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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겜 속 중간보스와 히로인들이 내게 집착함-93화 (93/148)

〈 93화 〉 양가감정 (2)

* * *

“레이랑 약속했었어. 20살이 될 때까지 다른 여자랑 성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 설마 설마 했는데.”

엘리스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괴로워하는 모습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너도 기억하지? 할배랑 처음 만났던 레이가 정신을 잃고 조종당했던 기억을 떠올렸을 때.”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진다.

“난… 레이를 사랑하는 만큼, 그녀가 쓰러지지 않고 버티게 해 줄 버팀목을 만들어주고 싶었어.

레이의 과거에 대해서 내가 말해줄 수 없어도, 레이는 과거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더 끔찍한 기억을 떠올려버렸으니까.”

누군가에게 조종당한 정황이 엿보이는 아주 단편적인 기억.

전생의 기억과 자신에 대한 의심으로 괴로워했던 레이.

그런 레이를 위해선 그 정도 약속쯤은 얼마든지 해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할아버지의 제자가 아닌 나 자신으로서의 것을 쌓아둘 때까지 누군가랑 관계를 맺을 생각도 없었고. 누군가를 책임지기 위해서.”

“그럼 왜 지금까지 말해주시지 않았어요.”

서운하다는 듯이.

슬픈 표정을 엘리스는 짓고 있다.

“그건…. 어쩔 수가 없잖아요….”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자신은 강현에게 안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다.

하지만 절대 극복할 수 없는 벽이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물론 엘리스는 레이의 과거를 잘 모르기에, 그녀를 나무랄 수는 없겠지.

그리고 바보 같아졌다.

“왜 말해주지 않았어요?”

넘지 못할 벽을 아등바등 오르려 했던 자신이.

그렇기에 강현에게 조금, 화가 나 버렸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기에 엘리스는 어떡해야 할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그건….”

왜 말해주지 않았던가.

엘리스가 상처받지 않았으면 했다.

자신을 대하는 엘리스의 마음과 행동을 잘 알고 있었던 만큼, 힘들어했을 게 뻔히 보였었으니까.

“네가 상처받을까 봐. 그리고 … 너를 잃을까 봐.”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는 불안감이 존재하고 있었다.

“제가 그런 것도 이해하지 못할 속 좁은 여자로 보이셨나요?”

서운했다.

자신을 신뢰해주지 않은 강현에게.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엘리스는 신뢰받지 못한 자신에게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장난스럽고 가벼운 성격이어서 그런 걸까.

“당연히 아니지.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어. 누구보다 마음이 깊다는 것도.”

“그럼… 왜.”

“… 불안하기도 했어. 네가 나를 떠날까 봐.”

“하…, 제가 그 정도로 주인님을 떠난다고요? 전 진짜 주인님을 사랑하는데, 제 사랑이 겨우 그 정도로 보이셨어요?”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데 할배도 그랬어. 평생 내 옆에 있을 줄 알았던 할배가, 죽었거든.”

“….”

엘리스는 전생에서 푸스탄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강현과 푸스탄 트는 전생과 관련된 이야기를 최대한 엘리스에게 숨겼지만, 푸스탄트의 죽음만큼은 알고 있었다.

“나도 알아.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행동이란 거. 나를 사랑해주는 너에 대한 예의도 아녔겠지. 근데, 소중한 사람을 잃기 싫었어. 레이가 무너지는 것도, 네가 실망하는 것도.”

그래, 이게 어쩌면 본심이겠지.

강현은 생각했다.

“화내고 싶으면 내도 돼, 뺨이라도 한 대 때려줘도 괜찮아.”

정해진 수순이었다.

엘리스에게 약속을 숨긴 그 순간부터.

그리고 이 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지 않았을까.

강현은 생각했다.

“… 하아.”

엘리스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제가 때리긴 뭘 때려요. 그냥 조금 서운할 뿐인데.”

강현은 항상 완벽한 모습을 보여줬다.

사냥하고 책임감 강한.

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는 책임감.

그런 강현에게 단 한 번도 서운했던 적이 없었기에, 엘리스는 지금의 감정을 뭐라 설명할 수 없었다.

솔직히 첫 번째 관계를 빼앗긴 건 아쉬웠으나,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다.

강현은 레이나, 엘리스나 똑같이 사랑한다고 했었으니.

“엘리스….”

“괜찮아요. 순서가 조금 뒤로 밀어졌다고 죽을 일도 아닌데 뭐…, 조금 놀라긴 했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했고요. 괜찮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요. 누가 보면 내가 잘못한 줄 았겠어요?”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강현을 도저히 볼 수가 없었던 엘리스가 말했다.

강현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긴 했으나, 엘리스는 자신을 속여가면서까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정말 괜찮은 거야?”

“당연하죠. 사람마다 누구나 비밀은 가지고 있는 건데. 고작 비밀 하나 숨겼다고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저도 주인님한테 비밀 많아요.”

어깨를 으쓱이며 작게 웃은 엘리스가 말했다.

말투부터 표정까지.

어딘가 개운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 무슨 비밀?”

“안 알려줄 건데요?”

입었던 속옷을 슬쩍했다던가.

씻을 때 몰래 훔쳐봤다던가.

엘리스는 평생 강현에게 알려주지 않기로 했다.

작은 복수였으니까.

“주인님이 사랑해주는 걸로 괜찮아요.”

처음부터 여러 명의 여인을 받아들인 강현이었다.

엘리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강현을 사랑한 거고.

다른 여자와 먼저 관계를 맺었다고 뭐라 할 거면 애초부터 강현을 좋아해선 안됐다.

그냥 순서를 뺏겨서 조금 아쉽지만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조금 서운한 건, 뭐….

원래 더 사랑이 아쉬운 쪽이 손해 보는 싸움이 아닌가.

“… 다행이네. 고마워.”

“네, 그리고 이젠 저도 제대로 시작할 수 있는 거니까.”

엘리스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늘씬한 다리를 고혹적으로 꼬며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무슨 시작?”

“뭐긴요. 이제 레이랑 했으니까 저랑도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아…, 그건….”

뭐라고 해야 할까.

어감이 이상하긴 했으나 맞는 말이었다.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페론으로 돌아가서 봐요. 주인님.”

엘리스는 잘 넘겼다.

이럴 거면 그냥 처음부터 약속에 관해서 말해줄 걸 그랬다, 강현은 후회했다.

겁쟁이 같았던 자신을.

그리고 엘리스가 만만치 않은 여성임을 또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페론으로 돌아가서 보 자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강현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기대하고 있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참아왔지만 엘리스와의 관계를 원하고 있었으니.

강현도 결국 남자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미녀의 유혹에서부터 멀쩡하기란 불가능했다.

강현은 엘리스와의 대화가 끝나고 잠시 키스타임을 갖은 뒤, 페론으로 돌아가기 위한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레이와 새벽 내내 관계를 맺고 돌아오자마자 엘리스의 키스를 하다니.

이제 막 동정을 뗀 강현에게는 너무나도 문란한 생활로 느껴졌다.

“어디 보자….”

하지만 이제는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여러 명의 여인들을 연인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옛날에 결정했으니까.

짐 챙기기에 집중했다.

인벤토리에 돈과 약초, 도구들, 옷.

기타 등등을 챙겨 넣었다.

1년간 생활하며 크고 작은 정들 과 추억이 쌓아왔던 세이브 리스 길드인 만큼 아쉬움을 감출 순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짐 정리가 끝났다.

애초에 대부분의 물건들을 인벤토리에 넣어놓고 다녔던 강현인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강현은 곧장 수면을 취했다.

마차의 출발시간까지 7시간 정도 남았으니, 6시간 정도 수면을 취한 다음에 남은 시간 동안 몸을 씻으면 되리라.

그리고 자기 전, 엘리스에게 한 말을 들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리아와 라비는 나와 레이가 외박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흑, 흐윽…, 레이야. 꼭 편지해야 돼? 자주 찾아오고?”

메르시는 분홍색 손수건으로 자신의 눈물을 훔치며 레이에게 말했다.

메르시에게 있어선 레이는 딸과 같은 존재.

이별의 순간이 마땅 기쁠 순 없었다.

“네, 걱정 말아요. 메르시랑 요한도 잘 지내고요.”

레이가 답했다.

레이뿐만이 아니라 강현과 아리아, 라비도 세이브 리스 모험가 길드에서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과 이별인사를 나누었고.

대략 30분 정도 지났을까.

마차의 출발 시간이 10분 전으로 다가왔다.

“강현.”

“예, 요한 님.”

“… 우리 레이 잘 부탁한다. 너라면 분명 레이를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믿고 있어.”

신뢰가 담긴 눈빛으로 강현을 바라본 요한이 평소와는 달리, 사뭇 진지한 모습으로 말했다.

“예, 신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강현은 살짝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아카데미에 입학할 거라고 했지?”

“예, 다음 달에 시험을 치른 뒤, 3월에 입학할 예정입니다.”

“응, 그래. 거기 검술 교관들 중에 마틴이라는 놈이 하나 있을 거야. 나랑 친한 놈이니까 내가 잘 좀 봐달라고 할게.”

역시 사회는 인맥빨이라고 하던가.

이렇게 예상치 못한 덕택을 볼 줄은 몰랐다.

“예, 알겠습니다. 필요하신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요한 님이라면 무료드릴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요한은 강현의 정력제의 단골이었다.

“흐흐, 그래. 장인어른이라고 불릴 날을 기다리고 있으마.”

“예.”

“… 요한도 참.”

레이는 얼굴을 붉혔다.

“요한, 지금까지 정말로 고마웠어요. 요한 덕분에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그리고 레이가 말했다.

애정과 고마움, 믿음과 의지.

여러 개의 감정이 섞인 레이의 표정을 복잡했지만 밝은 표정이란 것만은 확실했다.

“레이. 아니, 내 딸. 사랑한다. 멋지게 자라줘서 내가 더 고맙구나.”

“… 응, 아빠.”

레이의 눈가에 물기가 서렸지만 레이는 아름답고 밝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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