없던 이유가 걱정되었을 뿐.

“그래, 너무 잘 지낸 탓에 배가 나와버렸지 뭐냐. 허허.”

푸스탄트는 기본적으로 마른 체형이다.

그래서인지 배가 나온 건 전혀 티 나지 않았지만.

“강현이 너도 잘 지낸 모양이구나.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근사해졌어.”

“뭐…, 그렇지 다른 애들 덕도 있고.”

자신을 믿어주고 따라주는 과분한 여인들.

그녀들 덕에 잘 지낼 수 있었다.

의지할 곳이 되어주었으며 외로움을 느낄 틈조차 없었던 건 전부 그녀들 덕이었으니.

“끌끌….”

강현의 말에 기쁨과 안도감을 느낀 푸스탄트는 작게 웃었다.

‘예언의 아이’.

운명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모양이니.

“그런데 할배, 도대체 뭘 하고 다니길래 연락이 안 되는 거야. 2년 넘게 얼굴도 안 비치던 사람이 갑자기 아카데미 축사는 참석하네?”

강현은 생각해보니 빡쳤다.

사랑하는 아들이니 뭐니 했던 푸스탄트이기에.

이게 NTR이라는 걸까?

‘웃기고 있네.’

이상한 사고의 흐름 끝에 도달한 생각을 곧장 털어버렸다.

“너무 뭐라 하지 마려무나. 나도 나름대로 바빴으니 말이야.”

“그러시겠죠. 암요.”

가문의 일로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다던 아멜리아조차 그날 보낸 연락은 당일에 답장해줬었는데.

“하하…, 너무 째려보지 말거라. 네가 수석으로 입학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쁜 와중에 시간 내서 찾아온 거니 말이야.”

“… 그래. 근데 뭐 하느라 그렇게 바쁜 거야?”

뭐 어쨌든 찾아와서 얼굴이라도 비춰줬으니 용서해주자.

강현은 마음을 정하고 푸스탄트에게 물었다.

바쁜 이유가 별 시답잖은 이유라면 마음이 바뀌겠지만.

“들어보니 입학시험 때 큰 사고 있었던 모양이더구나.”

“고룡의 심장 얘기하는 거지?”

아카데미를 운영하는 리케스 백작가의 가보.

‘고룡, 브루노스의 심장’이 파괴된 사건.

세간에는 ‘고룡의 심장’이 아닌 아카데미의 총장이 직접 복제한 복제품이 파괴된 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래. 이걸 보면 너도 내가 왜 연락이 뜸했는지 이해할 게다.”

“응?”

무슨 소린가 싶어, 강현은 푸스탄트를 잠시 바라봤다.

그는 5 위계 차원 마법, 아공간 주머니를 사용했다.

그리고 그 틈에서 나온 물체를 본 강현은 두 입을 떠억, 벌릴 수밖에 없었다.

“하, 할배 그건….”

붉은 기운이 일렁이는 백옥의 구슬.

“그래, 고대에 존재했던 드래곤들의 왕. ‘용왕, 라드삭스의 심장’이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