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첫날밤 (1)
* * *
“저기 돌 보이시죠?”
강현은 옆에 선 벨라에게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강현이 가리킨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그 끝에는 붉은색의 과일이 주렁주렁 달린 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다.
“저 사과나무 말씀이시죠?”
“네, 저기를 기준으로 오른쪽 대각선으로 가면 큰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그 근처에서 5마리의 오크가 서성이고 있죠.”
토견이 구해다준 정보를 벨라에게 알려주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본대에서 떨어져 나온 무리부터 천천히 처리하면서 가잔 말씀이시군요.”
“네, 맞습니다.”
벨라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하얀 허벅지를 두 차례 툭툭, 두드렸다.
감탄의 의미로 기억하고 있었다.
“대단하시네요.”
“네? 그리 대단한 판단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적의 세력은 사전에 줄여둘 수 있는 만큼 줄여두는 게 편하다.
누구나 알 만한 사실 아닌가.
그런 만큼, 강현은 벨라의 감탄이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마법 말하는 겁니다.”
“아, 그렇군요.”
“이만한 마법을 그렇게 많이 사용하셨는데도 지친 기색 하나 없으시다니. 저 또한 마법을 수련하는 몸인 만큼, 존경하게 됩니다.”
벨라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부터 무표정하고 말투도 일정한 그녀다.
하지만 강현은 자신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벨라의 눈빛으로 인해 진심 어린 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강현은 그저 적당히 겸손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 누구보다 노력하는 벨라는 재능이 없는 탓에 마법적 성장이 거의 없다.
그런 만큼,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벨레에게 여기서 별거 아니라거나, 당시도 할 수 있다와 같은 말을 하는 건 오히려 역효과다.
강현의 대답을 들은 벨라는 뒤따라오고 있던 기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강현이 말한 오크를 사냥하겠다고 말한 뒤, 5마리의 오크와 발견했다.
2마리의 오크는 나란히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3마리의 오크는 나무를 주먹으로 내리치고 있었다.
목자재가 필요한 걸까.
“준비.”
아직 오크들이 우릴 발견하지 못한 틈을 타, 벨라가 지시를 내렸다.
그의 지시에 마법을 사용하는 기사들이 각자의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강현 또한 마찬가지.
숲의 훼손을 최대한 막아야 하는 만큼, 사전에 신중하게 속성을 고를 필요하 있었다.
[6 위계 수속성 마법, 워터 캐논을 사용했습니다.][× 5]
강현의 주위로 5개의 푸른색 마법진이 형성되었다.
마법진을 타고 흐른 강현의 마나는 액체로 변환되어 거대한 5개의 구체를 형성했고, 5마리에 오크에게 한 발씩 발사되었다.
수우웅, 쾅.
최악.
“부히익!!”
오크들은 워터캐논을 정통으로 맞았다.
두 마리의 오크가 팔을 잃고, 한 마리의 오크는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었다.
또 한 마리의 오크는 머리가 그대로 터져 즉사했으며 나머지 한 마리의 오크는 다리를 잃고 그대로 쓰러지며 울부짖었다.
“무슨…!”
“벌써 마법을 시전 한다고?”
강현의 마법을 본 기사들은 경악했다.
다른 기사들은 더욱 낮은 위계의 마법임에도 아직 준비 중일 뿐이었다.
그것도 모라자 무려 6 위계의 마법을 5개나 동시에 사용했음에도 불과하고 지친 기색 하나 없이 평온할 뿐.
엄청난 실력을 지닌 마법사라는 소문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순간이었다.
벨라 또한 마찬가지.
안 그래도 커다란 눈이 더 커질 수도 있구나.
강현은 생각했다.
물론 그들의 반응은 강현에게 있어선 질리도록 봐온 만큼 익숙했던 것이었다.
처음에도 조금 부끄러웠지만 이제는 아무렇지 않았고.
“오크들이 와요.”
팔을 잃은 오크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다른 기사들의 마법도 준비가 끝났고, 다른 이들이 나서기도 전에 오크들은 전부 마석을 남긴 채 재가 되었다.
∴
사냥한 오크의 숫자.
57마리.
기존에 파악해둔 숫자보다 7마리 더 많았으나, 이 정도면 충분히 오차범위 이내였다.
그리고 토벌대는 어떠한가.
단 한 명의 기사도 작은 상처 하나 생기지 않았다.
오크들의 사이에서 붉은 검기를 일렁이며 춤추는 레이는 오크들에게 있어서 악몽이 아니었을까.
또한 기사들 한 명 한 명의 실력이 매우 출중하기도 했고.
오크 토벌은 4시간도 걸리지 않았으며 당일날 자작성으로 돌아간 강현은 칸트 루스 자작과 거래를 성사시켰다.
의뢰와 소기의 목적도 달성했겠다.
강현과 여인들은 곧장 세이브리스 길드로 되돌아갔고, 그 날짜가 12월 30일이었다.
“수고 많았어.”
길드 마스터의 집무실.
맞은편에 앉은 요한이 말했다.
“수고라고 할 것도 없었어요.”
레이가 말했다.
가장 많은 오크의 목을 베어 넘겼지만, 레이한테는 몸풀기 수준에 불과했다.
엄청난 재능을 지닌 강현조차, 레이에게는 한수…, 아니. 두 수는 접고 들어가야 할 거다.
점점 그 격차가 줄어들고 있으니, 멀지 않은 미래에 그녀를 추월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하고 있는 건 별개의 이야기.
“후우…, 아쉽다. 그렇지?”
레이의 은퇴 이야기일까.
요한이 말했다.
“아쉽긴 해도…, 지금까지 꿈꿔왔던 순간인데요.”
레이는 요한을 향해 밝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흐흐흐…, 잘됐네. 잘됐어.”
그런 레이를 보고 음흉한 미소를 지은 요한이 말했다.
그의 시선을 강현을 향했고.
“잘 부탁할게.”
“걱정 마십시오.”
레이의 은퇴 건은 옛날에 이야기가 끝난 상태였다.
회귀 후, 레이와 처음 재회했을 때 나눴던 고용 이야기를 요한에게 바로 전했다고 했었으니까.
“앞으로는 어떡할 생각?”
“수도 페론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한동안 입학시험과 제약 쪽에 신경 쓸 생각이죠.”
“음음, 그렇구나.”
팔짱을 낀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떠난다고 했더라?”
“1월 1입니다.”
1월 1일….
요한이 아쉬운 표정을 지은 채 작게 읊조렸다.
요한과 레이는 서로를 부모와 자식이라고 생각해왔다.
당연히 아쉬움이 남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리 준비해온 일이라고 할 지라도.
“요한, 자주 찾아올 테니까 너무 아쉬워하지 마요.”
“아쉬워하긴…, 잘된 일이지. 그렇게 바라던 낭군님 곁으로 가는 건데.”
하지만 그의 아쉬운 표정은 금세 사라지고 음흉한 미소가 빈자리를 채웠다.
“요한 덕분이에요.”
레이는 진지하게 말했다.
회귀한 이후, 요한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 수고했고. 이만 들어가 봐. 오늘 밤에 송별회 할 거니까. 늦지 말고.”
“알겠습니다.”
∴
그날 밤, 송별회를 마치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곧장 침대에서 일어난 강현은 깨끗하게 몸을 씻은 뒤, 깔끔한 옷으로 챙겨 입었다.
흰색 와이셔츠 위로 푸스탄트의 펜던트를 목에 건 후, 군청색의 양복을 빼입었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디자인이었지만, 거울 앞에 선 강현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열심히 운동한 덕이 키도 크고 어깨도 넓다.
흔히 슈트빨이라고들 하던가.
오늘따라 유독 잘 받는 느낌이었다.
강현은 엘리스가 깨어나기 전에, 몰래 방에서 나와 길드 앞에서 레이를 기다렸다.
오늘은 세이브 리스 모험가 길드를 떠나기 전, 마음을 데이트하기로 약속한 날.
평소 옷에 별 관심 없던 강현이 의상에 신경을 쓴 이유였다.
“강현 씨.”
그리고 길드의 문을 열고 레이가 나왔다.
레이를 본 강현은 넋을 잃었다.
안 그래도 아름다운 외모를 더욱 부각해주는 옅은 화장.
끝에 약간의 웨이브가 들어간 붉은 머리카락.
어깨가 드러난 붉은 드레스와 가슴골 사이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목걸이까지.
“어, 어때요…?”
딱 봐도 한 것 꾸민 듯, 레이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평소에, 꾸미지 않은 레이도 엄청나게 아름답다.
그런데 지금은 작정하고 꾸미기까지 했다.
불의 요정님.
레이를 본 순간 그 표현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항상 예뻤는데 오늘은 특히 더 예뻐 보이네.”
레이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신중히 대답을 고른 강현은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그… 래요? 헤헤….”
얼굴을 붉힌 레이는 앞으로 모은 양손을 꼼지락 거리며 대답했다.
“강현 씨도 오늘따라 더 근사하시네요.”
“… 고마워.”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강현과 레이 모두.
“그럼 갈까?”
“네.”
레이는 강현에게 팔짱을 꼈고,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레이가 바람대로, 데이트는 소박하게 진행되었다.
소박한 것과는 달리 데이트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 가게.
고기와 각종 채소들이 둥둥 떠다니는 수프의 부드러움과 호밀빵의 고소함을 즐기며 식사를 끝냈다.
근처에 있는 극장에서 극단의 연극을 봤고 크고 맑은 물로 유명한 호수 근처를 산책했다.
고급 음식점에서 스테이크와 와인을 마시며 여느 때보다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고.
강현과 했던 첫 데이트 코스를 그대로 따라 밟아서 그런 걸까.
그와 처음 만났을 때의 감정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네가 그때 막 울면서 말했잖아, 제가 역겹지 않으신가요…, 이러면서.”
근처에 위치한 고급 주점, 호수의 선율.
나란히 앉아 술을 만드는 바텐더를 보며 강현이 말했다.
“그, 그건…. 잊어주세요.”
“어떻게 잊어. 난 내가 살면서 그렇게 강렬한 고백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는데.”
과거의 이야기들을 안주 삼아 즐거운 술을 홀짝이며 강현이 말했다.
“정말….”
조용한 분위기와 가까운 거리.
그의 미소까지.
과거의 이야기 때문에 부끄러웠지만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웠다.
“제 마음 아시면서.”
취기 때문일까.
달라 오른 얼굴로 얼굴을 붉히는 레이의 얼굴이 평소보다 야릇해 보였다.
은은한 미소가, 사랑이 느껴지는 시선이.
달콤한 목소리가 짙게 스며든다.
“그러는 강현 씨도 매일 다른 여자를 데려오시고. 이번에 벨라님도 노리고 계신 건 아니죠?”
“뭐래, 당연히 아니지. 애초에 난 지금까지 그 누구든 노린 적이 없다니까?”
“헤헤, 알아요.”
이런저런 대화가 이어지고 술잔은 점점 비워져만 갔다.
알코올과 분위기에 취해, 기분 좋은 몽롱함이 느껴지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다 마셨네요?”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레이가 물었다.
“… 그만 일어설까?”
“좋아요.”
강현과 레이는 호수의 선율에서 나왔다.
“강현 씨.”
그리고 강현의 손을 잡으며 레이가 말했다.
“저 오늘 들어가기 싫어요.”
마을 중심에 위치한 시계탑이 시침이 움직였다.
시침은 12라는 숫자를 가리킴과 동시에 분침, 초침과 만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