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입학 준비 (3)
* * *
황성을 기준으로 동서남북으로 나뉜 제국의 영토들.
각 방향마다, 그 지역을 지배하는 공작가들이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루이스플 공작가.
비옥한 영토와 중요한 교류적 요충지인 북부를 다스리고 있다.
북부의 실질적인 지배자, 루이스플 공작가의 차녀이자. 공작위 계승 서열 1등에 빛나는 엄청난 차기 권력자.
“오랜만에 뵈니 기쁘군요. 보고 싶었습니다 아멜리아 님.”
“헤헤…. 죄송해요, 일이 바빠서. 저도 너무 보고 싶었어요오…. 매일 밤마다 마음속으로 강현 님을 그렸답니다….”
냉철한 전략가.
괴물 같은 투자가.
강인한 정치가.
재국 최고의 천재이자 수많은 귀족가 자제들이 원하는 1등 신붓감.
그게 아멜리아 루이스플 이었다.
물론 강현 앞에서는 평소와 크게 달라진다는 문제를 지니고 있었지만.
“아멜리아는 여전하네.”
짐을 정리한 뒤, 식탁에 모여 홍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던 중, 턱을 괸 채로 아멜리아를 바라본 엘리스가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공녀한테 반말을 사용하는 엘리스의 모습을 보고 졸도하겠으나, 엘리스는 푸스탄트한테도 반말을 사용했다.
절대 예의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다.
처음에는 엘리스도 존댓말을 사용했으나, 상대 쪽에서 먼저 편하게 말하라 한 것이었다.
신격을 얻음으로써 검의 신이 된 엘리스.
물론 그 영혼의 파편일 뿐이었지만, 깊은 심해에 봉인되어 있는 시간은 페론티아 제국의 역사보다 길다.
“그러게요…. 어서 고쳐야 할 텐데.”
아멜리아는 자신의 볼을 긁적이며 멋쩍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차분하고 침착하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자신이 지닌 최대의 무기였는데, 강현의 앞에만 서면 그 무기들이 무력화되는 게 아니겠는가.
심지어 오랜만에 만난 탓에 더 심해져 버렸다.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쳐버릴 정도로.
강현이 불쾌해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귀엽게 바라보는 건 조금 슬프면서도 기뻤지만.
아멜리아는 귀여운 여성상보다 멋지고 당당한 여성상을 지향했으니 말이다.
“뭐 어떻습니까. 지금 그 모습도 아멜리아 님의 일부이신데, 꼭 고쳐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맞아, 네가 그럴 때마다 우리 주인님이 사족을 못쓰는데.”
“으, 으읏…. 그런 말씀 하시면 부끄럽답니다 아….”
화악, 붉어진 양 볼은 손바닥으로 덮은 아멜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가.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때 묻지 않고 순수한 모습은 아멜리아가 어떻게 생각하든 강현에게 있어선 아멜리아의 강력한 매력일 뿐이었다.
“… 그런가요?”
“물론이죠. 귀여우셔서 저는 좋습니다.”
강현은 웃으며 대답하자. 몰려오는 행복에 아멜리아는 부끄러움도 잃고 함박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이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든 아멜리아는 곧장 고개를 숙여 헤실거리는 입꼬리를 진정시켰다.
“그런데 공녀님,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강현과 아멜리아 사이의 분위기가 급격한 속도로 좋아지고 있음을 눈치챈 레이가 말했다.
대화를 진행시키고, 둘 사이 분위기의 흐름을 끊기 위한 수였다.
“아, 강현 님께서 페론으로 돌아오실 거란 연락을 주셔서 찾아왔습니다. 그…, 보, 보고 싶어서요….”
“아멜리아 님….”
공작가의 차녀.
아멜리아는 엄청나게 바쁜 사람이다.
공작가의 내부, 외부 일을 해치우며 사람들을 만나 일을 성사시키기도 한다.
마법을 수련하기도 하며, 사교계에 참석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정치 세력을 쌓아 올리기도 하고.
그 외에도 강현이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업무들이 존재했다.
그런데 보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페론까지 찾아와 주다니.
아멜리아에게 호감을 품은 남자로서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긴 있답니다….”
감동이 담긴 강현의 눈빛이 자신을 향하는 것을 본 아멜리아가 다급하게 말했다.
“무슨… 이유예요?”
이번에는 아리아가 물었다.
“그, 강현 님. 혹시… 아카데미 입학 준비를 함께할 수 있을까요?”
“아카데미…, 입학 준비 말입니까?”
“네, 제가 여러 일들로 인해 바빴던 터라, 지금까지 입학시험 준비에 소홀했었거든요….”
당연히 거짓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멜리아다.
필기시험?
지금 당장 응시하더라도 만점 받을 자신이 있다.
또한 이제 막 20살이 되었음에도 벌써 5 위계, 정식 마법사의 경지를 바라보고 있는 아멜리아다.
분명 수석…, 아니 강현이 있으니 차석으로 입학할 수 있겠지.
본심은 따로 있었다.
강현과 함께 있고 싶다는 것.
지금까지 가문의 일로 바빴던 탓에 강현을 자주 보러 올 수조차 없었다.
그런 만큼 다른 여인들과의 격차는 점점 벌어졌을 터.
여기서 더 이상 도태될 순 없었다.
하지만 본심을 차마 말할 수는 없었다.
상대에게 모든 마음을 쉽게 내어주면 질려버릴 수도 있으니까.
“아, 아버님도 승낙해주셨답니다.”
물론 입학시험에 관한 건 아니었다.
푸스탄트의 학생이었던 브라함 루이스플은 아멜리아의 사윗감들 중, 강현을 1순위로 점지해둔 상태였다.
소드마스터이자, 대마법사의 경지를 바라보고 있는 6 위계의 정식 마법사.
약제학 명장으로써 의약 성인이라 칭송받는 강현만큼 최고의 사윗감은 없었으니.
물론 작위가 없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지만, 강현에게 있어서 작위는 그저 장식품에 불과하다.
황제와 황녀에게 은혜를 입히고, 육각 성의 장로들 중 하나인 록스 라우티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 중인 강현이니까.
“그렇… 습니까.”
강현은 아멜리아의 본심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렴풋이 눈치챘다.
마치 무언가를 들키지 않길 바라며 불안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그렇기에 잠시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다.
‘남는 방이….’
자신의 집에 남는 방이 있는지.
그리고 공작가의 차녀의 품위에 맞추어줄 수 있는 방인지.
일단 2층에 남는 방이 있긴 하다.
그리 작지도, 크지도 않은 평범한 방.
하지만 아멜리아에게 어울리는 방이라고 보기엔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함께 생활하실 거란 말씀이시죠?”
“일단 여관방을 잡아두긴 했답니다. 하지만…, 가능하다면 같이….”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땅굴을 파고 지하로 내려가고 있는 게 아닐까.
중간부터는 아예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순 있었다.
“생활비도 당연히 있답니다…!”
그리고 뭔가 퍼뜩 떠오른 듯, 아멜리아가 급히 말했다.
그냥 공짜로 묵게 해 달라기엔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나를 누구도 아닌 아멜리이다.
개인적은 친분을 차치하더라도, 그녀의 가문인 루이스플 공작가는 강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거래처였고.
“음, 확실히 여관보다는 저희 집에서 생활하시게 해드리고 싶습니다만….”
“다만…?”
“아멜리아 님께 어울리는 방일지가 걱정입니다.”
“그, 그건 괜찮아요…! 강현 님과 한 지붕 밑에서 있을 수만 있다면….”
강현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던 아멜리아는 천천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 그렇습니까….”
아멜리아의 귀여운 소망에 강현을 얼굴을 붉혔다.
“….”
아리아와 라비는 웃기게도 아멜리아가 연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의심이 들었다.
저렇게 부끄러워하고 있으면서 대담한 말을 어찌 저리 잘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아멜리아와 만난 적이 한 손에 꼽을 정도였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의심보다는 감탄이 훨씬 컸다.
말 한마디로 강현의 마음을 휘어잡는 능력은 최소 레이와 동급, 어쩌면 그 이상이었으니.
‘한 수 배웠네요….’
‘여자만 있으면 헤실헤실해져 가지고는.’
“그렇다면 2층에 방이 있습니다. 그런데… 히엘님은 어디 계십니까?”
어딘가 조금 이상한 기사 히엘.
소드마스터이자 아멜리아의 호위 기사였기에 그녀를 찾았다.
“잠시 공작령에 볼일이 있어서 공작령으로 향했답니다.”
“으음…, 그러면 히엘님께서 사용하실 방도 필요하시겠군요.”
강현은 당연히 히엘이 볼일이 끝나면 다시 돌아올 거라 생각해, 말을 이었다.
“아, 아뇨….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진 안 돌아올 거예요.”
“… 네? 호위 기사 아녔습니까?”
“그, 그게 사정이 있어서….”
물론 사정 같은 건 없다.
아멜리아는 히엘에게 진심으로 미안했지만 그녀를 떨어뜨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강현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브라함에게 들킨 것도 그녀 때문이었으니.
앞으로 강현과 한 지붕 밑에서 생활하다 보면… 그렇고 그런 일도 있을 텐데.
히엘을 떨어뜨려 놓을 필요가 없었다.
휴가와 함께 휴가비를 챙겨주니 기뻐하며 휴가를 즐기러 갔으니 괜찮을 거다.
“그렇군요, 혹시 좀 심각한 일입니까? 그렇다면 제가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아뇨! 괜찮아요. 가문 내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랍니다….”
속여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드디어 20살이 되었잖아요.
아멜리아는 마음속으로 작게 사과했다.
“그럼 알겠습니다. 2층 방 청소부터 시작해야겠군요.”
“네, 네…! 도와드릴까요?”
“아뇨, 저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인벤토리와 클린이 있기에 청소쯤이야, 강현에게 있어선 식은 죽 먹기였다.
그리고 공작가에서 찾아온 손님한테 청소를 시키다니.
사회적 시선도 문제다.
물론 들킬 일은 없겠지만.
“지금까지 미뤄왔던 이야기라도 잠시 나누시면서 기다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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