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입학 준비 (2)
* * *
“레이, 잠깐 따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페론으로 향하는 길.
잠시 밤을 보내기 위해 중간에 위치한 한 남작령의 마을에서 잠시 멈춰 서고, 여관을 구한 뒤 레이의 방으로 찾아온 엘리스가 물었다.
“… 네, 당연하죠.”
올 것이 왔다.
레이는 깨달았기에 잠시 긴장했다.
분명 강현과 관계를 맺은 것과 관련된 얘기를 하러 온 것이겠지.
“그게….”
하지만 레이의 예상과는 달리 엘리스는 뭔가 말을 꺼내기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살짝 불안함이 들 무렵,
“우리 아직 서로 잘 모른다. 그렇지?”
오늘따라 어색해 보이는 미소를 지은 엘리스가 물어왔다.
엘리스는 생각했다.
지금까지 레이를 그저 강현을 노리는 적들 중 하나로 대했다.
경쟁상대니까.
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한 가족이 될 사람이다.
그런 만큼, 레이에 대해서 알고 싶어 졌다.
도대체 무슨 기억이 레이를 괴롭게 했던 거고, 그녀의 과거가 어떠하였는지.
“아니, 나만 모르고 있는 걸지도.”
기싸움, 또는 말싸움이 벌어질 거라 예상하고 준비했던 레이는 잠시 당황했다.
관계를 맺은 날 아침, 강현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결국 너나 나나 누가 정실이 될진 몰라도 언젠가 주인님의 가족이 될 거잖아. 그래서 너에 대해서 알고 싶어.”
“… 그런가요.”
절대, 죽었다 깨어나도 정실의 자리를 다른 여자에게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엘리스도 마찬가지일 거란 사실을 레이가 모를 리 없었다.
또한 레이가 아무리 굳게 다짐하더라도 결국 경정하는 건 강현이고.
엘리스가 지금 싸우자고 찾아온 것도 아니니, 괜한 견제를 할 필요는 없겠지.
그리고, 가끔씩 강현을 두고 기싸움이 벌어져서 그렇지, 엘리스와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검술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 만큼, 꽤 친하다고 볼 수 있겠지.
“좋아요, 홍차라도 타 드릴 까요?”
“그거, 주인님이 만든 홍차잎이야?”
“물론이죠.”
∴
엘리스는 레이에게 그녀의 과거에 관해서 물었다.
강현이 회귀자인 만큼 레이와 만나 지금까지 이런 관계를 구축한 걸로 봐선 무언가 특별한 이유가 분명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솔직히, 그 이유와 과거 기억에 관한 혼란.
아주 낮은 확률이겠지만 어이가 없을 정도의 이유로 그런 약속을 맺은 거라면 솔직히, 강현에게 한번 정도는 화를 낼 생각이었다.
“… 거짓말 아니지?”
“차라리 거짓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제가 왜 이런 질 나쁜 거짓말을 하겠어요.”
하지만 레이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아니, 두 귀를 의심했다.
강현과 제일 가까운 여자인 레이가. 푸스탄트를 죽인 사람이라니.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강현과 맺은 약속과 받은 용서에 대해 듣고, 잊고 있던 기억에 관해서 들었을 땐 경악할 정도였다.
“그, 그러니까…, 네가 전생에서 나쁜 짓 하고 다니고, 푸스탄트를 죽인 게 전부 조종당한 거라고…?”
“…, 그럴 가능성이 크겠지만 제 죄가 사라진 건 아니에요.”
“아니, 조종당한 거면 네 잘못이 아니잖아. 네 의지로 한 일이 아닌데.”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잖아요.”
레이는 괴로운 표정을 지은 채 대답했다.
혹시 모른다.
정말 어려운 말이다.
누가 봐도 정황상 조종당했다는 것이 명백한 사실이지만 정확한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니까.
“…, 이러면 내가 뭐라 못하잖아.”
최소한 치사한 거 아니냐고 한마디라도 할까 고민했었는데.
치사하기는커녕, 오히려 강현 보고 잘했다고 칭찬해줘야 할 노릇이었다.
그리고, 이런 내용도 모르고 강현을 열심히 유혹했던 자신의 행동이 후회되기까지 할 정도.
“많이 힘들었지?”
그만큼 레이의 과거는 어두웠다.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끔찍했다.
언제나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아름답게 미소 짔던 레이의 뒤편은.
“괜찮아요, 제게는 강현 씨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간절함의 농도부터가 엄청나게 차이 났다.
전생에서부터 강현을 만나고 지금까지 살아온 레이는 오로지 강현이다.
강현이 삶의 이유이자 목적이며 유일한 버팀목이다.
당장 강현이 사라진다면 죽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레이의 행동과 생각 전부, 강현이라는 근본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어 오고 있단 사실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요한이랑 메르시도 있고요. 계속 제 자리를 노리셔서 그렇지만, 공녀님과 엘리스 님도 좋으신 분들이시고요.”
레이는 두 눈을 감은 채,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 따듯함을 느껴졌다.
“걱정해주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지금의 저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까요.”
그저 슬픈 표정을 지은 엘리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할 뿐인 말은 아니다.
진심이다.
레이는 지금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
강현이라는 커다란 행운을 만났고,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이어진 요한과 메르시라는 부모가 생겼다.
아멜리아, 엘리스, 아리아, 라비.
하나같이 아름답고 강현에게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조금 위험하긴 했지만, 믿을 수 있는 친구이자 든든한 동료들이 있었으니.
그리고, 간절히 원하던 강현의 정을 가장 깊은 곳으로 받아냈다.
그것도 배란일.
임신할 확률이 가장 높을 때에.
너무 행복해서 죽어버릴 지경이었다.
“… 그렇다면 다행이네. 나도 왜 이걸 이제 알았데….”
엘리스는 미안한 기분을 덜어낼 수 없었다.
멀리 떨어져 지냈다고는 하나, 알고 지낸 것이 몇 년인데.
“저도 살짝 놀랐어요. 당연히 강현 씨가 말하셨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우리 주인님 알잖아. 자기 입으로 남의 중요한 얘기 절대 안 하는 거.”
“후후…, 그렇죠.”
레이는 작게 웃으며 답했다.
어딘가 고지식한 사람이라니까.
침대 위에서는 그렇게 야성적이었던 사람이.
“뭐…, 알겠어. 알려줘서 고마워.”
“제가 더 고맙죠, 들어주시고 걱정해주셨는데.”
처음 했던 걱정과는 달리, 훈훈한 분위기로 끝나 레이와 엘리스는 안심했다.
∴
페론티아 제국의 수도이자, 황성 앞 도시.
수도, 페론에 도착했다.
“여기는 여전히 똑같네.”
검문소를 지키는 경비병.
성문 옆에 위치한 제과점.
그 옆에 위치한 고급 양복점에서부터 가로등과 높은 시계탑.
깨끗한 바닥과 활기찬 분위기.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향수가 느껴져 왔다.
할아버지 보고 싶네. 강현은 생각했다.
‘이 영감탱이는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길래 또 연락이 없다냐.’
“짐은 다 꺼냈지?”
뭐 사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다.
여인들의 짐은 강현이 인벤토리에 챙겨뒀으니까.
그저 중요한, 또는 강현에게 들켜선 안 되는 중요한 물품들만 작은 가죽 가장에 챙겨둔 상태였다.
“네… 응?”
레이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강현의 어깨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갑자기 뭘 보는 거지.
강현은 뒤로 돌아봤고.
“아, 아, 안녕하세요 오….”
얼굴을 붉히고 허벅지 사이로 모은 양손을 꼼지락 거리던 아멜리아가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귀여운 모습에 절로 반가움이 들었다.
강현은 몇 년이 지나도 한결같은 모습이 참 순수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아멜리아 님.”
강현이 아멜리아에게 다가가며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아멜리라는 어째서인지 오른발을 뒤로 빼 살짝 물러섰다.
‘뭐지, 안 본 사이에 거리 유지해야 되는 이유라도 생긴 건가…?’
살짝, 아니.
어쩌면 좀 많이 충격 먹은 강현은 아멜리아를 바라봤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니…, 그게….”
아멜리아는 입을 우물거리다가, 시선을 올려 강현의 눈을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다시 얼굴을 붉힌 아멜리아가 자신 고개를 숙여 강현의 시선을 피했다.
“마음의 준비가….”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 말입니까?”
강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
하지만 아멜리아의 모습은 그냥 평소처럼 부끄러워하고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조금 더 심해져서 그렇지.
“그 오, 오랜만에 봐서…, 너무 빨리 다가오시면 안 돼요오….”
“….”
강현은 고개를 돌려 다른 여인들을 바라봤다.
자신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기 위해서.
레이는 그저 귀엽게 아멜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스는 황당한 듯,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있었고.
아리아는 아멜리아의 등장이 그다지 반갑지 않은 듯, 눈빛에 경계심이 서려있었다.
라비는 작게 감탄했다.
“저희 사이인데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십니까.”
강현은 아멜리아에게 다가갔다.
아멜리아는 발을 움직이려 하다가도 힘을 꽉 주고 버텼다.
“작년보다 훨씬 아름다워지셨습니다.”
그리고 아멜리아의 오른손을 받혀 올렸다.
고래를 살짝 숙여 아멜리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원래는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야 하지만, 아멜리아가 이제는 이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던 것이었다.
“다, 다행이네요…, 강현 님께 잘 보이고 싶어서… 헤헤….”
부끄러워하면서도 할 말을 다 한다.
역시 귀엽다.
“일단 가시죠. 저희가 방금 막 페론으로 돌아온 터라, 집에 들려야 합니다.”
“네, 네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