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불합리한 관계 (3)
* * *
검신으로서의 기억은 없다.
대부분 검술과 관련된 기억들.
하지만 느낌을 느낄 수 있다.
강현에 대한 감정이 첫사랑이라는 것.
성녀에게서 느껴지는 애틋함.
한이라는 데스나이트에게서 느꼈던 안타까움과 동료의식, 등등.
항상 자신감에 차 있었다.
검술에 관해서는 말할 거도 없다.
그 외 다른 모든 일도 평균 이상을 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고, 실제로도 그래 왔다.
집안일이나 마법 강현의 제약을 돕는 것도.
엘리스는 무력함을 느꼈다.
무력함이 낯선 것으로 보아,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아닐까.
“….”
“…, 혹시 별로였어?”
걱정스러운 말투로 강현이 물었다.
오른쪽 검지 손가락으로 계속 매트릭스를 치고 있는 걸로 봐서는 아마 불안해하고 있는 거겠지.
고개를 저어 답했다.
별로는 무슨.
심각할 정도로 좋아서 문제다.
진심으로.
중간부터는 상스러운 신음소리를 연신 뱉어낼 정도였으니까.
그래서 불만이었다.
“삽입 전까지 했던 게 다 의미가 없잖아요….”
성관계에서 우위를 점한다.
지금까지 열심히 연습해온 기술들로 강현을 휘어잡으려 했다.
분명 손과 입을 활용할 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그의 달콤한 정액을 삼킬 때까지만 해도 완전히 넘어왔다고 생각했고.
근데 무슨 소용인가.
박히면 끝이다.
엄청난 체력과 정력을 지닌 강현이라는 수컷의 성기를 받아들여야 하는 암컷의 몸으로 태어난 이상, 절대 이길 수 없다.
그저 거칠게, 야성적으로 자지를 박아댄다.
일관적인 동작이었다.
그런 만큼 당연히 노련함도, 기술도 없었던 거겠지.
처녀인 엘리스였으나 모를 수가 없었다.
직접 박히기도 했고.
하지만 엄청난 크기의 성기는 그걸 가능케 만들었다.
질 내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 만큼, 어딜 어떤 식으로 박아대든 기분 좋은 곳을 푹푹 찔러댄다.
그의 자지가 들어올 때면 살이 밀려 들어오고, 빠져나갈 때면 살이 함께 빨려나간다.
사정없이 자궁 구를 두드릴 때마다 머리는 백지장처럼 새하얘지고 쾌락은 마치 전류처럼 온몸을 감전시킨다.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엘리스는 그저 강현의 음경이 주는 쾌락에 헐떡일 수밖에 없었다.
분명 처녀였는데.
엄청 아픈 만큼 첫 경험의 기억은 고통이기에 그리 아름답지 못할 거라 들었는데.
자신은 강현이 첫 번째 사정을 하기도 전에 쾌락에 빠졌었다.
역시, 일반화해선 안된다.
분명 ‘노련한 여자의 밤’과 ‘그 이의 마음을 휘어잡는 법’이라는 책을 쓴 저자들은 분명 강현의 것에 박혀보지 못한 안타까운 여자들일뿐일 거다.
“….”
엘리스는 어딘가 억울해하고 있다.
그녀의 표정에서 침울함과 비통함이 절절히 느껴져 왔으니까.
삽입 전까지 했던 게 다 의미 없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엘리스는 자신이 섹스를 리드하고 싶어 했었으니.
하지만 삽입된 이후부터는 제대로 된 말을 하는 것도 벅차 보였다.
“무슨 소용이 없어. 적어도 나는 엄청 좋았어.”
강현은 자신의 팔을 베고 누워있는 엘리스의 옆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해 침울해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최소한 심심찮은 위로를 건네기로 했다.
“아프다고 그만해달라고 했는데 그만해주지도 않고.”
엘리스는 강현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
강현은 고민했다.
그냥 네 말이 맞다고 인정해줄지.
정확히 기억난다.
5번째 사정을 마치고 엘리스가 12번째 절정을 맞이했을 때쯤이었지.
아프다고 그만해달라 하기엔 너무 늦은 거 아닌가?
그리고 아파 보이지도 않았는데.
“너 안 아팠잖아.”
그래도 할 말은 하기로 했다.
상대에게 져주는 것은 관계에 있어서 긍정적인 효과를 주지만, 그게 과하면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엘리스와 만난 뒤로부터 대부분 져주면서 살아온 만큼, 성관계에 관해서는 져주지 않아도 되겠지.
“….”
강현의 말에 정곡을 찔린 엘리스는 시선을 피했다.
“흥, 됐어요. 오늘은 이렇게 물러서지만 다음에 두고 보자고요.”
그리고 엘리스는 새침한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자신만만한 표정과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삼류 악당의 클리셰 같은 대사를.
∴
엘리스와의 첫날밤은 강현의 압도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 정도면 엘리스도 첫 경험을 그리 나쁘지 않게 기억할 테고.
다만 끝까지 하지 못했단 사실이 끝내 아쉬웠다.
더할 수 있긴 했으나, 내일은 아멜리아와의 데이트가 약속되어 있었으니.
그런 만큼 조금이라도 자둘 필요가 있었다.
엘리스에겐 미안했지만, 그녀도 이해해줬고.
아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했었지.
좋았다면서 왜 다행이라는 걸까.
강현은 아직 이해할 수 없었다.
자고 일어난 뒤, 깨끗하게 몸을 씻었다.
멋들어진 옷을 입은 뒤, 아멜리아와 함께 나서 수도 페론의 곳곳을 거닐었다.
검문소 옆 빵 짚을 들려 식사를 한 뒤, 시장을 구경했다.
겸사겸사 괜찮은 약초들도 잔뜩 구매하 두고.
카드 마술공연을 관함 한 뒤, 점심을 먹고 투기장에서 전사와 몬스터의 전투를 관람했다.
강현은 꽤 취향에 맞았으나 아멜리아를 에스코트하는 입장에서, 그녀의 취향이 맞을지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즐겁게 관람하는 것을 보고 안심할 수 있었고.
그 후, 실내에 조성된 장미정원을 거닐었다.
적색, 백색, 분홍색.
3가지의 장미들이 아름답게 만개해 있었다.
물론 지금은 1월 중순으로 한창 추울 때였으나, 따스함의 돌이라는 마법 아이템으로 난방 중이기에 가능했다.
역시 판타지 세계답다고나 할까.
강현이 그런 감상을 가지는 동안 아멜리아는 꽃들의 향기와 아름다움을 즐겼다.
그리고 저녁 식사가 끝난 뒤, 숙소로 돌아왔다.
그렇게 데이트가 끝났다.
∴
“이런 문제는 특히 실수할 확률이 높으니 조심하는 게 좋아요. 앞에 주어진 문장들을 통해, 주요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해야 하죠.”
아멜리아의 동거에 합류하고 시간이 꽤 흘렀다.
어느새 1월.
아카데미의 입학시험까지 어느새 1달조차 남지 않은 상황에서, 아멜리아는 강현과 아리아에게 수업을 해주고 있었다.
“음…, 예를 들어서 한가지만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네, 좋아요. 으음…”
강현이 물었고, 아멜리아는 그대로 칠판을 바라본 채,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했다.
상대와 말을 할 때면 상대와 시선을 마주해야 한다.
지금 아멜리아의 행동은 예의에 한참 벗어난 행동으로 귀족의 소양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수업 진행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지난 한 달간 알게 되었다.
그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면 최소한 말을 더듬는 일이 없어진다고.
물론, 살짝 떨리는 목소리까지 진정시켜줄 순 없었다.
“보통 하나의 사건에 관하여 여러 가지 분석이 생겨나는 경우가 있겠죠. 숲 속의 아이라는 이야기를 알고 계시나요?”
“네,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하도 유명했던 일화였던 탓에 모를 수가 없었다.
용사들에 관한 서적들에서는 항상 빠짐없이 등장했으니.
“저도요.”
아리아가 대답했다.
산에서 내려온 몬스터들의 침공을 받고 있던 왕국을 구하기 위해 가던 중이었다.
5대 용사는 숲 속에서 실종된 아이를 찾아달라는 마을 사람들의 부탁받았고, 그 부탁을 무시한 채, 곧장 왕국으로 향했다.
결국 아이는 영원히 행방불명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 극적으로 등장한 용사 덕에 왕국은 구원받았다.
그 당시 용사 덕에 생존한 사람들의 숫자만 3만.
전쟁 전문가들은 용사가 단 1시간만 늦었어도 최소 1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을 거라 추정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론 적인 이야기.
“영웅학에서는 이 일이 잘못됐다고 한답니다. 자신의 손이 닿는 모든 것을 구한다. 그것이 영웅이 추구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용사학의 관점에서는 5대 용사의 선택이 옳은 선택이라고 하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용사로써 추구하는 목적. 아이를 구했더라면 훨씬 더 많은 왕국의 백성들이 죽었을 거란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을 테고요.”
“으음, 그렇군요.”
“아하.”
이제 슬슬 무슨 말인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무슨 느낌인지 이해하신 거 같네요. 만약 영웅 학과 관련된 문단 속에서 5대 용사의 이야기가 나온다면 ‘잘못된 선택’이 정답이 되겠죠. 용사학은 그 반대일 테고요.”
“확실히 이해가 됩니다. 역시 아멜리아 님이시군요.”
“아하하…, 벼, 별거 아니랍니다….”
강현의 칭찬에 몸을 살짝 꼬며 아멜리아가 대답했다.
그와 눈을 마주한 게 아니지만 그래도 기쁨의 감정을 숨길 순 없었다.
“그, 그럼 이제 영웅 학과 용사학은 여기까지 하고, 마나 학으로 넘어갈게요.”
“네.”
∴
“으음….”
아카데미의 필기시험은 총 8개의 과목이 존재한다.
용사 학과 영웅학.
역사.
사회.
정치.
교양.
수학.
인체학.
그리고 마나학.
마나 학은 마나의 량과 농도에 따른 결괏값을 도출해내는 학문으로 수학과 상당히 유사하다.
플레이어 스킬 덕에, 기억력에 한해선 그 누구보다 앞선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만큼 다른 암기과목들은 전부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마나 학은 영 쉽지 않았다.
현대에서도 고등학교를 문과로 졸업했으니.
그렇다고 해서 참담한 수준은 아니었다.
강현은 기본적으로 머리가 좋았다.
또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처음에는 심각할 수준이었으나,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되는데.’
하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이 상태로는 절대 100점을 맞을 수 없을 테니까.
지금까지 키워준 푸스탄트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최고의 결과를 내고 싶었다.
부모에게 자신이 얼마나 훌륭하게 자랐으며 노력했는지,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선 성적표 만한 것이 없었으니.
물론 그 늙은이는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더럽게 연락이 없어서 문제였지만.
그래도 강현은 계속 공부했다.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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