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입학 준비 (4)
* * *
아멜리아는 가만히 앉아있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제 아무리 공 작가의 차녀라고 해도, 아멜리아는 귀빈으로써 강현을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앞으로 몇 달간 머물 곳을 빌리기 위해 찾아온 것.
그런 자신이 머물 방을 강현이 혼자 청소해준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며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다.
아멜리아는 곧장 일어서 강현을 따라가려 했으나, 또 한 번 강현이 거절한 탓에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거절했음에도 계속 요구하는 것 또한 예의에 어긋난 행동.
‘강현 님….’
조금 미안하기도 했으나, 강현의 상냥함이 고마울 뿐이었다.
다른 이들이 했다면 그저 자신에게 잘 보이려 하는 행동에 불과하겠지만, 강현은 아니었다.
그저 친절하고 상냥한 성품에서 비롯된 행동.
‘그게 오직 저를 위한 것은 아니지만요….’
그 점이 아쉽긴 했으나, 강현의 멋진 점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그런데…, 이제 어떡해야 할까.
강현이 자리를 비우고 여인들 사이에서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레이와 아멜리아는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그럭저럭 친분을 쌓아왔다고는 하나, 모든 여인들이 서로서로 사이가 좋은 건 아니었다.
“다들 마지막에 뵙을 때보다 훨씬 아름다워지셨네요.”
아멜리아는 적당한 말로 대화를 시작했다.
“뭐…, 여자는 사랑받은 만큼 예뻐진다고 하잖아, 주인님 덕분이지 뭐.”
엘리스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강현에게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비단 아멜리아만을 향한 말은 아니었고.
“어머, 그럼 저도 강현 님께 사랑받고 있었던 걸까요. 라비도 그렇고.”
아리아는 서둘러 말했다.
여유를 가장하고 있었지만, 자신과 라비가 크게 뒤처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들은 이미 강현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자신들은 아직 듣지 못했으니.
그런 상황에서 기싸움조차 밀렸다가는 안 그래도 막막했던 앞날이 더욱 막막해질 뿐이었다.
예로부터 용사의 아내는 항상 성녀였다.
다른 여자들한테 정실의 자리를 빼앗기고 첩실이 될 생각은 추호도 없던 아리아였다.
“으, 응…? 아니.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라비는 자신이 강현을 좋아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랑 받든 말든 상관없다.
다정한 말도, 애정이 담긴 눈빛도….
“….”
아리아는 아군의 지원을 받지 못할 상황임을 깨달았다.
저 이강현이 문제다.
순수하고 항상 밝던 아리아를 망쳐놓은 원흉.
역시 인간을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하하…, 그런가요?”
역시 한 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는 여자들이다.
가문의 일로 바빠, 강현을 보지 못했던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럼 저도 더 열심히 해야겠네요. 이제 강현 씨와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 여유로운 콧대를 눌러주겠다.
또한 언제든지 당신들을 추월할 수 있다.
그런 의미가 담긴 도전장이자 도발이었다.
그 말에 의미를 눈치챈 여인들의 시선은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리 곱진 않았다.
“아무렴 어떤가요. 여러분들 모두 강현 씨에게 소중한 분들인데요.”
지금 이 순간.
레이는 그 누구보다,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웠다.
다들 아웅다웅 다투는 모습이 귀엽긴 한데…, 글쎄?
아직 강현 씨에게 안기지도 못한 여자들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방심하진 않았다.
강현에겐 다들 똑같을 뿐이다.
물론 나는 다르겠지만.
레이의 말에는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고 여인들의 시선이 이번엔 레이를 향했다.
“레이 님은 여유로워 보이시네요.”
아리아가 물었다.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하지만 경계심이 서린 눈동자는 차가웠다.
그저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진실된 여유로움이었다.
역시, 최고의 적으로써의 위엄은 여전했다.
강현에 대한 마음을 포기하지 않게 해 준 레이였지만 그래도 아멜리아에게 있어선 가장 위험한 적이기도 했다.
“그렇게 보이나요? 딱히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어쩔 수 없는 모양이네요.”
그저 순수한 생각으로 한 말이었다.
자신의 말이 여유로워 보인 거라면 오히려 당신들이 여유롭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냐.
다른 여인들에겐 레이의 말이 그렇게 들려왔다.
“….”
지금 끼어들면 안 되겠네.
순식간에 청소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오던 강현은 2층에서 조금 더 있기로 했다.
∴
아멜리아는 강현과 약속했었다.
다음에 만날 땐, 좋은 곳에서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그 약속을 들었을 때, 다른 여인들이 지은 표정은 최고였다.
항상 수많은 부러움의 눈길을 받아왔던 아멜리아였지만 그 시선은 어째서인지 더욱 각별했다.
“으음…, 내일은 어떠십니까?”
“네에, 좋아요.”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했던 게 2년 전.
이 데이트는 2년 전부터 기다려왔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강현은 오늘 막 페론으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오랜 이동으로 인한 피곤함을 풀 시간이 필요할 게 분명했고, 아멜리아는 이기적인 여자가 아니었다.
‘… 왜 기쁜 거지?’
그리고 아멜리아는 스스로가 이상했다.
원래라면 어쩔 수 없이 아쉬워해야 정상이다.
오래 기다려온 만큼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강현과 데이트를 나가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기뻤다.
특별취급받지 않아서 그런 걸까.
“그 대신 아멜리아 님만 괜찮으시다면 아침 일찍 나가는 건 어떻습니까. 저도 1년 만에 페론으로 돌아온 터라 도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 아침 일찍… 저녁 늦게…. 조, 좋아요!”
아멜리아는 양손을 불끈 쥐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조차 깨닫지 못한 채.
“기뻐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헤실헤실 풀린 아멜리아의 미소를 본 강현은 덩달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아멜리아의 머리 위에 얹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우우…, 가, 강현 님….”
갑작스러운 강현의 행동에 놀란 아멜리아는 청색의 눈동자를 위로 뜨며 말했다.
따듯하고 거칠지만 상냥한 손길에 마음이 더욱 따듯해지고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이게 머리를 쓰다듬어진다는 느낌이구나.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아멜리아는 생각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가 머리를 쓰다듬어준 적 없는데.
“좋으신 모양입니다. 앞으로는 자주 해드려야겠네요.”
좋아 보이는 아멜리아의 모습을 본 강현은 절로 미소를 뛰웠다.
옛날이었다면 공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짓 따윈 상상조차 못 했을 텐데.
아니, 이성의 머리를 쓰다듬는다는 것 자체를.
“그, 그거…. 강현 님 조, 조금 능글맞아지셨어….”
강현의 손이 떨어짐과 동시에 아쉬움을 느낀 아멜리아가 말했다.
능글맞다는 표현이 이럴 때 사용하는 게 맞는 건가 싶지만 달라진 강현의 모습을 표현하려니 그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싫진 않았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기 시작하여 호흡곤란 올 거 같은 걸 제외하면.
저 얼굴로 웃으면서 말하는 건 반칙이 아닌가.
“기분 탓입니다.”
아멜리아와 있으면 묘하게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 게 아닐까.
아니면 드디어 첫 경험을 가져서 그렇거나.
뭐든 아멜리아의 반응이 나빠 보이진 않았기에 상관없었고,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갈 테니 혹시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방은… 내일 가구점이라도 들려야겠네요.”
“아하하…, 필요한 게 있긴 해도…. 충분히 마음에 듭답니다…!”
어차피 누워서 잠만 자는 곳.
쓸데없이 크고 화려해봤자 아무런 소용없다.
아멜리아는 방에 관하여 항상 그렇게 생각해왔다.
“다행이군요…, 그럼.”
강현은 허리를 숙여 아멜리아에게 인사한 뒤, 1층으로 내려갔다.
방 배치가 제대로 끝났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강현이 원래 사용하던 방은, 레이가 사용하기로 했다.
‘집도 거의 다 찼네….’
강현의 집은 총 3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다.
지하, 1층, 2층.
각 층마다 방이 두 개씩 존재하고 있으며 지하는 아리아와 라비.
1층은 강현과 레이가 사용하기로 했다.
물론 원래 강현이었던 방을 제외하면 푸스탄트의 방.
아무리 그래도 레이를 푸스탄트가 사용했던 방에 제울 수는 없었기에, 강현의 방은 레이가 사용하기로 했고.
이제 남은 방은 아멜리아의 맞은편 방.
‘으음….’
이제 이렇게 다들 모여서 지내게 되었고, 20살이 된 만큼 엘리스와도 슬슬 각방을 사용하면 좋겠는데.
만약 레이와 추가적으로 성관계를 맺게 된다면 엘리스의 눈치도 크게 보일 테고.
유대감 수치가 문제이긴 했지만…, 키스로도 채울 수 있으니까.
일단 말이라도 꺼내볼까.
강현은 고민했지만 망설임을 떨쳐낼 수 없었다.
강현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엘리스와 6년 넘게 한침대에서 잠들어 왔고, 그거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건지 침대에 혼자 누웠을 때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혼자 보내는 밤이 외롭다는 웃기지도 않는 이유였다.
‘그래도….’
앞으로의 생활을 위해서라면 각방을 사용하는 게 맞겠지.
고민을 마친 강현은 엘리스가 있을 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인님, 오셨어요?”
평소 즐겨 입던 평범한 일상복을 입은 엘리스가 책상에 앉아있었다.
“엘리스, 할 말이 있는데 괜찮을까?.”
“아, 마침 저도 있었는데. 당연히 괜찮죠. 먼저 말하세요.”
“그…, 슬슬 각방을 쓰는 게 어떨까 싶어서. 앞으로의 생활을 위해서라도. 마침 2층에 마지막으로 남은 방이 이미 청소해뒀거든.”
“좋아요.”
엘리스를 설득하기 위해 긴장하던 중,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진심이야?”
“네, 저도 마침 그 말하려 했거든요. 매일 다른 애들한테 눈치 보이기도 하고. 앞으로 생활을 위해서라도 그러는 편이 나을 거 같아서요. 많이 아쉽긴 하지만….”
“…, 네가 아쉬우면 그냥 이대로 지내도 괜찮아.”
“괜찮아요, 원래 이러는 게 정상이잖아요?”
원래 이러는 게 정상이다.
엘리스의 말대로였다.
일부다처, 일처다부의 이 세계에서 여러 명의 반려자를 둔 사람은 침실을 반드시 혼자 사용한다.
결혼생활에서 밤 생활은 엄청나게 중요하다.
현대에서나 이 세계에서나.
“매일 밤마다 다른 애들 방으로 가는 걸 볼 것도 아니고.”
여러 명의 반려자를 둔 만큼, 다른 반려자의 방으로 가거나, 자신의 침실로 불려야 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엘리스는 그럴 때마다 아무런 내색조차 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주인님이 그런 것도 안 하니까 지금까지 고집부려온 건데…. 이제 20살도 되셨으니까요.”
고집이라.
맞는 말이다.
그녀와 처음 만나고 대략 반년 정도는 계속 같이 자야만 되겠다고 고집부려 왔으니.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강현도 아무 말하지 않고 엘리스와의 동침을 받아들여왔다.
그렇기에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어폐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알겠어. 그럼 짐 옮기는 거나 도와줄까?”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렸다.
하지만 강현은 솔직히 마냥 기뻐할 수는 없었다.
아쉬움.
그리고 앞으로 제대로 잘 수 있을 지에 관한 걱정 때문에.
그래도 이렇게 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도와주시면 저야 좋죠. 아, 맞다. 아멜리아랑 데이트는 언제 나가기로 했어요?”
“응? 내일 나가기로 했는데?”
“…. 아니다. 오늘까지만 같이 자요.”
엘리스는 대답을 듣자마자 말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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