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순애보 (2)
* * *
메르시는 노예로서 태어났지만,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해왔다.
노예상에서 태어난 다른 대부분의 노예들과는 달리,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의 얼굴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처음부터 노예였기에, 자유로운 삶이 어떤 건지조차 몰라, 괴로워하지 않았었으니.
그래 봤자 노예의 삶, 윤택할 리가 없었다.
집은 차가운 쇠창살이었으며 친구는 더러운 쥐들이었다.
메르시가 초경을 맞이해 성인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 해를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거다.
자신이 초경을 맞이했을 때, 탐욕으로 번들거리던 남자의 눈빛을.
드디어 주문 제작품이 완성되었다는 소름 끼치는 말을.
그때까지만 해도 그 사람이 노예상인 줄 알았다.
어느 날, 요한을 만났다.
메르시는 판매되기 위해 마차에 탄 채로 운송 중이었다.
밖에서부터 소음이 틀려왔다.
피가 튀기는 소리와 함께.
칼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그리고 마차를 덮고 있던 천막이 걷히고, 요한이 나타났다.
그가 말했다.
이제 괜찮으니까 걱정 말라고.
뭐가 괜찮고 뭐를 걱정한다는 말인가.
평생 어두컴컴한 지하감옥에 갇혀, 그곳만이 자신의 세계의 전부였던 메르시가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세상을 밝고 아름다웠다.
하늘은 끝을 알 수 없을 만치 드높았으며 따듯한 햇살과 싱그러운 바람이 볼을 스쳐 지나갔을 때, 눈물이 흘러내렸다.
감동이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그때, 요한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또 한 번 이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라, 말하며.
크고 굳은살이 박혀 투박했지만, 부드럽고 따듯했다.
시간이 흘렀다.
메르시는 자신이 도적이라고 불리는 범죄자들에게 납치당한 부부의 자식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 귀족가의 망나니는 메르시의 어머니를 첩으로 들이려 했으나, 거절당했기에 도적에게 일을 의뢰했다.
그녀가 딸을 낳게 만든 뒤, 그 딸 성노예로 만들어 자신에게 바치라고.
어미는 이미 더럽혀졌으니까.
그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한동안 몸져누웠다.
몰려오는 역겨움은 몇 번이나 토악질하게 만들었다.
그때도 요한이 옆을 지켜줬다.
메르시를 간호해주며,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말주변이 없고 쓸데없이 착실한 어설픈 남자였다.
하지만 그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그 지옥 같던 시간들을.
시간이 흘러, 메르시는 괜찮아졌고, 그 귀족가의 망나니는 황실에서부터 처형당했단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속이 후련했지만, 직접 복수할 수 없었단 사실이 너무나도 분했다.
삶의 목적을 잃은 기분이었다.
그런 메르시에게 요한이 말했다.
잃어버린 어머니를 찾으러 가자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메르시의 어머니는 도적들의 소굴에 함께 감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메르시가 7살이 되던 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도적들한테서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다.
평범한 여인에 불과하니까.
분명 살아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메르시는 거절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 메르시를 설득했다.
희망으로 가득 찬 이야기를 건네주고 다독여주어, 새로운 삶의 이유를 부여해주려 했다.
그런 그에게 메르시가 물었다.
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냐고.
생판 남이며 가진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자신에게.
그리고 그가 답했다.
메르시는 그 말을 단 한순간도 잊지 않고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사나이로 태어난 이상, 괴로워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건 사나이 실격이야.
이야기 속 용사와 영웅들은 그래 왔으니까.
그리 거창한 이유가 뭐가 필요해, 내가 하겠다고 결정한 것이 곧 이유라고.
별 시답잖은 이유였다.
사나이 실격은 또 뭔가.
열혈적인 남자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였을 줄이야.
그때 메르시가 느꼈던 감정은 어이없음이었다.
하지만 메르시가 태어난 후로, 처음 웃었던 순간이었다.
요한이 메르시의 태양이 된 순간이었다.
∴
“나쁜 놈….”
마을 밖, 바위에 앉은 메르시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몰라주는 거란 말인가.
요한이 미울 따름이었다.
눈치가 없어도 적당히 없어야지.
“… 내가 누굴 욕해.”
메르시도 요한에게 짜증낼 입장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가 아무리 눈치가 없다 할 지라도, 면전에 대고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도 알아챌 수밖에 없다.
하지만….
메르시에게 있어서 요한은 너무 과분한 남자였다.
아무것도 없는 자신에 비해, 요한은 어디를 가든 그 빛을 뿜어낸다.
두터운 인망과 뛰어난 실력은 많은 사람들을 이끌었다.
거기에 더해 뛰어난 외모까지 갖춘 그였기에 많은 여자들이 접근해왔고.
그에 반해 메르시에 겐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가 조금 좋은 걸 빼면은.
메르시는 요한의 곁에서, 그에게 받은 것들을 보답하기 위해 살기로 다짐했었다.
묵묵히.
그의 사랑을 가질 수 없다 해도, 그가 행복질 수만 있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러던 어느 날 레이가 나타났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 삶을 사는 레이는 메르시의 귀감이 되었다.
겁쟁이였던 자신과는 달리,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니까.
그런 마음을 지닌 채, 성장하는 레이를 본 메르시는 그녀를 본받기로 했다.
요한을 사랑하니까.
여러 가지를 배웠다.
소히 말하는 여우 짓, 내지는 꼬리 치기.
가끔씩 그에게 은근한 시선을 보냈으며, 약간의 스킨십을 행했다.
단 둘이 있을 만한 시간을 마련하려 애썼으며, 외모를 꾸미고 그의 말에 일부로 큰 반응을 보임으로써 그가 자신과의 대화를 더욱 즐겁게 느낄 수 있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진전은 없었다.
요한은 그런 메르시의 노력을 몰라주줬다.
메르시는 몇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끝내 요한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이 사랑의 감정이 자신에게만 존재하고 있을까 봐.
과한 욕심을 부린 탓에, 그와의 관계가 틀어질까 봐.
요한이 눈치가 없다면, 메르시는 겁쟁이였다.
그저 요한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여자였으며.
그 사실을 메르시는 자각하고 있었다.
“부럽다….”
메르시는 레이가 부러웠다.
그녀는 항상 자신감에 차 있었고, 강현의 옆에 선 다른 여자들 앞에서 단 한 번도 주눅 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끝내 사랑을 이루어낸 레이와 강현의 사이에서는 깨가 떨어지고 잇었으니.
“…, 나도….”
레이와 강현에게 자주 조언을 들었다.
요한이 몰라주면 고백하면 되는 게 아니냐고.
그럴 수 있을까.
자신에게 삶의 이유를 주고 항상 곁을 지켜준 요한에게 고백한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돌아가자.”
주점에서 술이나 마신 다음에, 요한을 찾아가 사과하기로 결정한 메르시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마을로 되돌아가려 했다.
“부힛….”
등 뒤에서 기분 나쁜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오, 오크…?”
4등급 중위권 몬스터 오크가 왜 여기 있단 말인가.
경악한 메르시는 두려움을 느꼈다.
근처에서 몬스터가 있을 만한 곳은 산이 전부.
심지어 추운 겨울엔 몬스터가 산에서 내려오는 일은 없어야 정상이었다.
∴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방에서 나온 강현은 평소와 길드의 아침이 평소와 다름을 눈치챘다.
메르시가 있어야 할 접수창구는 비워져 있었고, 모험가들은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듯이.
“가, 강현 씨!”
그때, 강현을 발견한 아리아가 그를 불렀다.
“무슨 일이야?”
아리아와 라비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가, 의자에 앉으며 강현이 물었다.
“메르시가 안 돌아왔다던데.”
라비가 말했다.
그 정도는 흔한 일이었다.
요한과 싸운 메르시가 술을 마시고 다음날 늦게 돌아오는 건 자주 있을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오늘 아침에 레이가 메르시를 찾으러 나갔다는데 마을 주점이랑 여관 사람들 중에서 메르시를 본 사람이 전혀 없데요.”
“….”
상황이 심상치 않다.
불길한 기운이 느껴져 왔다.
“정령들한테 물어봤더니, 마을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더라. 그래서 모험가들이 메르시의 흔적을 찾으려고 나간 상태야.”
마을 밖으로 나가고, 아직까지도 안 들어왔다.
“요한이랑 레이는?”
“당연히 찾으러….”
아리아가 대답하던 중, 길드의 문이 열렸다.
사전에 시간을 약속해둔 걸까.
짧은 주기로 나가 있던 모험가들과 레이, 요한이 돌아왔다.
총 10명.
그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하지만 그중, 요한의 동생인 요루, 그의 표정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다들 뭔가 찾은 거라도 있수?”
금색 모험 가패를 목에 건 바르탄이라는 중년 남성이 물었다.
탐색조들은 고개를 저었다.
레이와 요한까지 마찬가지.
마지막 요루에게 모든 이들에 시선이 향했을 때, 그가 입을 열었다.
“이거.”
요루는 주머니에서 흰색의 머리띠를 꺼내 들었다.
“그, 그거 어디서 났어!”
그걸 본 요한이 다급하게 외쳤다.
“마을 밖 평원에서, 그런데 이 머리띠 근처에 오크의 발자국이 찍혀있었어.”
“그, 그래서? 메르시는요?”
레이가 물었다.
“산.”
괴로운 표정을 지은 요한이 짧게 말했다.
“산…?”
“뭐라고…?”
“오크한테 산으로 끌려간 거야?”
요루의 말에 모험가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끌려간 흔적이랑 오크의 발자국이 산에서 끊겨 있었어.”
“맙소사….”
양손으로 입을 들어 막은 아리아가 말했다.
‘미친, 하필 산이라고?’
강현 또한 참담한 심정이었다.
“이런, 씹…!”
“혀, 형! 진정해!”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이고 사색이 된 요한은 곧장 길드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고 요루가 그를 다급하게 멈춰 세웠다.
* * *