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영웅 (2)
* * *
마녀는 잘못될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 말을 믿든 말든, 전투가 시작됐다.
검강의 검은 충격파를 볼 때까지만 해도 요한의 압도적인 패배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데스나이트인 한을 반대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의 검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짙어지고 날카로워졌다.
또한 그의 검기가 지나간 자리 위로 생성된 바람의 충격파는 마치 검강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이는 그대로의 상황 일 뿐.
여유로워 보이는 데스나이트와 달리, 요한의 호흡은 점점 거칠어지고 몸을 둔해져가고 있었다.
요한의 체력은 점점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다.
검성의 태동을 지켜보고 있는 구조대는 그저 손을 모아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데스나이트에게서 검은 기운이 빠져나와 결계 안을 가득 메웠다.
그는 자신의 왼손을 가슴 위로 얹었고 그곳에서부터 검을 칼날의 대검이 한 자루 생성되었다.
양손 대검의 한.
제대로 된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한은 한 자루당 100킬로는 넘어 보이는 검을 마치 나뭇가지 흔들 듯 휘둘르며 요한에게 한 발자국씩 다가갔다.
엄청난 무게와 속도를 지닌 공격에 요한은 피해 내거나 간신히 막아내는 것이 전부였다.
“마녀님.”
불안한 마음에 강현이 마녀에게 말을 걸었다.
결계 안의 전투를 흥미진진하게 바라보고 있던 마녀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무슨 일이니?”
어째서일까.
강현은 아까 전부터 마녀의 말투에서부터 다정함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요한이 마녀님을 즐겁게 해드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거니. 그냥 아쉬울 뿐이지.”
마녀는 담백하게 대답했지만, 명확한 대답을 원했던 강현은 다시금 일을 열었다.
“메르시님은….”
“아, 그걸 걱정하고 있었던 거구나. 걱정 마렴, 안 그래도 지금 데리고 오라 했던 참이었단다.”
데리고 오다니.
설마 다른 동료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걱정하지 말거라. 아직 너에겐 보이지 않겠지만, 이미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싹을 텄으니 말이다.”
후후, 나른한 표정을 지은 채, 마녀가 미소를 지었다.
축 처진 눈꼬리가 올라간 모습은 잠시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강현이 신경 쓸 것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강현은 고개를 돌려 다시 요한의 전투를 지켜봤다.
요한이 데스나이트가 내려친 칼등을 밝고 뛰어올랐다.
그의 검이 향한 곳은 투구의 중앙, 데스나이트의 마석이 위치한 장소였다.
하지만 요한의 검은 마석에 닿지 못했다.
투구의 형태가 변하며 마석을 방어했기에.
데스나이트의 최대 약점인 마석을 공격하지 못한다.
절망적인 상황이 분명했지만 요한은 멈춰 서지 않았다.
“메, 메르시!”
“레이!!”
그러던 중, 레이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검은 고양이 한 마리와 함께 있던 메르시의 품으로 레이가 뛰어들었다.
메르시는 눈물을 머금고 주변을 살폈고 그녀의 시선이 한 곳에서 멈춰 섰다.
데스나이트와 요한의 전투를 본 그녀는 경악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메르시 이게 무슨 일이냐면….”
레이는 메르시에게 상황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구조대가 왔다는 사실과 요한이 어째서 데스나이트와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는지.
레이의 설명을 들은 메르시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걱정하는 듯했다.
메르시도 요한이 검성의 경지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조금 비현실적인 상황에 얼떨떨한 게 아닐까, 강현은 생각했다.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
“너무 걱정 마라냥, 내 주인이 이상하긴 해도 나쁜 주인은 아니댜옹.”
두 팔로 서서 허리춤에 손을 짚고 가슴을 내밀며 사람의 말을 하는 고양이.
“제피가 요즘 생선이 질린 걸까.”
“캬아악! 미안하댜옹!”
그리고 그 고양이를 생선으로 협박하는 마녀까지.
어이가 없어 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긴장감을 풀어주기엔 충분했다.
이제 요한의 대련이 끝나기만 한다면, 다시 길드로 돌아갈 수 있었다.
“슬슬 시작하는구나.”
그리고 결계 내부를 바라보며 마녀가 말했고,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결계를 가득 메웠던 검은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레이와 강현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요한의 마나가 지닌 속성, 바람 속성이 검강으로써 개화하는 순간이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은 이윽고 폭풍이 되었다.
검은 기운과 섞여 검은 폭풍이 되었고 결계 내부가 서서히 가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 구조대원의 눈 속의 요한의 모습이 들어왔다.
휘몰아치는 폭풍을 헤엄치는 새처럼 요한이 날아올랐다.
가벼웠졌던 분위기가 다시 엄숙해졌다.
사람들은 긴장한 채 결계를 바라보며 폭풍이 거두어지기 기다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오직 마녀만이 소를 머금은 채.
폭풍이 사라졌다.
“아….”
누군가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누구일까.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탄식일 수도 있고.
데스나이트는 그 위용을 내뿜으며 굳건하게 서 있었다.
그런 데스나이트 앞에 요한은 무릎을 꿇고 있었고.
“완벽해.”
그 사이에 마녀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초월했구나.”
그리고 결계가 거두어지고 메르시가 요한을 향해 달려갔다.
∴
졌지만 잘 싸웠다.
요한의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말이리라.
요한과 재회한 메르시는 요한의 품 속에 파고들었다.
“미안해, 미안해요, 요한…! 매일 화내고 짜증내서, 요한은 아무 잘못 안 했는데…!”
“메르시….”
잠시 상황을 파악하느라 벙쪄있던 요한은 메르시를 끌어안았다.
“나야말로 지금까지 모른 척해서 미안해. 사실 메르시, 나도 너랑 같은 마음이야. 내가 좋아서 그랬던 거잖아. 그냥…, 고마워.”
둘의 사랑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고 있었고, 구조대원들은 요한이 검성의 경지에 오른 것을 축하해주기 시작했다.
강현은 살짝 뒤로 물러서 축하해줬다.
‘산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막막했는데.’
다행이었다.
동시에 강현은 마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들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재회와 축하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제대로 된 축하는 길드에 돌아가고 나서.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슬슬 돌아가야겠구나.”
마녀가 일어서며 말했다.
그녀가 앉아있던 빗자루는 지팡이가 되었고, 거대한 마법진이 구조대원들의 발 밑에 형성되었다.
강현은 텔레포트 마법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 돌아가는 길만큼은 편히 갈 수 있게 해 주지. 잘 가렴.”
“…, 감사합니다.”
상황을 전해 들은 요한은 잠시 고민한 끝에 마녀에게 감사를 전했다.
메르시를 구해주고 검성의 경지에 오를 수 있던 것은 데스나이트와의 대련 덕이었으니.
“인사는 됐단다. 하암…, 피곤하니까 어서 가렴.”
작게 하품한 마녀가 지팡이를 한차례 휘둘렀다.
마법진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고 구조대원들이 사라졌다.
멋지게 자라줬구나, 앞으로도 멋진 사람이 되어주렴.
그리고 강현의 머릿속에 마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찾아올 생각을 말고, 이제 거처를 옮길 생각이니 말이야.
∴
텔레포트가 시전 되고 구조대원들이 눈을 뜬 곳은 세이브리스 모험가 길드였다.
배치된 의자에 앉아 산으로 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던 모험가들은 갑자기 나타난 구조대원들과 메르시를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기, 길드장!”
“메르시!”
반가운 얼굴에 자리에 앉아있던 모험가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메르시는 모험가들에게 걱정 끼쳐 미안하다는 사과를 건넸고, 모험가들은 괜찮다고 말했다.
메르시의 구출을 축하하는 분위기가 시작되었지만 강현은 머리가 복잡했다.
‘멋지게 자랐다고?’
언젠가 봤던 적이 있는 사람인가?
아니, 이 세계에 오고 나서 마녀를 봤던 기억은 단 하나도 없었다.
강현이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5살 꼬마 아이로 눈을 떴다.
혹시 그전에 알고 있던 사람일까.
‘뭐하는 여자야.’
지 할 말만 하고 툭 끊는 탓에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찾아오지도 말라니.
‘으으음….’
강현은 결국 고민을 멈췄다.
어차피 고민한다고 뭔가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억해뒀다가 언젠가 알아가면 되겠지.
지금은 그저 축하의 분위기를 즐기자.
∴
길드에선 파티가 시작되었다.
술과 음식, 노래와 이야기가 파티를 더욱 즐겁게 만들어줬다.
강현도 그 사이에서 음식을 먹으며 파티를 즐겼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고 밤이 찾아왔다.
파티는 끝났고 모험가들은 돌아가기 시작했다.
“요한 님.”
그리고 강현은 보리맥주를 들이켜고 있던 요한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응? 왜, 무슨 일이야.”
“이거 선물입니다.”
요한과 메르시의 사랑도 이어졌겠다.
강현은 자신이 직접 만든 약을 요한에게 건넸다.
“이게… 뭔데?”
유리병에 담긴 녹색의 액체를 유심히 살펴본 요한이 물었다.
“그… 정력제입니다.”
“정력… 제?”
“네.”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와 동시에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강현의 말을 들은 여인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라비, 들었죠?”
“… 몰라.”
아리아와 라비.
“….”
그 정력제를 왜 만든 건지 심각하게 궁금한 레이까지.
엘리스는 아까 산에서 들었던 마녀의 말 때문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고.
“직접 만든 거야?”
“예, 언제가 쓸 데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만들어봤습니다.”
돈을 벌 수단들 중 하나로.
“효과는 확실하니 안심하시길.”
“아니, 그… 음, 고맙다.”
잠시 망설이던 요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전했다.
자신을 향하는 메르시의 눈빛을 느낀 요한은 아무래도 오늘 밤, 거사를 치르게 될 거란 사실을 직감했으니.
“그리고 혹시 마음에 드시면 홍보도 좀 부탁드립니다.”
“그게 목적이었냐?”
“뭐, 아니라고 할 순 없지만…, 같은 남자 아닙니까.”
이 세계에서 밤일을 못하는 남자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박하다.
요한이 마나를 깨닫고 훈련한 만큼, 노화가 느리다 할지라도 내일모레면 50이다.
“크흐흐, 그래. 내가 아는 사람들한테 제대로 홍보해줄게.”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선물을 전달해준 뒤, 강현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