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20살 (2)
* *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강현은 기상과 동시에 달력을 확인했다.
12월 25일.
‘앞으로 1주일.’
달력은 본 강현은 1월 1일, 20살이 되기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생각했다.
1달 전부터 생긴 버릇이었다.
곧장 옷을 챙겨 입은 뒤, 의뢰를 수행한 물건들을 제대로 준비했는지 인벤토리를 열어 마지막으로 확인해봤다.
“식량이랑…, 텐트랑….”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해본 뒤 강현은 옆에 누워있던 엘리스를 살살 흔들었다.
“엘리스, 일어나. 슬슬 출발하자.”
그와 동시에 검은 속옷에 쌓여있던 가슴이 그 존재감을 뽐내며 덩달아 흔들리기 시작했다.
갸름한 턱선과, 얇은 목.
야릇한 쇄골까지.
이런 아침의 풍경을 몇 년이나 봐왔음에도 강현은 전혀 익숙해지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신체부위들 중에서 강현의 시선을 훔친 건 엘리스의 붉은 입술이었다.
엘리스는 조금씩 고운 입술을 달싹이기 시작했고, 천천히 양쪽 눈을 뜨고는 강현을 바라봤다.
“주인님….”
그리고 몽롱한 목소리로 강현을 부른 엘리스는 그를 향해 양팔을 뻗었다.
“흠흠….”
강현은 부끄러울 때마다 헛기침을 내뱉었다.
얼굴이 살짝 화끈거리기 시작한 것을 느낀 강현은 천천히 상체를 숙였고 엘리스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하움….”
서로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고 그 사이에서 두 개의 혀가 잠시 동안 찐득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쪽, 하움… 쭈웁…. 하아….”
짧은 키스가 끝나고 양 입술 사이에 투명하고 얇은 실이 하나 생겼다.
강현이 숙였던 상체를 다시 세우자 실은 맥없이 끊어졌다.
“좋은 아침이네요.”
살짝 상기된 얼굴로 인사를 건네 왔다.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엘리스의 눈빛이 마치 생선가게 앞을 서성이는 고양이가 떠올라, 강현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응, 좋은 아침.”
언제부터였을까.
푸스탄트가 여행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쯤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키스로 엘리스를 깨우기 시작한 것은.
왜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엘리스가 요구해왔던 것만 기억하지.
강현도 싫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푸스탄트가 떠난 후, 아침을 맞이할 때마다 느껴지던 적적함이 키스를 하고 나서는 깔끔하게 잊혀졌으니.
또한 남자로 태어난 강현이 아름다운 여인과 하는 키스의 뜨거움과 끈적함, 단맛 없는 달콤함은 싫어할 리가 없었다.
“빨리 일어나, 1시간 뒤에 출발이니까.”
강현은 침대에서 일어나, 엘리스를 보며 말했고,
“네에.”
엘리스는 늘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가 욕실로 들어간 걸 확인한 강현은 곧장 길드 숙소에서 나와 로비로 향했다.
길드 숙소는 길드 건물 내부에 설치되어 있었고 강현은 먼저 나가 여인들을 기다릴 생각이었다.
“응? 벌써 나왔어?”
그리고 방 문을 열고 나서자 바로 옆에 아름다운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엘프, 라비가 서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로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 화보에서 볼 법한 자세였다.
모델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름다움을 지녔기로 유명한 엘프인 라비인 만큼.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라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기다려준 거야?”
그런 라비에게 강현이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을까.
“뭐, 뭐래! 아니거든?!”
그리고 순식간에 하얀 얼굴을 붉게 물들인 라비가 발작하듯이 외쳤다.
아니면 아니라고 하면 되지, 왜 저렇게까지 성을 내는 걸까.
“아니면 말고.”
강현은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라비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만큼, 그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수단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으니.
“가자, 계속 여기 서 있지 말고.”
“… 맘대로.”
그런 강현의 모습이 어째서인지 불만스러웠던 라비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했고, 강현과 함께 길드 로비에 배치된 테이블에 앉았다.
“그런데 매일 이렇게 일찍 나와서 기다리면 힘들지 않아?”
무슨 말을 꺼낼지 잠시 고민한 라비가 물었다.
강현은 항상 무슨 약속을 잡던지 간에 최소 30분은 일찍 나와서 기다렸다.
그의 그런 행동은 처음 만난 후, 몇 년이 지났음에도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딱히?”
강현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정말로 별거 아녔으니까.
현대에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생겼던 습관이었다.
지각할 때마다 무서운 선생님한테 혼나는 게 싫었으니까.
“늦는 거 보단 낫잖아.”
“그래도 뭐라고 할까…, 심하다? 아니,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니야?”
잠시 단어를 신중하게 고민한 라비가 물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냥 시간도 남고, 먼저 나온 상대가 기다릴 수도 있잖아. 오늘도 시간 맞춰서 나왔으면 너도 계속 기다리지 않았겠어?”
“이, 이게 진짜…! 기다린 거 아니라고! 그냥 마침 지나가던 중이었거든?”
“어련하시겠어.”
말도 안 되는 핑계였다.
강현의 방 근처를 지나갈 이유가 전혀 없기에.
다른 모험가들이 지내는 숙소를 향하던 중이었다면 또 모를까.
모험가들 중에 친한 사람도 없는 라비였다.
“그건 그렇고 아리는 안 데리고 와도 괜찮겠어?”
다른 모험가들을 의식한 강현은 아리아의 가명을 입에 담으며 물었다.
또한 분한 표정을 지은 채, 씩씩거리는 라비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성녀라는 신분을 숨기고 사는 만큼 개방된 곳에선 가명으로 그녀를 불러야 했다.
사실 가명으로 불릴 일이 조금 더 많은 탓에 아리라는 이름이 더 입에 붙기도 했지만.
“준비 중이야, 한 10분 뒤에 데리러 가기로 했어.”
뭐가 됐든 대답을 착실하게 해주는 라비였다.
“흐음…? 그래?”
그럼 남는 시간 동안 같이 있으려고 찾아온 걸까.
강현은 그 의문을 입에 담으려 했지만 라비가 제지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착각이고 아니니까 그런 줄 알아라.”
제지라기보다는 위협에 가까웠다.
물론 강현의 눈에는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외형만 보면 20대 초중반이지만, 장수 종인 엘프인 만큼 우리들 중 나이가 제일 많을 텐데.
물론 엘리스 빼고.
“알겠어.”
“… 뭐가 재밌다고 웃는 거야?”
은은한 미소가 띤 강현에 시선에 라비가 툴툴거렸다.
심장이 왜 두근거리는 걸까.
설마 내가 인간을 좋아하는 걸까.
말도 안되지, 라비는 항상 부정했다.
∴
30분 정도 지났을까.
어느새 길드는 의뢰를 구하기 위한 모험가들로 바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길드 접수대에선 더 이상 메르시를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홀 몸도 아니니까.
다른 여인이 채운 그 자리를 보며 강현은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고 있었다.
브리튼이 얘기한 탈모약과 정력제의 판매 상황.
검술과 마법에 관한 생각과 아카데미 입학시험.
그런 던 중, 여인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아리아를 데리고 오기 위해 라비가 떠난 사이, 엘리스와 레이가 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리아와 라비도 합류했다.
일행이 모두 모인 후, 강현은 모두와 함께 미리 수배해둔 마차로 향했다.
그리고 긴장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바로 강현의 옆자리를 정하는 순간.
마차의 구조 상, 2명은 강현의 옆자리에 앉을 수 있지만, 나머지 두 명은 맞은편에 앉아야 했기에.
그리고 여인들은 가장 공평한 방법으로 자리를 정하기에 이르렀다.
그건 바로.
“저부터 뽑을게요.”
제비뽑기.
아쉽게도 가위바위보는 공평하지 못했다.
손의 움직임을 보고 상대방이 무엇을 낼지 예측할 수가 있었다.
그런 탓에 항상 가위바위보는 확률 싸움이 아닌 실력 싸움이 되어, 아리아는 단 한 번도 강현의 옆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렇게 이번엔 아리아와 엘리스가 강현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아쉽네요, 그렇죠?”
레이가 라비에게 물었고.
“저, 전혀? 나는 다들 하길래 나 혼자만 안 하면 뭐할까 봐 그냥 하는 거거든?”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하던가.
라비는 아니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아쉬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할 뿐이었다.
“… 저기 애들아?”
말과 마차의 상태를 확인하고 돌아와, 그런 여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강현이 입을 열었다.
“그 마부가 일이 생겼다고 해서 마차 끌 사람이 필요하거든?”
1주일 전 마차를 수배해뒀으나, 마부는 개인 사정으로 인해 마차를 운행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새로운 마차를 수배할 시간이 없었던 강현은 마차를 대여하기로 했었다.
“… 그래서요?”
“여기서 나 말고 마차 끌 줄 아는 사람 없지?”
여인들은 고개를 저었다.
“이 마차 내가 끌어야 해서 나 짐 칸에 못 타.”
그리고 강현은 제비뽑기가 무의미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뭐, 어쩔 수 없죠.”
엘리스는 강현의 옆으로 다가와, 그의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검으로 변했다.
마부석 옆에 앉을 수 없다면 그의 허리춤에 있으면 그만이었다.
“…!”
레이는 놀란 눈으로 그런 엘리스를 부럽다는 듯이 바라봤다.
“… 그, 그럼 가자.”
강현은 세상을 잃은 것 같은 아리아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말했다.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